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38화 (238/605)

238화. 예언

238화. 예언

펠트 성 1마일 앞에서 벌어진 붉은 산 최후의 전투는 세 곳으로 집중되었다.

한 곳은 옛 신의 기사단과 볼프 후작의 기사들이 정면으로 충돌한 중앙이었다. 숫자는 기사단이 2배 많지만, 고지대에서 선수를 빼앗은 볼프 후작의 기사들은 쉽게 밀리지 않았다.

한 곳은 어린 집사의 골칫거리가 된 울프 용병단 중장보병과 볼프 후작이 고용한 네일 공국 용병단이 부딪친 언덕 우측이었다. 아무리 충성스러워도 용병은 용병이라 기사만큼 열정적으로 싸우진 않았다. 한발 나갔다가 한발 물러나며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마지막 한 곳은 로벨이 이끄는 늑대성의 기사들과 볼프 후작이 최후의 최후까지 숨겨둔 오우거가 격돌한 언덕 좌측이었다. 규모는 가장 작지만 싸움은 가장 볼만했다.

“하아앗!”

로벨은 인마일체가 무엇인지 절실히 보여주었다. 모닝스타 등에 납작 엎드려 오우거들이 휘두르는 통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빠져나갔다. 숫양이 바위 사이를 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로벨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해 뒤처진 호른 경 이하 로드릭 가문 기사들은 주군의 신들린 승마술에 할 말을 잃었다.

“저건 뭔 말인데, 말이 되나?”

로벨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오우거를 제친 후 해비 랜스를 갑옷 고리에 얹었다. 로벨의 목표는 가장 덩치가 좋은 세 번째 오우거의 심장이었다. 어린 시절 읽은 기사 소설의 주인공처럼 한 마디 외쳤다.

“내 창을 받아라!”

그리고 진짜 주인공처럼 멋지게 랜스 차치를 성공했다. 창끝이 정확히 오우거 심장에 꽂혔다.

“으윽-”

로벨의 상체가 오른쪽으로 뒤틀렸다. 충격을 최대한 흘려보냈는데도 창머리가 부러지고 손잡이가 꺾였다.

손에 땀이 나는 무모한 돌격이지만, 그만한 성과가 있었다.

로벨이 지나친 첫 번째, 두 번째 오우거가 로벨을 쫒기 위해 몸을 돌리자, 직감적으로 기회를 포착한 호른 경 이하 로드릭 가문 기사들은 오우거 등짝에 온갖 재질의 창을 꽂아주었다. 그랜드 토너먼트에서도 볼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마상창 기술이었다.

그러나 오우거는 오우거였다. 자타공인 지상최강 몬스터답게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등 위로 포효하며 통나무를 180도 휘둘렀다. 거기에 브릭 경과 매튜 경이 맞아 안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끄어어어-어억-!”

비명이 늘어지는 것을 보아 죽진 않은 모양이다. 풀 플레이트 아머가 튼튼하긴 튼튼했다.

호른 경, 마튼 경, 램지 경 등은 즉시 롱소드를 뽑아 오우거의 옆구리와 허벅지를 찔렀다. 오우거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휘저었다. 호른 경은 잽싸게 상체를 숙여 피했지만, 나이 탓에 몸이 안 따라주는 마튼 경이 팔꿈치에 치여 낙마했다. 그리고 출혈을 못 이긴 작은 오우거가 결국 꼬꾸라졌다.

“저, 저럴 수가...!”

“저게 진짜 기사들이구나...”

울프 용병단은 거대 괴물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나지 않는 기사들을 존경스럽게 보았다. 검술, 창술, 승마술을 잠시 치워두더라도 용기가 굉장했다.

“좋았어! 이제 한 마리 남았어!”

“기사 나으리도 둘 뿐이잖아.”

가장 작은 오우거 하나 쓰러트리는데 기사 셋이 날아갔다. 더욱이 랜스와 롱소드도 사용해서 짤막한 플레일과 워 해머 따위가 전부였다.

펄프 대장이 넋 나간 용병들을 걷어차며 주의를 돌렸다.

“저스티스 기사단이 밀리고 있다! 집중해라! 스피어맨 앞으로!”

“하, 하지만, 대장! 저 괴물이...!”

펄프 대장은 아군 기사들을 힐끔 보고 말했다.

“뭐가 걱정이야? 우리 기사 나리가 있는데.”

@

로벨은 자신이 맡은 오우거 한 마리를 기어이 끝장내고 거칠게 바이저를 올렸다. 시야가 넓은 것은 난전 중에 참 좋은데, 지금처럼 집중해야 할 때는 방해가 되었다. 보통 헬름과 반대라 재미있었다.

‘남은 것은... 저 한 마리구나?’

로벨은 씩씩거리는 모닝스타의 갈기를 살며시 쥐고 속삭였다.

‘한 번 더 가자. 할 수 있지?’

“푸르릉-!”

로벨은 빙그레 웃고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때렸다.

“이랴앗!”

신수의 피가 흐르는 모닝스타는 새까만 갈기를 휘날리며 질주했다. 네 다리가 땅을 한번 스칠 때마다 점점 빨라졌다.

로벨은 위험한 승마술에서도 가장 위험한 동작, 초보에게든 달인에게든 결코 권장하지 않을 자세, 즉, 안장 위에 두 발을 올리고 쪼그려 앉았다. 가느다란 고삐 하나로 전력질주하는 말 위에서 균형을 잡고, 호른 경을 붙잡기 위해 길길이 날뛰는 오우거를 향해 포효했다.

“나를 봐라! 괴물아!”

오우거가 뒤도는 것과 로벨이 모닝스타 안장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이야앗-!”

로벨은 모닝스타의 높이와 속도의 도움을 받아 6.5피트를 뛰어올랐다. 거대한 오우거의 정수리가 시선 아래로 보이는 높이였다. 그 상태에서 흐룬팅을 뽑아 역수로 쥐었다.

‘가만, 익숙한데?’

언제가 이와 비슷한 묘기를 부린 적이 있었다. 시커먼 칼날 오우거 눈알에 꽂히기 직전 기억이 났다. 소머리 괴물로 변한 조지 도트넘 백작을 해치울 때였다.

‘그때도 네 녀석이었겠지? 뱀파이어 군주?’

콰드득-!

흐룬팅의 칼날이 오우거의 눈구멍을 꿰뚫고 머리뼈를 갉으며 뒤통수로 빠져나왔다. 오우거는 온몸이 난도질당한 고통을 잊고 편안히 어둠에 잠겼다. 그곳이야말로 인지의 존재가 본래 있어야 할 곳이었다.

로벨은 쓰러지는 오우거의 어깨와 가슴을 밟고 그대로 땅에 내려섰다. 그 말도 안 되는 업적이 잠깐이지만 전장에 정적을 가져왔다. 말에서 떨어져 엉금엉금 기어가는 기사도, 그 기사의 머리통을 노리는 기사단원도, 떨리는 손으로 화살을 고르는 사냥꾼도, 칼을 맞대고 욕설을 퍼붓는 용병도 기이한 침묵에 놀라 로벨과 로벨이 쓰러트린 오우거를 쳐다보았다.

침묵은 짧았지만, 영향은 아주 길었다. 경험이 풍부한 노병과 감이 좋은 용병은 전쟁의 추가 마침내 한쪽으로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주군! 주군!”

호른 경이 모닝스타의 고삐를 잡고 다가왔다. 모닝스타는 낯선 사내의 손길에 콧김을 뿜었지만 어차피 주인 곁으로 갈 생각이었기에 순순히 따랐다.

로벨은 절구통만한 오우거의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흐룬팅을 뽑았다. 그리고 3년쯤 늙은 얼굴로 호른 경과 모닝스타를 보았다.

“주군, 너무 무모했습니다. 그렇게 몸을 던지지 않아도 처치할 수 있는 것을...”

“호른 경.”

“예? 예. 말씀하십시오.”

로벨은 흐룬팅을 허공에 휘둘러 오우거의 피를 뿌렸다. 대단한 동작이 아닌데 이상하게 각막 깊숙이 각인되었다. 눈부신 오후 햇살 때문인지, 발아래 깔린 오우거 시체 때문인지 모르지만 여러 사람이 숨을 들이마셨다.

로벨은 깨끗해진 흐룬팅을 칼집에 밀어 넣고 모닝스타의 등자를 밟았다.

가장 멀쩡한 램지 경이 경악과 경탄이 뒤섞인 얼굴로 다가왔다. 그럭저럭 몸을 가눌만한 브릭 경과 매튜 경도 전투마를 챙겨 털레털레 쫓아왔다.

팔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나간 부상자들이지만, 갑옷에 흐르는 오우거 피가 사지 멀쩡한 기사들보다 용맹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펄프 대장은 낯선 외침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나이를 집어치우고 열띤 소년처럼 따라 소리쳤다.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 챔피언! 로벨 로드릭!”

“늑대성의 기사! 로벨 로드릭!”

한 명이 시작한 함성이 1백 명, 3백 명, 5백 명으로 퍼져갔다. 펠트 성 앞마당이 로벨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볼프 후작군은 활화산 같은 기세에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로벨은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한 볼프 후작과 그의 측근 기사들을 보았다.

‘이제 끝이야? 더 없어?’

거리가 멀어서 얼굴이 안 보이지만, 볼프 후작 특유의 곤란해 하는 표정이 그려졌다.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으면, 그만 끝내자.’

로벨은 새하얀 아론다이트를 뽑아 언덕을 가리켰다. 그리고 분투하는 저스티스 기사단을 위해 평소와 조금 다른 구호를 외쳤다.

“옛 신이 우리를 가호하신다! 전군! 돌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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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기(士氣)였다.

싸우고자 하는 의지,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 전체가 하나 되는 마음이 곧 사기였고, 사기가 충족된 병사는 피로와 공포를 이겨내어 용감하게 싸웠다.

사기를 높이는 방법은 까다롭고 힘들었다. 충분한 배식과 적절한 포상과 합당한 훈련, 그리고 지휘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심어줘야 한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의 활약을 본 울프 용병단은 마침내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로벨은 칼 한 자루로 백 마디 연설과 백 가지 약속을 대신했고, 울프 용병단은 거기에 응하여 용감하게 언덕으로 뛰어올랐다.

저스티스 기사단과 교착상태에 빠진 볼프 후작의 기사들은 200명의 추가 병력에 기겁해서 말머리를 돌렸다. 애석하게 애마를 잃은 기사는 두 다리로, 혹은 두 팔로 기어서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애썼다. 고귀한 기사가 미천한 용병 앞에서 보이는 추태로는 최상위였다.

울프 용병단은 중병기로 도망가는 기사의 뒤통수를 마구 내려쳤다. 그러나 발을 멈춘 용병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좀 더 큰 사냥감을 노렸다. 볼프 후작군의 최고 지휘관, 바로 볼프 사트로 후작이었다.

울프 용병단이 파도가 되어 기사들을 삼키고, 언덕까지 오르자 볼프 후작의 수행기사가 당황하여 명령 없이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적을 막아라! 후작님을 보호하라!”

그러나 용병도 사람이었다. 거대 괴물을 단칼에 해치운 왕국 최고의 검과 그 기세를 등에 업은 용병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병사일 수 없었다.

명예, 영광, 대의 따위를 위해 싸우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 죽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아, 안 돼... 여기서 죽을 수 없어...”

“이런 시브랄! 저런 것을 어떻게 막아!”

“천벌이야. 옛 신의 기사를 공격한 천벌이야.”

겁 없기로 유명한 네일 공국 출신 용병이 겁을 집어먹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나더니 결국 창과 도끼를 팽개치고 반대방향으로 도주했다. 볼프 후작의 수행기사가 칼을 빼 들고 호통쳤다.

“이놈들! 어디 가느냐! 싸워라! 와서 싸우란 말이다!”

“그만하게.”

볼프 후작이 충성스러운 수행기사를 말렸다. 기사의 칼이 아무리 크고 날카로워도 전의를 잃은 병사를 돌려세울 수는 없었다. 볼프 후작은 발아래까지 올라온 울프 용병단 창병들을 보며 물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 이리될 것을 알고 있었소?”

“어둠은 꿰뚫어 보아도 시간을 넘겨보진 못하오. 오우거 세 마리를 저리 처리할 줄 누가 알았겠소.”

뱀파이어 군주 목소리에 곤란함이 녹아있었다. 볼프 후작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너희조차도 미래는 알 수 없단 말이군?”

“지극히 당연한 말이오.”

볼프 후작은 바들바들 떠는 어린 종자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랜스.”

어린 종자는 화들짝 놀라 해비 랜스를 내밀었다. 볼프 후작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후작이 원한 것은 창병의 창보다 먼저 찌를 수 있는 기다란 라이트 랜스였다. 그러나 혼내지 않고 그냥 해비 랜스를 받았다.

‘그 친구가 살아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볼프 후작은 옛 신의 품에 안긴 옛 기사 종자를 떠올렸다. 머리가 비상하고 입이 무거운 좋은 친구였다. 맥켈런 가문의 장자만 아니었으면 그리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업보인가?’

볼프 후작은 해비 랜스를 갑옷에 걸고 말했다.

“너희가 모르는 미래를 내가 예언하지.”

주인의 흥분이 전해진 듯 전투마가 콧김을 거세게 뿜었다. 심장이 날뛰고 피가 달아오르는 것과 별개로 기분은 상쾌했다.

“나를 쓰러트린 자가 너희를 막을 자이다. 자, 똑똑히 잘 보아라.”

볼프 후작은 예언을 남기고 전투마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주군!”

“후작님!”

볼프 후작의 수행기사들이 따라 달렸다. 그러나 볼프 후작의 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볼프 후작은 창끝을 고정하고 추억 속 마지막 그랜드 토너먼트를 재현했다.

“로벨 로드리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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