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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35화 (235/605)

235화. 전문가

235화. 전문가

구울은 지치지도 않고 쉬이 죽지도 않으나, 지성이 없고 몸이 둔하여 침착하게 상대하면 그리 무서운 몬스터는 아니었다. 파이크맨을 앞세워 2천여 명의 병사 교대로 밀어붙이자 추가 피해 없이 만 하루 만에 정리되었다. 오히려 문제는 2,500구나 되는 시체를 매장하고 불태우는 일이었다. 기사도, 병사도 진저리치면서 붉은 산의 죄 없는 영지민을 장사지냈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은 에릭 공작의 작전회의에 참석했다. 지난밤의 전투를 보고하고, 볼프 후작군의 숫자와 장비, 참전한 가문 등을 공유했다.

“하인즈 성의 방비는 어떻소?”

로벨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유능한 부하와 충분한 물자를 남겨 두었으니 아직 버티고 있을 겁니다.”

로벨을 보좌하는 펄프 대장이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겁쟁이 데비와 발냄새 베커가 정말 유능한지 속으로 따져보았다.

에릭 공작은 겁쟁이와 발냄새는 모르지만 로벨 로드릭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하인즈 성을 거점으로 볼프 후작과 싸우는 것이 좋겠군. 경들 생각은 어떻소?”

외지에서 온 기사가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인즈 가문의 식솔들만 죽어날 뿐이다. 로벨 일행까지 83명의 기사와 2,500여 명의 장병을 먹여 살리려면 가진 재산과 식량을 다 털어내야 할 것이다.

에릭 공작은 강철을 두른 기사들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붉은 산에 오르면 방심하지 마시오. 볼프 사트로 후작은 사악한 이교도와 손을 잡았소. 그 꿍꿍이를 알 수 없으니 경들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오.”

에릭 공작은 로벨을 힐끔 쳐다보았다. ‘무적무패의 챔피언도 당했잖아? 방심하지 마!’ 의미가 있었다. 로벨은 가슴 아픈 배려에 그만 의기소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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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은 하인즈 성을 중심으로 주둔지를 건설하고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하인즈 성-붉은 성과 붉은 산 요새의 치열하지만 답답한 쟁탈전이었다.

병력만 보면 에릭 공작군이 2배 많지만, 계곡과 능선을 사이에 두고 있어 숫자의 이점을 활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성과 요새 모두 견고하기가 이를 데 없어 어지간한 공성무기로는 함락이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당장이라도 볼탄 반도의 주인을 가릴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것에 비해 전황은 수일째 답보상태였다. 무의미한 도발과 불필요한 싸움으로 사상자만 늘어갔다.

“오늘은 몇 명이지?”

“여섯하고 아홉입니다. 셋은 가망 없습니다.”

...어제보단 낫군.

도이첼 가문의 용병이 계곡에 물을 길으러갔다가 볼프 후작군과 조우해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현장 지휘관이 보고하길 아군의 승리라는데, 에릭 공작은 승패보다 피해에 관심을 가졌다. 아무 의미 없는 접전으로 여섯 명이 전사하고 아홉 명이 부상을 입었다.

에릭 공작은 도이첼 남작에게 형식적인 치하의 말을 전한 후 한숨을 쉬었다. 며칠째 반복된 일이라 감흥이 없었다.

“식량을 징발하러 갔다가 싸우고, 장작을 구하러 갔다가 싸우고, 정찰을 나갔다가 싸우고...”

“여름이 와도 승부가 나지 않겠습니다.”

그 전에 영주들이 도망가겠지. 출정한지 벌써 20일이 지나지 않았나.

고향에 식솔과 재산이 있는 영주들은 의무종군일을 채우는 즉시 전선에서 이탈할 것이다.

에릭 공작은 지금의 상황이 답답한 듯 집무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로벨이 사흘 만에 성과 요새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금방 끝날 줄 알았다. 로벨의 잘못은 아니었다. 정도에서 벗어나도 지나치게 벗어난 볼프 사트로 후작과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 탓이지.

“아, 그렇지. 로벨 경은 지금 뭐 하고 있나?”

이렇고 저렇고 말이 많아도, 프란시스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 중 가장 충직하고 가장 유능한 기사였다. 휘하 병사 중 절반이 당했다고 하나, 여전히 400명이나 되는 대군을 이끄는 가장 막강한 세력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뭐?”

에릭 공작의 충성스러운 수행기사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정확히 보고했다.

“이곳 하인즈 성에 온 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에릭 공작은 잠깐 침묵한 후에 다시 물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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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공작은 잡무를 내버려두고 하인즈 성내에 주둔 중인 울프 용병단을 찾아갔다.

로벨의 명성만큼이나 유명세를 더해가는 볼탄 반도 최강의 용병단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저 그런 용병무리하고 별 차이가 없었다. 숫자가 조금 많고, 무장이 조금 좋을 뿐...

‘그럼 정예가 맞네.’

에릭 공작은 울프 용병단 숙영지 앞에서 크게 헛기침했다. 그러나 못 배워먹은 용병들은 늙은 소가 지붕 위에 닭 보듯이 공작과 공작의 기사를 보았다. 에릭 공작은 좀 더 크게 기침할까 고민하다가 추해질 것 같아 그냥 눈에 띄는 용병을 불렀다.

“거기 병사, 로벨 로드릭 백작은 어디 있지?”

험악한 용병 중에서도 유난히 험악한 용병,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우리 기사 나리요? 저 안쪽에 계십니다요.”

에릭 공작의 수행기사가 칼자루를 잡고 으르렁거렸다.

“프란시스 가문의 에릭 프란시스 공작님이시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대답해라.”

외팔이 더치는 손도끼를 혁대 고리에 밀어 넣고 마지못해 일어났다.

“로벨 로드릭 ‘후작님’은 안쪽에 계십니다요. 됐습니까요?”

외팔이 성격상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에릭 공작이 하사한 늑대성의 백작위가 아니라 국왕 폐하가 하사한 포클랜드의 후작으로 대답했다. 에릭 공작과 수행기사 귀에는 ‘우리가 느그들 쫄다구도 아닌데 더럽게 귀찮게 구네’ 정도로 들렸다. 성질 사납기가 울프 용병단 못지않은 프란시스 가문 수행기사가 칼자루를 쥐었다.

“주인의 위세를 믿고 시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구나.”

기사 공포증이 있는 외팔이는 순간 움찔했지만, 주위의 이목이 있어 과장되게 턱을 치켜들었다. 외팔이의 소대원과 친구들이 분위기를 감지하고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가 살벌해지는 한편 난감해졌다. 에릭 공작은 로벨의 부하이자 아군의 최정예 용병부대를 벌할 수 없고, 외팔이와 용병들은 고귀한 기사 나리를 뭇매 놓을 수 없었다.

“됐네. 됐어. 로벨 경의 부하잖은가. 그의 체면을 생각해줘야지.”

에릭 공작은 역시 노련했다. 로벨의 얼굴을 봐서 용서한다는 뉘앙스로 마무리했다. 외팔이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서 아무 말 안 하고 자리에 앉았다.

에릭 공작은 울프 용병단 숙영지를 가로지르며 유심히 살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용병들인데, 무엇이 그리 특별해서 싸우는 족족 승리하는지 의문이었다.

‘역시 지휘관이 남다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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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건초창고를 뜯어내어 임시로 만든 숙소에서 지내고 있었다. 맨땅에서 먹고 자는 일반 병사보단 낫지만,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 늑대성의 주인이 지내기에는 아무래도 후줄근했다. 더불어 손님을 맞이하기도 좋지 않았다.

“주군?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에릭 공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천장과 삐거덕거리는 마루를 한 번씩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성 안에 남는 방이 없었소?”

로벨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제 부하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그렇소? 하긴, 경의 용병들은 다루기가 쉽지 않더군.”

로벨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가 세고 자존심이 강하지만 잘 타이르면 잘 따르는 편이었다. 다만, 타이르는 방법이 기사다워야 했다. 외팔이 더치부터 싸움개 닥스까지 로벨한테 쥐어터진 많은 용병이 증언해줄 것이다.

에릭 공작은 로벨의 회의실 겸 집무실 겸 침소를 구경하는 척하고, 페르젠 백작과 에디즈 자작의 불화를 하소연 좀 하고, 기사들의 불만과 병사들의 고충을 의논하는 시늉까지 한 후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내게는 백 명의 충직한 기사가 있지만, 그중 가장 강하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사는 바로 로벨 경이오.”

“과찬의 말씀입니다.”

에릭 공작은 자연스러운 도입이라고 뿌듯해 하며 말을 이어갔다.

“경의 능력이면 작금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이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이 없겠소?”

로벨은 복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것이 로벨의 이번 전술이었다. 그러나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자 최고 사령관이 직접 물어오자 속일 수 없었다.

“볼프 후작의 가장 큰 전력은 악마추종자입니다.”

“잉그비아 왕국의 이교도 말이오?”

“구울을 만들어낸 것도, 고블린과 트롤을 부리는 것도 그들의 사악한 마법입니다.”

에릭 공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언가 생각해둔 것이 있는 모양이오? 그렇지. 이교도만 쫓아내도 쉽게 승리할 수 있지. 어서 말해보시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이 뚝딱뚝딱 두드려서 만들어낸 간이 책상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편지를 가리켰다.

“악마추종... 이교도를 쫓아낼 방법은 모릅니다. 하지만 이교도를 쫓아낼 전문가는 알고 있습니다.”

에릭 공작과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편지로 시선을 옮겼다. 전시에 무슨 편지를 이리 많이 주고받았는지 의아했다.

“누구한테 온 편지요?”

로벨은 에릭 공작이 그리 좋아하지 않을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붉은 장미 수도원입니다.”

역시나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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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에릭 공작이 불쾌해 하자 뜸 들이지 않고 설명했다.

“붉은 장미 수도원을 통해 옛 신의 교단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 아아!”

에릭 공작보다 에릭 공작의 수행기사들이 먼저 감탄했다.

옛 신의 교단이 과거의 위세를 잃은 지 100년 가까이 지나 모두들 잊고 있지만, 본래 악마, 마녀, 이교도 등을 잡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었다.

“그들이 과연 도와주겠소?”

“붉은 장미 수도원은 주군에게 빚이 있습니다.”

에릭 공작에게 누명을 씌워 볼탄 반도 남부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과가 있다. 그 배후에도 악마추종자가 있었으니, 수도원으로서는 에릭 공작에게 용서를 비는 동시에 묵은 원한을 갚을 기회였다.

“저 역시 옛 신의 기사들과 친분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교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붉은 장미 수도원이 볼탄 반도에서 가장 큰 수도원이라 하나, 그들만으로 교단을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로벨은 가진 인맥과 자금을 총동원해서 손을 쓰고 있었다. 에릭 공작은 로벨이 갖은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부드럽게 물었다.

“언제 연락을 보냈소?”

“열흘 전입니다.”

에릭 공작이 구울 사냥에 한창 열을 올릴 때, 로벨은 여기까지 내다보다 미리 손을 쓴 것이다. 에릭 공작의 표정이 정오 햇살처럼 환해졌다.

“과연! 로벨 경이오! 지금쯤이면 주교에게 소식이 전해졌겠군!”

“이미 답장도 받았습니다.”

로벨은 옛 신의 상징물이 찍힌 편지를 꺼내 보였다.

“델 포니 지방과 포클랜드 지방의 저스티스 기사단 100명을 붉은 산으로 파견했다는 내용입니다.”

에릭 공작은 거리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옛 신의 교단이 자랑하는 연락망이면 빠르면 사흘, 늦어도 닷새 안에 중무장한 기사 100명이 도착할 것이다.

고향 노래 부르며 몸 사리는 왕의 기사들과 다른, 옛 신의 이름 아래 목숨 바쳐 싸우는 무지막지한 실전형 기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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