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오해
234화. 오해
로벨은 정신을 놓은 호른 경을 억지로 일으키다가 잘 안 되어서 외팔이와 허풍쟁이를 불렀다.
“시간이 없어!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구릉성의 마튼 경이 호른 경의 전투마를 끌고 와 대령했다.
“주군, 포위를 뚫어도 갈 곳이 없습니다.”
볼프 후작군이 재정비를 마치고 활을 쏘기 시작했다. 아직은 산발적이지만, 시간을 지체하면 새벽의 전투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로벨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붉은 산을 우회해서, 에릭 공작에게 갈 것이오.”
“거기까지 거리가...”
로벨은 볼프 후작군을 돌파해서 하인즈 성으로 돌아가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로벨 로드릭 군은 밤새 행군해서 아침 내내 싸웠다. 계속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무기와 갑옷을 제외하고 모두 버리시오. 몸을 가볍게 하면 오후 중에 도착할 수 있소.”
모험에 모험을 거듭하는 결정이었다. 에릭 공작군이 패전했거나 철수했으면 로벨까지 속절없이 당할 것이다.
늪지성의 매튜 경과 램지 경이 우려를 표시했다. 기사된 입장에서는 차라리 항복하는 게 안전했다. 싸울 만큼 싸우고 힘이 모자라 항복하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었다. 하지만 로벨은 그럴 수 없었다. 옛 왕과 악마추종자가 눈엣가시 같은 로벨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우리가 항복하면 하인즈 성을 내줘야 하오. 그리하면 붉은 산 전체가 볼프 후작 손에 들어가오.”
로벨의 핑계에 모두 납득했다. 전투의 패배를 전쟁의 패배로 확대시킬 수 없었다.
“보, 볼프 사트로 후작군이 움직입니다!”
로벨 주위로도 화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호른 경을 태운 전투마가 깜짝 놀라 투레질했다. 외팔이 더치가 바클러를 모자처럼 쓰고 악을 썼다.
“기사 나리! 어디로 갑니까요!”
로벨은 핏물에 미끄러지는 아론다이트를 고쳐 쥐고 명령했다.
“서쪽으로. 붉은 산을 우회해서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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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새벽녘에 찾아온 용병이 시체가 어쩌고 괴물이 어쩌고 소란을 피우더니, 정말 수천 마리의 구울이 밀어닥쳤다.
“볼프 사트로! 이자가 진정 미친 것인가!”
에릭 공작은 잇몸건강이 우려될 만큼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로벨의 직속 랜스라는 기마 용병이 미리 경고했지만, 그럼에도 2,500마리의 구울을 막기에는 시간도, 장비도 부족했다.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영주들 탓도 있었다. 볼프 후작이 붉은 산의 영지민을 학살하고 괴물로 만들었다는 정보는 곧이곧대로 믿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 결과 초반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구울에게 죽은 병사가 구울로 되살아나는 통에 구울의 숫자가 쉽게 줄지 않았다. 동이 트고, 약간의 요령이 생기자 간신히 추가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이중, 삼중으로 설치한 바리게이트와 붉은 산 계곡에서 흘러내려온 거센 강줄기를 사이에 두고 인간과 구울의 대치가 이뤄졌다.
태양이 정상에 오르고, 살아있는 자들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될 찰나, 붉은 산 저편에서 반가운 깃발이 나타났다. 한나절 동안 지속된 전투에 지칠 때로 지친 에릭 공작군이 함성이 질렀다.
“늑대성의 깃발이다!”
“늑대성의 용병단이다!”
“지원군이 왔어!”
지친 탓인지, 흥분 탓인지 지원군이 이상하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덩굴성의 영주 에디즈 자작도 해맑게 웃었다.
“로벨 로드릭 백작! 우리를 구해주러 온 것이오?”
로벨은 구울의 바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에디즈 자작의 환대에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아니오! 도망치는 중이오!”
“잉? 뭐라고 했소?”
에릭 공작의 기사들도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기사가 말도 없이 뛰어다니는 데다 병사 대다수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가만 보니 깃발도 여기저기 찢어지고 얼룩져서 엉망이었다.
“저 꼬라지가 꼭... 패잔병 같은데?”
“설마? 로벨 경이 어떤 자인데 패배한단 말이오.”
패배까진 아니어도 작전상 후퇴 정도는 할 수 있는 법이다. 로벨은 구울의 바다를 피해 다시 우회 기동했다. 4.5마일의 산길을 2시간 만에 주파한 울프 용병단과 농민병들은 욕할 기운도 없이 관성적으로 따라갔다.
에디즈 자작은 전선에 오자마자 이탈하는 로벨과 로벨의 군대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왜 저러지?”
그 의문은 잠시 뒤 저절로 풀렸다. 로벨 로드릭 군을 쫓아 1천 명이나 되는 볼프 후작군이 등장했다. 기쁨이 눈 깜짝할 사이 원망으로 바뀌었다.
“아니잇! 로벨 경! 왜 자꾸 혹을 붙이는 거요! 우리한테 무슨 원한이 있소!”
“아, 몰라. 몰라.”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한편, 볼프 후작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에릭 공작군과 구울 무리를 발견하고 추격을 멈췄다. 구울은 이성이 없는 괴물이라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이 이상 접근하는 것은 위험했다.
“기껏 만든 구울이 이곳에 묶여 있었군.”
볼프 후작은 산 아래를 유심히 살핀 후 구울의 주인에게 물었다.
“도트넘 백작, 저 망자들을 잠시 치울 수 있겠소?”
도반 도트넘 백작은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거슬리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답했다.
“불가능하오.”
“어째서? 경이 만든 것이잖소?”
“자식 또한 부모가 만드나 부모의 뜻대로 되진 않지. 후작이 가장 잘 알지 않소?”
볼프 후작 콧등에 주름이 잡혔다. 사트로 가문의 비사를 알고 조롱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화내거나 부정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다 잡은 사냥감을 놓치고 말았군.”
볼프 후작은 점점 멀어지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근 100일 동안 준비한 늑대 사냥이 허사가 되었다.
“이곳은 구울에게 맡기고 하인즈 성을 점령하겠소.”
“하인즈 성에는 로벨 경이 놓고 간 정예 용병과 12문의 대포가 있소. 쉽지 않을 것이오.”
볼프 후작은 머리를 굴렸다. 정예라 해봐야 50명이 안 될 것이다. 1,000명의 군사로 밀어붙이면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 그러나 대포가 마음에 걸렸다.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전열을 정비한 에릭 공작과 로벨 후작을 상대하려면 지금 병력을 잘 간수해야 했다.
“대포가 12문이라고? 도대체 군비를 얼마나 쓰는 거지?”
볼프 후작은 머리를 저었다. 영지재산을 몽땅 용병단에 때려 박는 것이 아닐까 의심되었다. 물론,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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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구울 무리를 우회하고 우회하다 너무 멀어진 듯 싶어 십여 마리가 서성거리는 허술한 곳으로 돌파를 시도했다.
로벨은 큰 걸음으로 거리를 좁혀 가장 가까운 구울의 목을 쳤다. 그리고 반동으로 휘청거렸다. 평소라면 폭풍 같은 기세로 공격을 몰아갔을 텐데, 팔다리가 족쇄에 묶인 것처럼 무거워 그럴 수 없었다.
“하아... 하아...”
어디서 창에 찔린 듯 입이 가로로 찢어진 구울이 달려들었다. 로벨은 왼손으로 구울의 입을 막았다. 컨틀렛과 이빨이 맞물려 드드득-득- 소리를 내었다.
“저리 비켜!”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로 구울의 머리를 찍었다. 유사시 둔기로 쓰라고 큼직하게 만든 폼멜이라 위력이 메이스 못지않았다. 두 번, 세 번 후려치자 구울의 머리가 깨지고 걸쭉한 피와 뇌 조각이 흘러내렸다.
로벨 뿐만 아니라 마튼 경과 매튜 경을 포함해 모두가 고생 중이었다. 고작 열 몇 마리밖에 안 되는 구울에게 로벨 로드릭 군 전체가 발이 묶였다. 그때, 친숙하지만 친근하지는 않은 목소리가 로벨 일행을 반겼다.
“로벨 로드릭 백작! 그 꼴이 뭐요? 으하하핫!”
“...페르젠 백작?”
이곳이 하필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진형이었다. 로벨에게 자격지심이 있는 젊은 페르젠 백작은 기고만장해서 비웃음을 던졌다.
“볼프 사트로 후작을 피해 도망쳤다고? 그러고도 프란시스 가문의 제일 가는 기사요? 그러고도 무적무패의 챔피언이오? 부끄러운 줄 아시오!”
“...부끄럽소.”
“뭐라고?”
로벨은 고개를 숙이고 대꾸했다.
“경에게도 부끄럽고, 주군에게도 면목이 없소. 무엇보다 전사한 병사들을 볼 낯이 없소.”
로벨이 우울한 표정을 짓자 도리어 조롱하던 페르젠 백작이 당황했다.
“왜, 왜 그러시오? 오만한 로벨 로드릭 경답지 않게? 고개 드시오! 당당하게 구시오! 본인의 호적수라면 이깟 일로 좌절하지 마시오!”
“아, 그래도 되오?”
로벨은 즉시 고개를 들고 휘하 기사와 울프 용병단에게 소리쳤다.
“하버트 페르젠 백작이 우리를 보호할 거야! 힘내!”
순수함이 지나치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다. 로벨은 순진무구하게 ‘경이 그러라면 그래야지’ 생각했지만, 페르젠 백작은 된통 당한 기분이 되었다. 그 분풀이는 엄한 구울에게 쏟아 부었다.
“에잇! 꺼져라! 죽지도 못하는 멍청한 괴물들아!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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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의 피해가 상당했다. 전사자 58명. 부상자 9명. 거동이 불편할 정도의 상처를 입은 병사는 따라오지 못해 상대적으로 부상자 숫자가 적었다. 로벨은 피해를 보고받고 침울해졌다. 붉은 산 요새에서 전멸한 켈트 경의 군대까지 생각하면 절반이 괴멸했다. 열흘 전 늑대성을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큰 피해를 볼 줄 몰랐다.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은 포로로 잡혔습니다.”
“어쩌다가?”
“붉은 산 요새를 탈출하여 하인즈 성으로 향하다가 매복에 걸렸습니다. 볼프 후작이 함정이었지요.”
“그렇군...”
켈트 경의 기사 종자는 로벨을 북쪽 산기슭으로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보내준 것이었다. 로벨은 볼프 후작의 치밀한 계략에 새삼 몸서리쳤다.
‘몇 번 이겼다고 너무 만만하게 보았어.’
샘 포클의 12기사 후예이자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제후이며 전(前) 그랜드 챔피언이었다. 로벨에게 패해서 그랜드 챔피언 자리를 반납했지만.
“켈트 경과 바이란 경은 구해낼 거요. 바위성과 가시성의 자금이 부족하면 본인이 몸값을 마련해줄 테니 심려치 마시오.”
“...감사합니다.”
“그것보다 경은 어떻소? 이제 불편한 곳은 없소?”
호른 경은 침상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끝끝내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상반신은 머미(Mummy)처럼 붕대에 싸이고 하반신은 담요에 파묻혀서 상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에릭 공작이 보내준 의사 말로는 피로가 쌓였을 뿐 부상은 별거 아니라 했다. 로벨은 크게 기뻐했지만, 이상하게 당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통 들지 못했다. 로벨은 요새를 잃고 도망친 것이 수치스러워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주군, 오전에 있었던, 그러니까, 제가 한 말을, 혹시나 오해하실까봐, 아니, 아닙니다.”
로벨은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사를 자상하게 달래주었다.
“이해하오.”
“이, 이해한단 말입니까?”
“나 역시 고통스럽소.”
“그러니까 무엇을...”
로벨은 담요를 정리해주고 당혹스러워하는 호른 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 걱정하지 마시오. 경은 그저 푹 쉬면되오. 죽은 병사와 붉은 산 영지민의 복수는 내가 할 것이오.”
호른 경은 입을 벌리고 아무 말 못했다. 눈치라곤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주군을 둬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럼 잠시 다녀오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