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옷장
239화. 옷장
전(前) 그랜드 챔피언의 실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볼프 후작은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롱 스피어를 해비 랜스로 걷어내고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창날이 전투마의 가슴과 다리를 베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전투마도 주인만큼 흥분하여 어지간한 자상으로는 움츠리지 않았다.
“우와악-!”
기세 좋게 언덕을 오른 스피어맨은 갑작스러운 역공에 나가떨어졌다. 뒷걸음치다 뒷사람을 밀어 우르르 주저앉기도 하고, 뒤에서 받쳐줄 사람이 없어 데굴데굴 굴러가기도 했다.
그러나 볼탄 반도에서 전설 비슷한 것이 되어가는 울프 용병단이었다. 고작 기사 몇 명에게 뚫릴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저자가 볼프 사트로 후작이다!”
펄프 대장이 숏소드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주춤하던 용병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놈이 볼프 후작?”
“볼탄 반도의 제후!”
12기사의 후예. 북해의 지배자. 검은 성의 주인. 별명까지 화려한 북방의 제후였다. 볼프 후작을 잡으면 평생 놀고먹을 페닝부터 대를 물려줄 기사 작위까지 골라잡을 수 있었다.
“비켜! 내꺼야!”
“저리 꺼져!”
울프 용병단은 앞다퉈서 병장기를 휘둘렀다. 전투마 위로 몸을 던지는 무모한 용병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사였다. 그것도 로벨에게 패하기 전까지 적수를 찾을 수 없었던 왕국 최고의 기사였다.
볼프 후작은 해비 랜스로 슬쩍 돌려 대형 클리버를 치켜들고 달려오는 용병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전투마의 힘을 빌려 옆으로 휘둘렀다. 뒤따라 달려오던 용병들이 서로 부딪쳐 우르르 쓰러졌다.
“너희에게 볼일 없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후작이 나와라!”
볼프 후작은 무거워진 해비 랜스를 내던지고 마상용 플레일을 잡았다. 전투마 엉덩이와 퀴스에 칼질하는 용병 머리통을 하나하나 쳐냈다.
“이 머저리들아! 말의 다리를 잘라!”
“갈고리! 갈고리로 끌어내려!”
울프 용병단은 볼프 후작을 낙마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흥분해서 날뛰는 1,200파운드짜리 거마와 사방으로 몽둥이를 휘두르는 강철의 기사에게는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주군의 위기에 눈이 뒤집힌 수행기사와 기사 종자가 주군보다 난동을 부리기 위해 애쓰니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한 손이 열 손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시간이 지나자 기사도, 전투마도 지쳤다. 그때 비로소 울프 용병단의 주력부대가 움직였다.
“조준!”
애꾸눈 볼포스의 구령에 100개의 쿼럴이 수평으로 세워졌다.
“우악! 비켜! 비켜! 애꾸눈이 쏘잖아!”
“이런 미친! 모두 피해!”
스피어맨은 무기를 버리고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볼프 후작은 거리를 벌리게 두지 않으려 했지만, 전투마가 지쳐서 이동이 어려웠다. 애꾸눈은 표적이 드러난 정확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발사!”
100개의 쿼럴이 볼프 후작과 수행기사에게 집중사격 되었다.
볼프 후작은 어깨 방패를 끌어올려 눈구멍을 보호했다. 그것으로 전신이 보호되었다. 그러나 전투마는 그러지 못했다.
여기저기 베이고 찔려서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전투마는 쿼럴 소나기를 버티지 못하고 앞발을 꿇었다. 그래도 수행기사보단 나았다. 수행기사의 전투마는 옆으로 쓰러져서 주인의 왼쪽 다리를 깔아뭉갰다.
“후...”
볼프 후작은 피에 젖어 끈적거리는 플레일을 집어던지고 롱소드를 뽑았다. 그러나 적을 베기에 앞서 몸을 지탱하는데 써야 했다.
볼프 후작은 기사의 상징 롱소드를 지팡이처럼 짚고 일어났다. 기사 수업을 시켜준 마스터가 보면 뒤통수를 후려갈겼을 것이다. 볼프 후작은 헬름 속에서 미소 지었다.
“아직 안 끝났다. 자, 와라.”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했다. 적장이 쓰러졌으면 ‘기회다!’ 싶어서 달려들거나 하다못해 함성이라도 질러야 마땅한데, 그냥 조용했다.
잠시 뒤,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새하얀 말 한 필이 악귀 같은 용병 사이를 가르고 다가왔다. 공명심에 불타는 용병들이 입을 꾹 다물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 보통 말이 아니었다. 혹은 보통 기수가 아니거나.
볼프 후작은 전투마 아래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끙끙거리는 수행기사와 쿼럴이 하필 목을 관통해 절명한 기사 종자를 차례로 보고 몸을 돌렸다.
기사의 명예와 가문의 명성을 앗아간 오랜 숙적. 미워하고 또 미워하나 결국 미워할 수 없는 정다운 친구. 늑대성의 주인 로벨 로드릭이었다.
“언젠가 말했지. 우린 다시 붙게 될 거라고.”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손잡이를 가슴에 한번 붙인 후 중단세를 취했다.
볼프 후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마주 기사의 예를 표시했다. 지난 그랜드 토너먼트에서 생략된 도보전이었다.
지친 것은 로벨이나 볼프 후작이나 마찬가지인데, 관중이 로벨 편인만큼 볼프 후작에게 불리했다.
“흠!”
선공은 볼프 후작이 취했다. 로벨도 작은 체구는 아니지만, 볼프 후작이 2인치쯤 더 컸다. 체중으로 압박하며 롱소드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로벨의 경험상 2인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기사보다, 어느 인간보다 크고 강한 괴물을 상대해봤으니까.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비스듬히 올려 수직베기를 흘려보내며 한 걸음 다가가 가드로 볼프 후작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공방일체 포비아 왕국 검술의 정수였다.
“크윽!”
볼프 후작은 머리를 흔들며 물러났다. 급소를 보강한 견고한 헬름이 아니었으면 지금 공격으로 기절했을 것이다.
로벨도 한 방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아 연속 공격에 들어갔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야말로 폭풍 같은 몰아치기를 시전했다. 볼프 후작은 모든 공격을 받아낼 수 없어 머리와 겨드랑이를 제외한 공격은 갑옷으로 버티었다. 깡! 깡! 챙! 까강-!
쇠와 쇠가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고요한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전열을 갖춘 저스티스 기사단도, 전공을 놓친 울프 용병단도, 포로가 된 볼프 후작의 기사들도 숨을 죽이고 두 명의 그랜드 챔피언을 지켜보았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이미 알고 있었다. 로벨 로드릭이 승리할 것이다.
까-앙!
결과는 모두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기적도, 이변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벨의 아론다이트가 볼프 후작의 헬름을 날려버리고 어깨를 찍어눌러 주저앉혔다. 볼프 후작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헬름이 벗겨질 때 얼굴이 찢어진 듯 턱선을 따라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꼭 눈물 같았다.
“본인이 졌소.”
작은 목소리지만 워낙 조용한 탓에 멀리까지 퍼졌다. 외팔이 더치가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외칠 자세를 취했다. 허풍쟁이가 말리지 않았으면 분명 분위기를 깼을 것이다.
로벨은 볼프 후작의 반대쪽 어깨로 칼을 옮겼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꼭 기사 서임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로벨은 무릎 꿇은 볼프 후작에게 말했다.
“귀족을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오. 오랜 친구라면 더욱 그러하지.”
“...친구?”
“전쟁의 책임은 반드시 물을 것이오. 그러나 경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회수하고 상체를 조금 숙였다. 그리고 볼프 후작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경에게 들어야 할 말이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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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 전쟁이 끝났다.
초봄에 시작해 약 60일 동안 진행된 전쟁은 마을 세 곳을 폐허로 만들고 3천 3백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 대부분이 힘없는 붉은 산 영지민이었다.
전쟁의 승리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이 가져갔지만, 승자와 패자 모두 얻은 것이 없었다.
에릭 공작은 전후처리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큰 공을 세운 저스티스 기사단을 성대하게 배웅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포로와 몸값을 협상하고, 몸값을 내지 못하는 포로를 장미성으로 이송하고, 하인즈 가문 사람을 달래고, 징발한 군수물자를 최대한 돌려주고, 향후 붉은 산과 관계를 논의했다.
글자를 알면 지옥불에 튀겨지고 있을 사탄에게라도 도움을 받고 싶었으니, 사탄보다 여러모로 나은 로벨을 그냥 두지 않았다.
하지만 로벨도 보통은 아니었다. 영주가 된 이래 가장 많이 한 것이 어린 집사의 닦달을 피해 도망다니는 일이었다.
로벨은 피로와 부상을 핑계로 울프 용병단 숙영지에 틀어박혔다. 로벨의 기사들도 크고 작은 상처가 있어 대부분 활동하지 못했다. 기사들이 가만있자 병사들도 괜히 나다니지 않았다. 종군상인에게 술과 고기를 사서 나눠 먹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헤아렸다.
“로벨 경이오?”
로벨은 방문을 지키는 용병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냈다. 추가수당 몇 푼에 혹해서 간수를 자처한 두 용병은 예의상 곤란한 표정을 지은 후 즉시 방문을 열었다. 아니, 감옥문이었다.
로벨은 오랜만에 꺼내 입은 예복-우플랑드의 소매와 밑단을 정리하고 외딴 감옥에 들어갔다.
사흘 사이 몰라보게 초췌해진 볼프 후작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지낼 만하시오?”
“검은 성보단 못하지만, 그럭저럭 지낼 만하오.”
로벨은 의자를 끌어와 머리맡에 앉았다. 네 다리의 균형이 맞지 않아 불편한 의자였다.
에릭 공작은 볼프 후작을 제후로 대접하여 지하감옥에 가두지는 않았지만, 손님으로 대우해서 편하게 보살피지도 않았다. 하인들이 집기를 보관하는 창고에 연금하고 사흘 동안 방치했다.
볼프 후작쯤 되는 대귀족에게는 매우 무례한 처사지만, 정작 볼프 후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
로벨도 동의했다.
“그 일을 묻고 싶었소.”
로벨은 잠시 숨을 골랐다. 머리 하나 내밀기도 힘든 작은 창으로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건초에서 일어난 작은 먼지가 싸라기눈처럼 휘날렸다. 빛이 있는 곳에서만 보이는 정말 작은 먼지였다.
“왜 그들을 도운 것이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니까.”
볼프 후작은 그 질문을 기다린 듯 즉답했다. 로벨은 ‘우리’의 범주가 사트로 가문이나 구왕파 패거리가 아님을 직감했다.
“우리 왕국이 말이오?”
“우리 인간이 말이오.”
로벨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생각보다 출제범위가 넓었다.
“자세히 말해주시오.”
볼프 후작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길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둠 속에 처박혀 숨죽이고 살아야 할 것들이 양지로 기어 나오고 있소. 인간의 고통과 공포를 양식 삼아 독버섯처럼 자라나오.”
“마도의 수호자 말이오?”
볼프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강하오.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 없소.”
로벨은 부정하지 않았다. 늑대의 왕이 남긴 공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 광오한 괴물이 수많은 수호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의하지도 않았다.
“우리도 약하지 않소. 모두가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소.”
“그들은 질병이오!”
볼프 후작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다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공포요. 그들은 혼란이오. 인간이 모이면 모일수록 그들은 더욱 강해질 것이오.”
로벨은 고깔모자 친구에게 수없이 들어온 단어를 읊조렸다.
“인지의 존재...”
옷장 속에서 태어난 상상의 존재들.
로벨은 볼프 후작의 의도를 간신히, 정말 간신히 이해했다.
“그 모든 공포와 슬픔이 상상 속의 괴물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에게 향하기를 바랬소. 내가 괴물이 되어야 진짜 괴물이 나타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