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40화 (240/605)

240화. 알현

240화. 알현

로벨은 볼프 후작의 변명 아닌 변명을 깊이 생각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일리가 있었다.

검은 숲의 몬스터가 창궐했을 때, 볼프 후작이 블랙우드 시티를 점령하니 사람들은 검은 숲의 신비보다 볼프 후작의 패도(悖道)에 집중했다.

옛 왕이 살아 돌아왔을 때, 볼프 후작이 구왕파를 모아 전쟁을 선포하니 사람들은 국왕의 비밀보다 볼프 후작의 야망에 집중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모든 사건의 배후에 볼프 사트로 후작이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괴기스러운 괴물이 왕국을 조종하고 있다는 것보다 야심이 넘치는 북방의 제후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쪽이 믿기 좋았다.

‘괴물을 막기 위해 괴물이 된다고?’

로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옳지 않았다. 결국은 누군가 고통 받아야 하니 악마추종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혜로운 자들은 최악보단 차악을 선택해 세상을 좋게 만든다지만, 젊고 강한 로벨은 ‘악’ 자체를 용납하지 못했다. 로벨은 볼프 후작의 선택이 못내 아쉬웠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으면, 그랬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텐데.’

볼프 사트로 후작은 하인즈 성에서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자신의 몸값과 전쟁 배상금으로 사트로 가문의 영지 일부와 사트로 시티의 특권 일부를 프란시스 가문에 넘겼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전공에 따라 전리품을 분배했다. ‘늙다리’ 하인즈 자작을 처단하고, 하인즈 성을 점령하고, 볼프 사트로 후작까지 생포한 로벨의 전공이 단연코 제일이었다.

“정말 너무하지 않습니까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허공에 주먹질했다. 로벨은 상념에서 깨어나 쒸익! 쒸익! 거리는 허풍쟁이를 달랬다.

“또 뭐가?”

“기사 나리가 일등공신이잖습니까! 그럼 당연히 땅을 내놔야죠! 먹지도 못하는 종이 쪼가리라니요!”

로벨은 어깨를 으쓱였다. 에릭 공작이 왜 영지를 하사하지 않는지 대강 짐작되었다. 로벨의 영지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가문 대대로 물려온 늑대성, 후계자 전쟁 때 하사받은 회색산, 정통성 전쟁 때 점령한 가시성과 바위성, 류트 공자의 사주를 받았다가 추방된 모건 아만다 남작의 성을 삼키고, 구릉성과 늪지성의 충성맹세를 받고, 검은 숲의 알버트 제임스 공작과 동맹을 맺어 까마귀 성과 가시나무 성까지 할양받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전부 합치면 볼탄 반도의 1/3이 되는 크기였다. 지금 가진 땅만 해도 위협적인데, 추가로 땅을 하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집사가 알면 길길이 날뛸 겁니다요.”

“윽...”

로벨은 봄의 끝자락을 잡고 늘어진 귀경길을 굽어보았다.

울프 용병단이 보리 익은 논밭 사이로 구불구불 걸어갔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는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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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걱정과 달리 어린 집사는 화내지 않았다.

“북부대로 징수권이라구요?”

“으응... 그렇다니까.”

어린 집사 얼굴에 주름이 싹 가셨다.

“와! 와! 영주님! 드디어 해내셨군요! 그동안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었어요!”

로벨은 펄프 대장 지휘 아래 물자와 장비를 창고로 옮기는 울프 용병단을 구경하며 되물었다.

“이게 좋은 거야?”

“엥? 당연하죠! 북부대로를 지나가는 상단이 몇 개인 줄 아세요? 그 사람들한테 세금을 5%씩만 받아도... 에... 아무튼 엄청나요! 시골 장원 하나 받아서 농사짓는 것보다 10배! 100배! 나아요!”

땅이 가진 힘은 페닝만이 아니라 징수권보다 못하다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작은 포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대단한 걸 사트로 가문이 독점하고 있었던 거야?”

“에이, 독점은 아니죠. 북부대로에 걸쳐 있는 영주들이랑 나눠 가졌겠죠. 강철성부터 시작해서...”

어린 집사는 신나서 떠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북부대로의 문지기가 로드릭 가문의 철천지원수 도트넘 가문이었다.

“잠깐? 골칫거리를 넘긴 거잖아!”

어린 집사는 남쪽을 향해 무례한 손짓을 보내기 시작했다. 로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안 그래도 도반 도트넘 백작과 만나려고 했어.”

어린 집사 깜짝 놀라 말렸다.

“왜요? 그 괴... 물을 왜 만나요? 진짜 도반 도트넘도 아니잖아요?”

로벨과 도반 도트넘 백작은 서로의 약점을 쥔 사이였다.

“나도 진짜 로벨 로드릭이 아니니까.”

로벨은 볼프 후작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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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달리 강철성으로 떠나지 못했다. 전쟁 뒤처리가 생각보다 길어졌기 때문이다.

전사한 용병의 급료를 계약서대로 유가족에게 전달하고, 부상이 심한 용병은 회색산으로 보내주었다. 포탄, 화약, 식기, 식자재, 목재, 아마포 등등 소모된 물자를 확인해서 채워 넣고, 영지민과 상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조촐하게 승전축하연을 벌였다. 그 와중에도 어린 집사와 헨리 피터 상회장은 붉은 산의 광물이 제값으로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팔아치웠다. 얼핏 듣기에 상당한 마진을 남겼다고 한다.

“그럼 뭐해요. 몸값으로 다 내주게 생겼는데.”

좋은 일만큼이나 나쁜 일도 있었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의 몸값 협상이 문제였다.

바위성과 가시성의 피해가 대단해서 몸값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아들들이 페닝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벌렸는데, 그 소식이 로드릭 상회를 걸쳐 로벨에게 전해졌다.

“나 때문에 병사를 잃고 포로가 된 거야. 도와주자.”

“그게 왜 영주님 때문이에요? 자기들이 방심해서 진 거지. 그러게 왜 포로를 죽여요? 저쪽에 악마추종자가 있다고 경고까지 했잖아요? 그럼 미리미리 시체라도 치우던가.”

어린 집사가 툴툴거리며 로벨의 의복을 정리해주었다. 새로 맞춘 빨간 소매 우플랑드에 사슴 가죽으로 만든 브레가 잘 어울렸다. 에릭 공작처럼 동방비단을 돌돌 감싸진 못했지만, 볼탄 반도에서 나는 생산품으로는 최상급 의복이었다. 어린 집사는 쇠가죽 부츠까지 꼼꼼하게 입힌 후 뿌듯해했다.

“좋아요! 이 정도면 남 보기 부끄럽지 않겠어요!”

“예전에는 부끄러웠어?

로벨이 눈을 흘기자 어린 집사는 왜 또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은 후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세요. 영주님을 뵈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로벨은 꽁지머리를 한번 만진 후 침실을 나왔다. 2층 복도 아래로 1층 메인 홀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족히 서른 명은 되는 알현객이 찾아와 있었다. 리암 수사가 정수리에 주케토를 고쳐 쓰며 외쳤다.

“로벨 로드릭 후작님 나오십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수군수군하던 소리가 사라졌다. 아야와 이야카가 벌떡 일어나 계단 앞으로 다가왔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꾸준히 훈련시킨 보람이 있어 로벨의 존엄함이 30 정도 올라갔다.

“마로드.”

“마이 로드.”

로벨이 메인 홀에 내려오자 알현객이 무릎을 꿇었다. 로벨에게 충성하지 않는 기사와 자유민도 허리를 살짝 숙여 경의를 표시했다. 늑대성의 주인이면 그 정도 인사는 받을 만했다.

“그만 일어나시오.”

로벨은 알현객을 일으키고 의자에 앉았다. 직위에 비해 볼품없는 의자지만, 로벨을 따라다니는 팔걸이 덕분에 위엄이 모자라진 않았다.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 목덜미에 양손을 올리고 애써 굵은 목소리를 내었다.

“시작하시오.”

첫 번째 알현은 어린 집사의 입술을 1인치나 튀어나오게 한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의 아들들이었다.

“마이 로드, 저희 가문을 도와주십시오.”

어린 집사와 사전에 이야기가 끝난 일이지만, 로벨의 자비로움을 알리기 위한 요식행위를 치러야 했다.

“켈트 가문과 바이란 가문은 로드릭 가문의 벗이자 형제다. 힘이 닿는 데까지 돕도록 하겠다.”

“과분한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잊지 않고 반드시 갚겠습니다.”

몸값을 받아가는 사람이 있지만, 몸값을 지불하는 사람도 있었다. 펠트 성 앞에서 사로잡은 기사의 식솔이 금화자루를 바쳤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망은 없었다. 기사가 패해서 포로가 되고 몸값을 지불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외에도 승전을 축하하는 영주와 상인이 진상품을 바쳤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패퇴한 이상 로벨은 명실공히 볼탄 반도의 이인자, 더 나아가 포비아 왕국의 실세 중 실세가 되었다. 정다운 이웃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밉보이지는 말자는 사람이 많았다.

로벨은 얼굴도 기억 못 할 많은 알현객을 차례로 내보낸 후 축 처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지팡이 없이 거동이 불편한 늙은 촌장과 당나귀 한 마리 겨우 가진 떠돌이 상인이 찾아왔는데, 지금은 성을 두어 개 가진 기사와 마차 수십 대를 굴리는 거상이 찾아왔다. 전에 없이 위엄을 세우려니 관자놀이가 지근거리고 뒷목이 뻐근했다.

‘아직도 멀었어?’

‘이제 한 명 남았어요.’

어린 집사가 나직이 타일렀다. 로벨은 마침내 끝이 보이자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리암 수사가 알현 명단을 넘기다가 움찔했다.

“다, 다음은...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입니다.”

로벨의 손이 흐룬팅으로 향한 것도, 펄프 대장이 큰소리로 울프 용병단을 부른 것도, 마녀 키르케가 어린 집사 뒤에 숨은 것도 탓할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소리 없이 사라진 강철성의 주인이 늑대성의 정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뱀파이어 군주...?”

“도반 도트넘 백작이라 불러주시오. ‘로벨’ 로드릭 후작.”

로벨이 거절할 수 없는 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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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현객이 모두 돌아가서 다행이다.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은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병장기를 꺼내 도반 도트넘 백작을 포위했다. 창, 칼, 도끼, 쇠뇌, 몽둥이 등이 펼쳐진 광경은 점잖은 손님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주위에 시선 주지 않고 로벨에게 말했다.

“부하를 잘 두었소.”

로벨은 의자에서 일어나 흐룬팅을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 살 에는 칼집 소리가 흉흉함의 정점을 찍었다. 조금 전까지 화기애애하던 메인 홀이 북해 끝자락처럼 차가워졌다.

“내 성에 ‘또’ 무슨 일이야?”

로벨은 흐룬팅을 아래로 내리고 물었다.

“우리 긴히 할 말이 있지 않소?”

“무슨 말?”

“북부대로의 권리가 후작에게 넘어가지 않았소?”

“...그런데?”

“실제로 북부대로를 관리, 보호하는 것은 우리 도트넘 가문을 비롯한 북부대로 일곱 영주들이오. 우리가 책무를 다 할 수 있게 권리 일부를 양도받고자 하오.”

로벨은 잠깐 동안 말을 잃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말을 이해 못 한 것도 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에 적응이 안 되었다.

악마 중에 악마가 고작 세금 때문에 최고의 적을 찾아왔다? 늑대가 양치기를 찾아가 정중히 울타리 문제를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로벨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평소처럼 말했다.

“내 집사랑 이야기해 봐.”

어린 집사가 할 수만 있다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괴물을 제가 상대하라고요?!’ 로벨도 뒤늦게 실수를 깨닫고 정정했다.

“그전에 우리 관계를 청산해야지.”

도반 도트넘 백작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뱀처럼 웃었다.

“지난 일을 이야기해서 뭐하겠소. 본인이나 후작이나 그저 소임을 다 한 것뿐이거늘.”

“너희들은... 인간이 아니잖아.”

“본인은 늑대의 왕과 다르고, 저승의 길잡이와 다르오. 물론, 요정왕하고도 아주 다르지. 인간을 무시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소.”

“그럼?”

“지금 보다시피. 인간이 되어 인간이 가진 것을 나눠갈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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