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어두운 밤
231화. 어두운 밤
인구가 1,000명인 마을이라도 노인과 아이와 병자와 여자를 제외하면 장정은 3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들을 모두 징집하면 마을의 존속이 위험하니, 영지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 아닌 이상 한 집에 한 명만 징집하는 것이 관례이고 상식이다. 그런고로 1,000명 마을에서 병사를 모아봐야 1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구울은 달랐다.
걸음마를 못 뗀 갓난아이와 팔다리를 잃은 중환자만 아니면 여든 노인이든 아홉 살 꼬마든 사람을 해치는 괴물이 될 수 있었다. 화살에 맞아도, 심장이 멎어도 죽지 않는 무서운 괴물이었다.
“마을을 학살하고, 구울을 만들어서 이리로 보낸다고?”
싸움개 닥스가 얼굴을 쓸어내리다 버럭! 소리쳤다.
“미친 거 아냐? 그런 짓을 하고 그냥 넘어갈 리가 없잖아! 국왕 폐하가 있고, 영주 나으리가 있는데?”
“‘늙다리’ 자작이 살아있으면 내 사람, 아니지, 내 재산에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겠지. 하지만 ‘늙다리’ 자작은...”
“...여섯 조각으로 쪼개져서 땅 속에 묻혔지.”
자유와 방치는 종이 한 장 차이였다. 주인이 없는 농민은 자유로운 농부이며 보호받지 못하는 야인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붉은 산을 전장으로 삼은 이유가... 그것이었어...? 하인즈 가문 말고 없으니까?”
“아마도.”
애꾸눈은 여장에 기대고 앉아 아바레스트를 재장전했다. 윈드라스 손잡이가 끼릭- 끼리릭- 소리 내며 돌아갔다.
“저런 엄청난 마법이 하루아침에 될 리 없지. 수개월 전부터 준비했을 거다.”
“그럼 우리 기사 나리가...”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당한 거다. ‘늙다리’ 하인즈 자작과 손잡은 것도, 광물로 장난친 것도, 영주님을 이곳에 가두기 위한 볼프 후작의 술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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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도 자신이 한 방 먹었음을 깨달았다. 볼프 후작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뛰어든 꼴이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자책하는 대신 해결방법에 몰두했다.
“구울을 조종하는 마법사가 있을 거야. 그자를 제거해야 해.”
로벨의 직속 랜스 발가락 슈미츠가 무례를 무릅쓰고 지적했다.
“무슨 수로요? 적진 깊숙한 곳에 꼭꼭 숨어있을 텐데요?”
2천 5백 마리의 구울을 돌파하고, 1천 2백 명의 적진을 헤집으며,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악마추종자를 찾을 생각은 개미 눈곱의 염분만큼도 없었다. 로벨도 그 정도로 무모하진 않았다.
‘키르케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지금 로벨 곁에는 마법을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로벨은 얼마 안 되는 지식을 쥐어짜냈다.
“우선 성 앞에 구울부터 처리할 거야.”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저 많은 구울을 부리려면 그만큼 많은 제물을 사용해야 해. 붉은 산의 주민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니까,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거야.”
과묵한 몬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로벨을 오랫동안 따라다닌 덕분에 ‘제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산제물이군요.”
“응. 정말 못됐지.”
기사치고 정말 순화된 표현이었다.
로벨은 성벽 아래 우글우글 모여 있는 구울을 내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성 안에 기름이 있어?”
“몇 항아리가 있긴 하지만, 저 많은 놈을 태울 정도는 아닙니다.”
“전부 태울 필요 없어.”
로벨은 좀 더 고민한 후 말했다.
“주의를 끌 정도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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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작전은 단순한 만큼 명확했다.
“기름과 화약으로 길을 뚫을 거야. 그럼 과묵한 몬트, 발가락, 흉내쟁이가 빠져나가. 구울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우선 노리니까 거리를 유지하면서 산 아래로 유인해.”
과묵한 몬트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발가락과 흉내쟁이가 소심하게 반박했다.
“어디로 말입니까요? 기사 나으리의 전투마가 아무리 좋아도 하루 종일 달릴 수는 없습니다요.”
“산을 내려가면 에릭 공작이 있을 거야.”
“아! 그렇군요!”
그러자 과묵한 몬트가 반대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공작님이라도 저 많은 구울을 처치할 순 없을 겁니다.”
“우리보단 나을 거야. 누군가는 안식을 줘야 하니까.”
로벨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고 골칫거리를 떠넘겼다. 어린 집사가 이곳에 있었으면 가르친 보람이 있다며 흡족해했을 것이다.
“구울이 사라지면 전군을 이끌고 볼프 후작군을 칠 거야.”
로벨을 옛 신 다음으로 존경하는 가시나무 성의 브릭 경과 매사 신중한 구릉성의 마튼 경은 침묵했지만, 가장 최근에 합류한 램지 마을의 램지 경이 우려를 표시했다.
“아군에게 남은 병력은 주군의 울프 용병단 300명과 저희가 데리고 온 농민병 150명이 전부입니다. 이 병력으로...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병력 차이가 450 대 1,200으로 거의 3배였다. 기사의 숫자만 보면 7, 8배 정도 차이 날 것이다. 수성전이라면 모르지만, 야전으로는 승산이 없었다.
“그러나 두 가지 유리한 점이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는 우리가 먼저 공격할 줄 모른다는 것이오.”
구릉성의 마튼 경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끄덕였다.
“구울을 이용해 주군을 잡아두고,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을 상대한다는 작전일 테니, 주군이 의표를 찔러 선제공격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램지 경은 마뜩치 않았지만 잠자코 넘어갔다.
“또 하나는 무엇입니까?”
“이곳은 산과 계곡이 많소. 볼프 후작군에 기사가 아무리 많아도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들 것이오.”
이번에는 가시나무 성의 브릭 경이 적극 동조했다.
“그렇습니다! 주군의 울프 용병단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용병이고, 구릉성과 가시나무성의 병사도 산과 숲에 이골이 난 병사입니다! 숫자가 적어도 해볼 만합니다!”
브릭 경까지 작전에 동의하자 로드릭 가문에서 입지가 좁은 램지 경은 마지못해 명령을 받들었다.
“언제 실행할 생각입니까?”
로벨의 성격을 알면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의 칼자루를 동시에 움켜쥐고 말했다.
“오늘 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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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이 신중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야간전투였다. 공격받는 것은 물론이고, 공격하는 것도 가급적 삼가야 했다.
전쟁 소설에서 심심하면 등장하는 것이 야간습격이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군대를 움직이는 것은 깃발과 소리였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도 깃발과 소리였다. 전쟁 경험이 풍부한 병사라도 지휘관의 깃발이 안 보이면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안 들리면 계속 싸워야 하는지, 아니면 후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난전이라도 벌어지면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머나먼 지방의 외국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김새와 복장만으로 식별이 불가능하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죽이고 죽이다가 죽어서 끝날 싸움이 된다.
이러한 이유로 거리감이 없는 밤에 싸우는 것은 공격과 수비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제정신이 박힌 지휘관이라면 해가 진 뒤에 부대를 이동시키는 짓은 하지 않았다.
‘나도 제정신이 아닌가?’
로벨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다.
달빛조차 흐린 깜깜한 밤에 수십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을 이끌고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과연 잘하는 일인지 의심되었다. 더욱이 그냥 가는 것도 아니었다.
“후우... 기사 나으리? 준비됐습니다.”
외팔이 더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세상에서 가장 못된 아이도 잠들 늦은 시간이지만, 울프 용병단 이하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출정준비를 마치고 대기했다.
“...시작해.”
로벨이 작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무거운 침묵 탓인지, 차가운 밤공기 탓인지 평소보다 멀리까지 들렸다.
성 안마당에 허풍쟁이가 횃불을 높이 들었다. 성벽 위의 겁쟁이 데비가 복잡한 수신호로 대답했다. 그러자 성탑에 포진한 7문의 팔코넷과 5문의 핸드 캐논이 불씨를 머금었다. 어둠보다 어두운 12개 포구 그림자가 기름을 흠뻑 뒤집어쓴 구울을 향했다.
겁쟁이 데비는 무자비하고 일방적인 폭력을 앞두고 씨익- 웃었다.
“하늘에서 포탄이 빗발친다.”
그 말이 그대로 실현되었다.
콰과과과-광! 콰광! 쾅-!
붉은 산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되는 불꽃과 충격이 일어났다. 성벽이 흔들리고 땅이 요동쳤다. 붉은 산 모든 곳에서 보일 대폭발이었다.
“지금이야! 성문을 열어!”
로벨이 큰소리로 외쳤다. 외팔이 더치와 풋맨 소대가 성문에 달라붙었다. 빗장을 치우고, 버팀목을 내리고, 한 뼘 두께의 하인즈 성문을 활짝 열었다.
“마, 맙소사!”
“옛 신이시여...”
성 밖은 지옥이었다.
얼굴의 반쪽이 사라진 구울, 팔다리가 으스러진 구울, 불타면서 허우적거리는 구울... 괴물이라 해도 사람의 형상이라 실로 끔찍했다.
“어서 가!”
과묵한 몬트가 굵은 침을 삼키고 ‘조랑말’의 옆구리를 때렸다. 평화로운 중부고원 윈필드 출신의 네발짐승은 왜 이런 일을 시키느냐는 듯 거세게 투레질했다. 과묵한 몬트는 재차 옆구리를 때렸다.
“가자! 기사 나리의 명령이다!”
거듭되는 재촉에 '조랑말'이 움직였다. 이어서 ‘배불뚝이’와 ‘로시난테 3세’가 성문을 통과했다. 불붙은 구울과 팔다리가 잘린 구울이 세 명의 기수와 세 마리의 말을 필사적으로 쫓아갔다. 피부가 녹아내림에도 개의치 않고 걸어가는 구울과 하반신이 사라져 내장을 쏟으면서도 엉금엉금 기어가는 구울이 끔찍하고 처절했다.
과묵한 몬트는 구울의 이동속도를 고려해 천천히 이동했다. 보기보다 위험한 임무였다. 구울은 느리고 둔하지만 지치지 않았다. 에릭 공작과 합류할 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이동해야 했다. 길을 잘못 들어 막다른 곳에 이르거나 전투마가 상해 못 쓰게 되면 수천 마리의 구울 손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로벨은 불꽃과 잿가루 너머로 멀어지는 세 명의 용병에게 옛 신의 가호를 내린 후 힘없이 명령했다.
“이제 닫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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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로벨의 기사들, 울프 용병단과 각 지역 농민병들은 볼품없는 초승달이 서쪽으로 완만히 기울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타닥타닥- 소리 내며 타들어 가던 불씨가 사그라지고,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몰골이 별빛 아래 드러날 때, 로벨이 긴 침묵을 깨트렸다.
“조용하지?”
어둠에 잠겨 살포시 잠들었던 펄프 대장이 아닌 척 대답했다.
“예. 성공한 것 같습니다.”
펄프 대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거친 짐승들을 깨웠다. 부스럭부스럭. 철컹철컹. 끙차! 병장기가 하나둘 하늘로 올라갔다. 별똥별 꼬리에 뾰족한 창날이 걸렸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횃불을 밝혀 로벨에게 내밀었다. 로벨은 허리에서 파나케아 투구를 풀어 머리에 쓰고 횃불을 높이 들었다. 어두컴컴한 성에서 유일한 광원이 되었다.
로벨은 주위의 병사들을 쭉 둘러보았다. 횃불을 반사하는 700여 개의 눈빛이 사냥감을 노리는 늑대의 안광 같기도 하고, 불 속에서 날갯짓하는 불나방 같기도 했다. 로벨은 기름 냄새가 묻어나는 새벽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조금 싱겁게 명령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