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33화 (233/605)

233화. 고백

233화. 고백

로벨은 풀러를 따라 흘러내리는 핏물을 거칠게 털어냈다.

명검은 명검이라 칼날은 상하지 않았는데, 피와 기름이 엉겨 붙어 점차 무뎌졌다. 혹은 로벨의 힘이 빠진 걸지도 모른다. 로벨은 폐에 남은 공기를 쥐어짜듯 악을 썼다.

“밀어!”

로벨보다 지치면 지쳤지 멀쩡하진 않은 용병이었다. 악착같이 찔러오는 창날과 빈틈만 생기면 파고드는 도끼날에 자상을 입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다.

갑옷이 부실한 최전방 스피어맨과 스피어맨의 공백을 메꾸는 맨앳암즈에서 전사자가 여럿 발생했다.

“밀어!”

로벨의 명령이 구령이 되어 모두가 한 발짝씩 내디뎠다. 창이 엇갈리고, 방패가 비명을 질렀다.

로벨은 왼쪽 팔뚝으로 얼굴을 보호하며 볼프 후작군을 향해 뛰어들었다.

악에 받친 것은 볼프 후작군도 마찬가지였다. 괴성을 지르며 로벨을 향해 망치와 도끼를 휘둘렀다. 로벨은 어금니를 악물고 버텼다. 프란시스 시티 최고의 장인이 만든 필드 아머지만, 죽을힘을 다해 휘두르는 도끼질에 충격이 없을 수 없다. 뱀브레이스 안쪽에서 핏줄이 터지고 피멍이 새겨졌다.

“어림없어!”

로벨은 몸을 틀어 창과 도끼를 걷어내고 그대로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솜을 눌러 담은 클로스 아머를 찢고, 어깨와 쇄골을 비스듬히 베었다. 죽음을 목도한 얼굴은 공허했다. 병사는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칼날을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짧으면 수 초, 길어도 십여 초 후에 절명할 것이다.

삶의 종지부를 너무 일찍 찍은 가련한 청년이지만, 몸이 바쁜 로벨은 마음에 깊이 담아두지 않았다. 목을 베고, 옆구리를 찢고, 머리를 쪼개며 인생의 마침표를 난발했다.

“기사 나리! 오른쪽이요! 오른쪽이 뚫렸습니다요!”

“주군! 이대로는 못 버팁니다!”

로벨은 칼날을 회수하고 숨을 돌렸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브릭 경의 다급한 보고가 올라왔다. 로벨도 보고 있었다. 볼프 후작군의 어느 용감한 병사가 바리게이트를 넘어 구릉성의 늙은 농부를 덮쳤다. 손바닥보다 짧은 단도가 수차례 살을 헤집었다. 농부는 비명을 지르다가 쇼크가 온 듯 혼절했다.

“개자식이!”

용감한 병사의 최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농부의 이웃들이 장작 패는 도끼와 고기 잡는 푸주칼로 용감한 병사의 등과 머리를 후려쳤다. 저 남쪽 마을에서 선량했을 농부와 저 북쪽 마을에서 사랑받았을 청년이 한 덩어리로 포개져 생을 마감했다. 그것을 계기로 잘 버티던 우익이 밀리기 시작했다. 볼프 후작군이 하나둘 바리게이트 넘어 구릉성의 농민병을 밀어붙였다.

로벨은 스피어맨 뒤로 물러나며 울프 용병단을 지휘했다.

“맨앳암즈 3소대! 오른쪽을 막아! 애꾸눈! 지원 사격!”

“자유사격! 장전하는 대로 쏴라!”

볼프 후작군은 사방에서 몰아치는 거센 파도 같았다. 로벨 로드릭 호는 좌우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선장의 뛰어난 항해술도 성난 바람을 줄이지는 못했다. 파도를 잠재우는 것은 배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저 먼 곳에서 맞바람을 일으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바람...?”

놀랍게도 진짜 바람이 불었다. 로벨은 어느덧 환해진 하늘을 한번 보고, 산봉우리를 한번 보았다. 산에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오고 있어.”

“기사 나으리? 뭔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한소리 했다. 피가 닦이기는커녕 더 번져서 피칠갑이 되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허풍쟁이의 못생긴 얼굴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전열이 흐트러지고 있잖아.”

호기심이 강한 용병들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긴박한 상황에도 눈을 돌렸다. 창을 맞댄 볼프 후작군은 저것들을 찔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지만 끝내 찌르지 못했다. 그들도 새로운 바람을 느낀 것이다.

“저, 적군이다!”

울프 용병단의 시선이 닿는 곳, 볼프 후작군의 동쪽 진형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겁 많은 병사들이 흩어지고 욕설인지 비명인지 모를 고성이 터져 나왔다.

“뭣이여? 뭔 일이여?”

“모, 몰라! 뒤에서도 적이 나타났나 봐.”

적이 있는 곳은 이곳인데, 엉뚱한 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벼운 패닉이 일어났다. 그 순간, 35년간 전쟁밥을 먹은 노련한 노(老)용병이 진가를 발휘했다.

“로벨 로드릭 후작님의 작전대로다! 적은 포위되었다! 모조리 꿰어버리자!”

아군이 들으라는 말이 아니었다. 볼프 후작군은 ‘로벨 로드릭’, ‘작전’, ‘포위’란 단어에 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이곳에 모인 볼프 후작군 대부분이 작년 여름 파도 평야에서 싸운 병사들이었다. 연전연승하며 프란시스 시티 앞까지 진격했다가 로벨 로드릭에게 배후를 당해 지리멸렬 후퇴한 것을 기억했다.

“우리가 포위됐어?”

“우악! 적이 온다! 적이 왔어!”

로벨은 ‘내 작전? 무슨 작전?’ 중얼거리며 맹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 파나케아 투구 바이저는 두껍고 차가웠다. 무표정한 로벨의 모습을 힐끔거리던 볼프 후작군은 하나둘 겁을 집어먹었다.

“도, 도망쳐!”

“이놈들! 멈춰라!”

사트로 가문의 기사와 기사 종자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끼고 진정시켰다. 로벨은 이성보다 본능으로 행동했다. 아론다이트를 어깨 뒤로 당기고 과감히 돌진했다. 전투마도, 랜스도 아니지만, 적진을 일점돌파하는 랜스 차칭 그 자체였다.

‘소드 차칭인가?’

로벨은 잠깐 딴생각을 했지만 금방 지웠다. 겁먹고 흩어지는 볼프 후작군을 헤집어 이름 모를 가문의 이름 모를 기사 앞에 다다랐다.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

결투 전에 이름과 가문을 밝히는 것이 훌륭한 매너였다. 다만, 상대방의 이름과 가문을 들어주진 않았다.

“보, 본인은, 으악!”

로벨은 44파운드의 갑옷을 두른 사람답지 않게 3피트 가까이 뛰어올랐다. 안장에 앉은 기사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래 볼 생각은 없었다. 아론다이트를 길게 뻗어 기사의 고짓 플레이트를 찔렀다. 아니, 충돌했다. 체중과 속도가 더해진 일격필사의 공격이었다. 기습 아닌 기습을 당한 기사는 ‘어어? 어!’ 하다가 안장 밖으로 튕겨나갔다. 얇디얇은 고짓 플레이트가 깨지고 사슬이 끊어졌다. 목이 관통되지는 않았지만 충격에 숨을 쉬지 못했다. 낙마의 고통은 덤이었다.

로벨은 기사의 가슴을 발로 밟고 아론다이트의 검광을 옆으로 뿌렸다.

“지금이야! 전군 돌격!”

로벨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울프 용병단 사기가 최고조로 올라갔다. 간신히 유지하던 진형을 팽개치고 앞다투며 뛰쳐나갔다. 공수가 교대되었다. 램지 경이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이런 무모한...”

볼프 후작군이 아직도 3배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에 치중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그러나 로벨의 용병술을, 그리고 호른 경의 투지를 과소평가한 걱정이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소대장을 수시로 호명해서 흩어지지 않게 주의했다. 소대원은 소대장 곁을 떠나지 않으니 맹렬하게 싸우면서도 일정 거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볼프 후작군의 후미를 공격하는 호른 경이 상상 이상으로 맹렬했다.

호른 경이 이끌고 온 기사와 병사는 고작 50명 남짓이었다. 적은 병력은 아니지만, 1,200명의 대군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기사 하나가 목숨을 내던지고 날뛰지 않았으면 말이다.

호른 경은 사전적으로도, 실질적으로 미쳐서 날뛰었다.

“죽어! 죽어! 죽어랏!”

호른 경은 마상용 플레일을 휘두르며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병사를 때려눕혔다. 헬름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눈알이 뒤집히고 입술 사이로 침이 줄줄 새고 있어도 그럴 듯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플레일의 사슬이 떨어지자 집어 던지고 메이스를 뽑아 휘둘렀다.

온몸을 판금으로 감싼 기사라도 불사신은 아니다. 도끼로 때리고 망치로 두드리면 조금씩 찌그러지고, 때때로 찢어지기도 했다. 판금이 보호하지 못하는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도 위험했다. 또한 갑옷의 내구성과 별도로 충격이 누적되었다. 갑옷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충격이 혈관을 터트리고 근육을 움츠리게 했다. 그것까지 견딘다 해도 마지막 문제가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기사도 사람인지라 체력에 한계가 있었다. 숨이 차오르고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입에서 단내가 올라와 헬름 안을 가득 채웠다. 산소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호른 경! 더 이상 들어가면 위험하오!”

늪지성의 매튜 경이 저 뒤에서 소리쳤다. 호른 경은 적의 피와 자신의 피를 뿌리며 울부짖었다.

“나의 주인, 나의 주군이 저곳에 계시오! 본인을, 본인을 기다리고 계시오! 그러한데! 내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기사도의 정수였다. 본심이야 어떠하듯 보는 사람은 전열을 느꼈다. 어릴 적에는 이불 속에서 샘 포클과 12기사의 전설을 들으며 잠이 들고, 술집에서는 용과 기사와 요정의 노래를 들으며 취해온 순박한 병사들이었다. 거친 욕설과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도 원초적인 순수함을 간직했다. 옛이야기의 기사가 눈앞에 나타났는데 냉철할 수 없었다. 적도, 아군도 똑같았다.

단 한 명의 기사가 영혼을 불태워 1,200명의 대군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진짜 전설이라 할 만한 로벨 로드릭이 치고 나왔다.

머리가 굵고 가슴이 차가운 볼프 후작의 기사들에게는 당황스럽다 못해 우스운 상황이었다. 양쪽 다 해봐야 500명이 채 되지 않는데, 그 두 배의 아군이 밀리고 있었다. 로벨과 호른 경이란 기사 두 명 때문에 말이다.

“아주 미쳐 돌아가는군. 로벨 후작은 그렇다 쳐도 저 자작나무 기사는 왜 저러지?”

“...나도 모르오. 묻지 마시오.”

“후작님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오. 누가 가서 진정 좀 시켜보시오.”

그러나 기사들은 칭얼대는 말을 달랠 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쯤이면 항복하고 몸값이나 준비하면 될 텐데, 저리 무식하게 싸워대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싸움에 몸을 망가트리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본디 미친놈은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이런저런 이유가 맞물리자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로벨이 이끄는 본대와 호른 경이 이끄는 지원군이 볼프 후작군의 3중 포위망을 뚫고 중간에서 만났다.

호른 경은 전투마에서 뛰어내려 무릎 꿇었다. 그리고 맨 정신이면 고민 좀 했을 대사를 과감하게 던졌다.

“오오! 나의 영혼, 나의 심장, 나의 주인이시여! 기사 패트릭 호른이 이제야 모시러 왔습니다!”

여러 의미로 닭살이 돋았다. 전반적으로는 감동과 전율이었다. 감정이 과잉된 기사와 병사들은 주군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기사의 용맹에 감탄사를 터트렸다.

“호른 경! 잘 와주었소!”

기사가 되기 위해 옛 신마저 속인 로벨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감정에 휩싸여 호른 경을 부둥켜안았다.

호른 경은 아찔함을 느꼈다. 역시나 여러 의미의 아찔함이었다.

“호른 경?”

호른 경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미소 지었다.

“주군을... 사랑합니다.”

“...엥?”

로벨은 난생처음 듣는 고백에 당황해서 호른 경을 놓아버렸다. 로벨에게 기대있던 호른 경은 볼품없이 쓰러질 뻔했지만, 간신히 땅을 짚고 자세를 유지했다. 기사 서임을 받는 자세 비슷했다.

“주군이 남자라서 사랑한 것도, 여자라서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애초에 사랑한 사람이 주군이었을 뿐...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 선택일 뿐이...”

“지금 뭐라고 했소? 호른 경, 정신 차리시오!”

전장의 소란 탓에 호른 경이 중얼거리는 말 중 절반은 알아듣지 못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나의 주군... 모실 수 있어서... 영광...”

로벨은 2차 포위망을 갖추는 볼프 후작군을 둘러보고 오랜만에 화를 냈다.

“아! 정말! 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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