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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32화 (232/605)

232화. 가호

232화. 가호

볼프 후작군에게 들킬까봐, 혹은 행동이 굼뜬 구울이 쫓아올까봐 조명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400여 명 행렬에 횃불 하나와 호롱불 서너 개가 전부였다. 그것으로는 일행의 위치를 알 수 있을 뿐, 발밑에 돌부리나 나뭇가지를 피할 수 없었다.

“어익후!”

“쉿! 쉿!”

게다가 산길이라 험하기까지 했다. 산그늘이 짙은 곳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까지 쌓여 있었다.

‘모닝스타를 놓고 오길 잘했지.’

로벨은 울프 용병단과 함께 도보로 이동했다. 기사 체면이 말이 아니지만, 오늘은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와악!”

“제발! 제발 조용히 자빠져라!”

“아, 아니, 발목에 뭔가... 배, 뱀인가?”

“이 계절에 뱀이 어디 있냐!”

램지 경은 긴장감이 없는 울프 용병단에 복잡한 심경을 비췄다. 자신의 4배나 되는 적을 공격하러 가는 병사들 같지 않았다.

‘주인에 대한 믿음인가?’

로벨은 횃불을 높이 들고 맨 앞에서 울프 용병단을 이끌었다. 기사답지 않고, 지휘관답지 않았다. 그러나 용병이나 농민병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옛날부터 그래 온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저 하찮은 것들을 위해 위험을 자처하다니, 주군은 무슨 생각이지?’

로벨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에헴! 내 갑옷은 무적이니까!’

로벨은 신수의 투구와 필드 아머를 무한히 신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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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소란과 복잡한 상념을 지나 산봉우리를 돌았다. 켈트 경의 기사 종자가 보고한 바대로면 북쪽 산기슭에 볼프 후작군이 주둔하고 있을 것이다.

로벨은 횃불에 눈을 덮고 발로 밟아 꺼뜨렸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도 호롱불에 덮개를 씌웠다. 별 볼 일 없는 조명이지만, 그것마저 사라지니 자신의 콧등조차 보기 힘든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로벨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 로벨이 침묵하자 브릭 경이 불안한 듯 철컹철컹 쇳소리를 내었다.

“동이 틀 때까지 1경밖에 안 남았습니다.”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군을 돌아보았다. 달빛을 반사하는 흰자위와 거친 숨소리가 한 무리의 짐승 같았다.

펄프 대장이 허연 앞니를 보이며 말했다.

“시작은 뭐로 할까요?”

로벨은 조용히, 그러나 전 병력이 들을 수 있게 명령했다.

“크로스보우 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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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의 볼프 후작군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200명이 한곳에 모여서 화톳불을 환하게 밝히고 반사광을 뿌려대니 못 보고 지나치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불빛이 닿지 않게 아래로 내렸다. 애꾸눈이 이끄는 크로스보우맨도 쿼럴을 그림자에 숨겼다. 그러나 100개가 넘는 쿼럴을 완전히 감출 수 없었다. 수풀 속에 감춰진 쇠촉이 해변의 반짝이는 모래처럼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결국 밤눈 좋은 초병에게 발각되었다.

“뀌이잇!”

“뀌익!”

인간의 말이 아니었다. 검은 숲에서 지겹도록 싸운 괴물, 고블린이었다.

“저 지저분한 것을 또 데려오다니!”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론다이트를 곧게 뻗었다. 칼끝에서 달빛을 쏘아졌다.

“조준!”

로벨을 따라 크로스보우맨 118명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망루에 고블린은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찍었고, 바리게이트에 앉아 있던 고블린은 벌러덩 뒤로 넘어갔다. 숙영지 안에서도 크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발사!

총 118개의 쿼럴이 달빛을 쪼개며 고블린을 향해 날아갔다. 재빨리 엄폐물에 숨은 녀석도 있지만, 대부분은 손쓰지 못하고 쿼럴에 맞아 쓰러졌다.

“돌격!”

로벨은 재장전 대신 백병전을 명령했다. 외팔이 더치가 이끄는 풋맨 소대가 가장 먼저 바리게이트를 넘어 적진에 뛰어들었다. 팔다리에 쿼럴이 박혀 끙끙거리는 고블린을 무참히 도륙하고 몸이 무거운 기사 나리와 맨앳암즈가 따라올 수 있게 길을 열었다.

로벨은 삽시간에 뚫린 진입로를 따라 돌진했다. 고블린이 여기저기서 나타났지만 싸울 태세가 아니었다. 진형은 고사하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투구를 거꾸로 쓰고 아등바등하는 모자란 녀석도 있었다.

로벨은 투구를 앞으로 돌리기 위해 낑낑거리는 고블린의 목을 시원하게 날리고 날뛰는 울프 용병단에게 소리쳤다.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처치해! 그리고 멀리서 볼 수 있게 불을 질러! 모두 불태워!”

로벨이 시키지 않아도 이미 그러고 있었다. 외팔이 더치는 화톳불을 걷어차며 곰처럼 소리를 질렀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장작을 주워 천막 여기저기에 찔러 넣었다. 그 와중에도 고블린 숫자는 빠르게 줄어갔다.

고블린은 저항하고 저항하다 마침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최초의 한 마리가 도주하니 너도나도 도주하기 시작했다.

펄프 대장은 피와 불과 폭력에 흥분한 용병들이 지나치게 깊이 쫓지 않도록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저기, 대장, 이상하지 않아?”

머리에서 열이 빠지자 사물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꽁지 빠지라 도망치는 고블린 십 수 마리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산비탈을 타고 불어오는 차디찬 밤바람에 깃발이 흔들리고, 천막이 들썩이고, 불티가 휘날리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조용했다. 괴이하게 조용했다. 무거운 침묵이 공포심을 자극했다.

“아무도 없잖아...?”

“기사 나리! 기사도! 병사도 없습니다! 여긴 항마병 부대뿐입니다요!”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 바이저를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사방 어디에도 병사가 없었다. 애초에 100여 마리의 고블린만 있었다.

‘...함정이야.’

볼프 후작을 너무 우습게 보았다. 로벨이 구울을 몰아내고 본진으로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로벨 로드릭이라면,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그랜드 챔피언이라면 그러할 거라 짐작한 모양이다.

‘볼프 후작은? 그 군사들은 어디 있지?’

로벨은 머리를 굴렸다. 텅 빈 하인즈 성을 점령했을까? 아니면 구울을 막느라 정신없을 에릭 공작군을 공격하고 있을까? 그 답은 금방 나왔다.

“기사 나으리! 산꼭대기입니다요!”

로벨도 파나케아의 힘으로 보았다. 산봉우리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솟아났다. 은하수 끝자락을 잡아당긴 듯한 수많은 불이었다.

“저게, 저게 뭐야?”

“뭐긴 뭐야! 볼프 후작놈의 주력군이지!”

“기사 나리! 이쪽으로 옵니다!”

횃불 행렬이 뱀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 셋에 꼬리가 감춰진 산만한 뱀이었다. 짐작건대, 강철로 된 비늘이 돋아 있어 가까이 가면 살이 찢길 것이다.

“젠장! 포위당했다!”

“주군! 피해야 합니다!”

구릉성의 마튼 경이 경고했다. 로벨도 동의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어디로?”

이곳은 북쪽으로 내려온 산기슭이었다. 아군은 산 너머에 있고, 그 산은 볼프 후작군이 장악했다.

“하인즈 성으로 퇴각해야 합니다!”

“...이미 늦었어.”

로벨은 동쪽을 보았다. 산머리로 보라색 빛줄기가 어른거리고 별무리가 빠르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곧 해가 뜰 것이오. 저 많은 병사를 따돌릴 수 없소.”

“그러나!”

로벨은 노(老)기사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아론다이트를 좌우로 휘둘러 고블린의 끈적끈적한 피를 털어내고 크게 외쳤다.

“울프 용병단! 대열을 갖춰라! 이곳에서 적과 싸운다!”

울프 용병단은 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밀집대형으로 모였다. 전세가 불리하면 곧장 도망가는 일반적인 용병이 아니었다. 울프 용병단이 싸울 태세를 갖추자 도망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던 농민병도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전열이 정비되자 펄프 대장이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바리게이트 가져와! 중앙을 비우고 좌익과 우익을 틀어막아!”

“스피어맨 앞으로! 너희가 버텨야 우리가 모두 산다!”

경험이 많고 훈련이 잘된 용병이라 금방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적은 1천 명이 넘는 대군이었다. 무시무시한 기사와 흉악한 괴물이 있었다. 철투구 아래로 굵은 땀이 흐르고, 창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나직이 물었다.

“승산이 있습니까요?”

“......”

로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도주하는 것보단 낫지만,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허풍쟁이도 그리 판단하고 질문을 바꿨다.

“지원군이 올깝쇼?”

“...아마도.”

로벨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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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후작은 붉은 산이 구석구석 내려다보이는 정상에서 적군과 아군의 행동을 관찰했다.

텅 빈 야영지를 점거한 로벨 로드릭 후작군이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봉우리 곳곳에 숨겨둔 3개의 부대가 계획대로 포위 중이었다.

“로벨 로드릭만 잡으면 프란시스 가문도 별 것 아니지.”

그때, 볼프 후작 뒤로 창백한 얼굴의 기사가 다가왔다. 평생 햇빛 한 번 못 쬔 듯 피부가 온통 하얬다. 볼프 후작은 일광욕이 시급해 보이는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도반 도트넘 백작.”

그러나 곧 호칭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

강철성의 주인이자 흡혈귀의 왕이 대답했다.

“로벨 로드릭 후작은 만만한 자가 아니오.”

볼프 후작은 사자(死者)의 기운이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내게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준 자인데 어찌 모르겠소.”

도반 도트넘 백작이 미소 지었다. 시체의 입꼬리를 억지로 올린 것처럼 기괴한 미소였다.

“나는 무용을 말한 것이 아니오. 힘과 기술이라면 저자보다 뛰어난 기사가 족히 열은 더 되었소. 그러나 누구도 늑대의 왕을 이길 수 없었소.”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엄청났다. 현역 그랜드 챔피언보다 뛰어난 기사가 여럿 있었으나, 전부 살해당했다는 말이다. 볼프 후작은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럼 무엇이 무서운 것이오?”

“로벨 로드릭 후작은 위대한 수호자의 가호를 받고 있소.”

볼프 후작은 수호자란 말에 코웃음 쳤다.

“당신과 같은?”

“나와 비교가 안 되는 존재요. 멍청한 늑대의 왕이나 천방지축 요정왕하고도 비교가 안 되오.”

볼프 후작은 자칭 수호자의 고백에 놀랐다.

“그런 존재가 있소?”

“그대도 잘 아는 존재요. 그대만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지.”

볼프 후작은 그게 누군지 잠시 생각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그가 또다시 움직이는군.”

볼프 후작은 누구를 지칭하는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때마침 떠오른 아침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전장의 이변을 발견했다.

“저것들은 뭐지?”

초토화된 붉은 산 요새에서 쉰 명 남짓한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숫자는 얼마 안 되는데 기세가 대단했다. 선두의 기사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요새의 잔당인가? 주인을 구하기 위해 모인 것 같은데, 저 병력으로는...”

볼프 후작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참 내려다보다가 간신히 찢어지고 그을린 깃발을 확인했다.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군.”

볼프 후작은 실소했다.

“저자가 위대한 수호자란 말이오? 솜씨가 나쁘진 않으나, 그리 대단한 기사가 아닌데?”

도반 도트넘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악마 중에서도 가장 악마 같은 자는 소리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볼프 후작은 신경을 끄고 다시 전장을 살폈다.

“로벨 로드릭, 이런 식으로 승부를 내게 되어 유감이오. 허나 이해해 주시오. 이것이 우리 왕국을, 그리고 우리 인간을 위한 일이오.”

볼프 후작은 최고의 라이벌이자 최악의 적수를 이곳에서 잠재우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전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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