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시체
230화. 시체
로벨은 이틀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볼프 사트로 후작군에 대항하기 위해 병사와 무기를 배치하고, 성문과 성벽을 보강하는 한편, ‘늙다리’ 하인즈 자작의 시체를 모아서 장례 치렀으며, 현 부인과 전 부인의 아들들을 모아 진지하게 협상했다.
“전쟁이 끝나면 붉은 산의 통치권을 돌려준단 말이오?”
‘늙다리’ 하인즈 자작의 장남이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 로벨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후계자라고 하지만 40줄이 훌쩍 넘은 중년이었다. 단맛, 짠맛, 쓴맛 다 본 나이라 어설프게 구슬릴 수 없었다.
“그 표현은 옳지 않소. 애당초 통치권을 뺏은 적이 없으니까.”
하인즈가 장남이 코웃음 쳤다.
“지금 당장 ‘내 성’에서 나가라고 한다면...”
로벨은 눈썹을 모으고 아론다이트 칼자루에 손을 올랐다. 미망인이 된 하인즈 부인과 아이들이 움찔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장남은 움츠리지 않았다.
“정말 나가겠소?”
로벨은 하인즈 가문의 새로운 주인을 높이 평가했다. ‘늙다리’ 영주보다 훨씬 좋은 영주가 될 것이다.
“그리하겠소.”
“...진심이오?”
“물론이오. 단, 전쟁 배상금은 받아야지.”
하인즈 부인이 벌떡 일어나 항의했다.
“배, 배상금이라니요! 그쪽이 쳐들어와서... 우리를... 우리를...”
용감한 항의지만, 박력이 부족했다.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등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자 파랗게 질려 뒷말을 흘렸다.
로벨이 오른손을 살짝 들어 제지했다. 충성스러운 울프 용병단은 즉시 무기를 회수하고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하인즈가 장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놈들을 300명이나 거느리고 있다니... 아버님에게는 처음부터 승산이 없었다.’
하인즈가 장남은 눈을 질끈 감고 패배를 인정했다.
“얼마를 원하시오?”
로벨이 미소 지었다. 어린 집사가 귀띔한 내용을 그대로 전달했다.
“‘얼마 동안’이오.”
광산의 경영자답게 바로 알아들었다.
“채, 채굴권을 달라고?”
“그리고 이 성의 방어시설도 빌리겠소.”
하인즈가 장남의 입이 벌어졌다.
‘그럼 나갈 생각이 없는 거잖아!’
로벨은 눈꼬리를 살짝 내리고 미소 지었다. 남자가 봐도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하인즈가 장남이 우물쭈물하자 로벨이 말을 덧붙였다.
“채굴권은 심도 깊게 상의해야겠지만, 하인즈 성의 이용기간은 지금 확답할 수 있소. 볼프 사트로 후작군이 붉은 산에서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요. 어떻소? 동의하겠소?”
하인즈가 장남은 동의 안 하면 어찌 나올지 궁금했지만, 목숨이 하나뿐이라 도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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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사트로 후작군과 싸울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인즈 성과 붉은 산 요새 모두 견고한 성벽을 가졌고, 기사와 병사의 사기가 드높으며, 무기와 식량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에릭 공작의 지원군이 코앞에 있었다. 누구도 패배를 생각하지 않았다. 로벨 역시 얼마나 빨리 전쟁을 끝내느냐 고민할 뿐,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패전소식이 들려왔을 때 크게 놀랐다.
“요새가... 붉은 산 요새가 함락되었어...?”
어깨와 등에 화살이 한 대씩 박힌 켈트 경의 기사 종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백 마디 말보다 어깨와 등에 꽂힌 화살이 전황의 심각함을 증명했다. 철판을 촘촘히 덧댄 브리간딘이 아니었으면 치명상을 입어 하인즈 성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켈트 경은? 바이란 경은? 호른 경은 어떻게 됐어?”
기사 종자는 신음을 삼키고 보고했다.
“켈트 경은 포로가 되었고, 바이란 경과 메튜 경은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호른 경 역시...”
로벨은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충분히 막아내리라 생각한 요새가 함락되었다. 그것도 고작 반나절 만에 함락되었다. 로벨이 거느리고 온 병력 중 절반이 사라졌다. 그들 대부분이 영지의 기반이 되는 농민병이라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위성도, 가시성도, 호른 성도 한동안 굶주림과 슬픔에 시달릴 것이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 견고한 요새를...”
“모, 몬스터였습니다.”
“고블린? 트롤? 오우거?”
“아니, 아닙니다. 고블린도 일부 있었지만... 그보다... 주, 죽은 자가...”
그때, 성문을 수비하는 싸움개 닥스가 아성으로 뛰어와 소리쳤다.
“기사 나으리! 적입니다! 적군이 이곳으로 옵니다!”
“이런! 벌써?”
로벨은 소드 벨트를 챙겨서 일어났다.
“적의 숫자는?”
“엄청 많습니다! 엄청나게 많아요! 족히, 족히 2천 명이 넘습니다!”
외팔이 더치가 어금니로 바클러를 쪼이며 소리쳤다.
“므시라? 2츠언! 2츠언이라그?”
“저 자식이 겁에 질려 헛것을 봤겠지! 볼프 후작군 총 병력이 1천 명 조금 넘는데, 무슨 2천 명이야?”
그러자 기사 종자가 반박했다.
“아, 아닙니다! 2천 명이 맞습니다! 어쩌면 더 될지도 모릅니다! 후작님,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바로 늑대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 밖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아니, 함성이 아니다. 머리 굵은 남자들이 좀처럼 들려주지 않는 비명이었다. 당장 성벽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발목을 잡았다. 붉은 산의 요새가 함락되어서도, 켈트 경의 기사 종자가 극구 말려서도 아니다. 과거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기억이 날 듯 말듯 애를 태웠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귀하신 기사 종자를 윽박질렀다.
“거 증말 답답하네! 자세히 좀 말해보쇼! 대체 뭐요?”
기사 종자는 부들부들 떨며 못다한 보고를 마무리했다.
“죽은 자, 죽은 자가 일어납니다! 시체 말입니다! 시체가 되살아나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합니다!”
로벨은 간신히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은 뉴 로드릭 마을이 된 마크 하몬 마을이었다. 그곳과 느낌이 비슷했다.
“...구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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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에 시체가 없는 곳은 없다.
하인즈 성도 예외는 아니라 성 안팎에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도 로벨 로드릭 군과 싸우다 죽은 원한 가득한 시체가 수십 구였다.
“사자(死者)를 일으켜? 그것도 전쟁터에서?”
죽고 죽이는 것이 일과인 전장에는 산 자보다 죽은 자가 더 많았다. 혹 죽은 사람이 적어도 괜찮았다. 기다리면 누군가 죽을 테니까.
“빌어먹을 이교도! 빌어도 못 먹고 퉤엣! 뱉을 악마추종자!”
“우아아악! 괴물이다!”
성 밖만 문제가 아니었다. 성 안에서도 구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일 전 전사한 하인즈 성 수비병도 수비병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죽은 시체도 있었다.
정원 구석진 곳에서 젖은 땅을 헤집고 일어나는 구더기 남자, 메마른 우물에서 기어 올라오는 뼈다귀 여자, 굴뚝 속에서 까맣게 익어버린 불쌍한 꼬마아이... 울프 용병단은 물론이고, 하인즈 성 사람까지 기겁했다. 그들도 자신의 성에 이리 시체가 많은 줄 몰랐을 것이다.
‘늑대성도 이러려나?’
로벨은 늑대성에 돌아가면 성 안 구석구석 뒤져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면 말이다.
“구울한테 화살은 소용없어! 크로스보우! 성 밖을 경계해! 맨앳암즈는 성문으로! 풋맨과 스피어맨은 나를 따라와!”
로벨은 붉은 산 요새가 어떻게 함락되었는지 알았다. 경험이 부족한 농민병은 성 안에 나타난 구울에 놀라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구울에게 숨이 끓어진 병사도 구울이 되어 일어나니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것이다.
‘여긴 달라!’
로벨은 아론다이트 칼집 채 머리 위로 올려 힘차게 뽑았다. 챙! 청명한 쇳소리와 눈부신 반사광이 주위의 시선을 모았다.
“성 안에 구울부터 정리한다! 명심해! 죽지 마!”
“원래 죽을 생각 없습니다요!”
로벨과 함께 전장을 누벼온, ‘살아있는 전설’까진 아니어도 비스무리한 대접은 받을 만한 울프 용병단 원년 멤버가 병장기를 꺼냈다.
로벨은 양팔을 휘저으며 달려오는 전 하인즈 자작 병사의 목을 뎅겅 자르고 어깨로 가슴을 받아 뒤로 넘겼다. 쓸데없는 힘 낭비 같지만, 사기를 끌어올리는데 더없이 좋았다. 구울이 짚단처럼 넘어가자 별거 아니라 생각했다.
“쳇! 살아있을 때도 우리 상대가 아니었는데, 죽은 놈이 대수냐!”
“한번 죽였으면 두 번 죽일 수도 있지! 또 죽여주마!”
로벨을 필두로 울프 용병단이 구울을 물고, 뜯고, 찢어발겼다. 위치가 안 좋은 용병과 타이밍이 안 좋은 용병이 부상을 입었지만, 대부분 큰 상처 없이 성 안의 구울을 처치했다.
“후우! 후우! 이 성을 점령할 때, 후하! 피를 적게 흘린 게 진짜 다행입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헐떡거리면서 외쳤다. 로벨도 동의했다. 무차별적인 살상을 막아 다행이다.
“그치만 이제 시작이야.”
“오, 옵니다! 놈들이 옵니다!”
이제 성 안을 정리했을 뿐이다. 성 밖에는 붉은 산 곳곳에서 긁어모은 수백 구의 구울이 있었다.
두두두... 두두두두...
어쩌면 수천 구가 될지도 모른다. 구울의 발소리가 성벽 너머까지 전해졌다.
이제 제법 기사 티가 나는 머를 브릭 경이 롱소드를 휘두르며 명령했다.
“머리를 노려라! 머리를 쏘고! 목을 베어라!”
울프 용병단은 ‘넌 뭔데 명령질이냐?’ 시선을 잠깐 던졌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일단 지시에 따랐다. 활대가 한계까지 당겨진 쇠뇌를 견착하고, 신중하게 방아쇠를 쥐었다. 파팡-!
울프 용병단의 크로스보우맨은 명사수 중에 명사수였다. 처음부터 자질이 있는 용병만 뽑았으며, 실전에 실전을 거듭하여 완전히 숙달되었다. 100여 개의 쿼럴 중 90여 개가 어그적어그적 걸어오는 구울을 맞혔다. 150파운드의 장력으로 쏘아진 쿼럴에 구울 무리가 우르르- 쓰러졌다. 그러나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대여섯 마리 빼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일어났다.
“머리를 맞혀야 한다! 머리가 아니면 죽지 않아!”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쇼? 제길, 산바람이 이리 부는데?”
크로스보우맨은 투덜거리면서도 쇠뇌 등자를 밟고 시위를 당겼다. 죽어도 죽지 않는 시체의 행진이 끔찍하긴 하나 겁먹지 않았다.
“저 덜떨어진 괴물들이 성벽을 넘을 것도 아니고...”
하인즈 가문을 300년 동안 지켜온 하인즈 성은 견고했다. 로벨조차도 성 안에서 성문을 열게 해야 했으니, 지성이 없는 구울 따위가 성벽을 넘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전황은 불리했다.
“쿼럴이 얼마나 남았지?”
“1,500발이 조금 안됩니다.”
이미 죽은 구울 쉽게 죽지 않았다. 머리를 정확히 뚫어야 쓰러지는데, 쉴새없이 흔들거리는 구울의 머리를 맞히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붉은 산 요새에서 죽은 프리랜서들은 철투구를 쓰고 있어 한두 발로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숫자가 늘었어...?”
반나절이 지나자 또다시 수백 마리의 구울이 나타났다. 붉은 산 요새에서 온 구울과 합치면 2,500마리가 넘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진저리치며 외쳤다.
“그야 당연하지! 저거 시체잖아? 공동묘지만 털어도 수십 마리씩 나올 텐데!”
애꾸눈이 아바레스트 시위를 감으며 정정했다.
“공동묘지가 아니다. 네 눈에는 저게 몇 년 묵은 송장 같으냐?”
울프 용병단은 시력을 돋구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고 성 밖을 보았다. 온몸에 피칠하고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는 구울은 오래보고 싶은 몰골이 아니었다.
“피?”
겁쟁이 데비가 중얼거렸다. 애꾸눈은 쿼럴을 몸체에 올리고 말했다.
“무덤에서 깨어난 시체가 저리 깨끗한 피를 흘릴 리 없지.”
상상력이 아주 부족한 몇 명 빼고 애꾸눈의 말을 금방 이해했다.
“그 말은...!”
애꾸눈은 여장 위로 상체를 내밀고 아바레스트를 겨냥했다. 진실을 고하는 것과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거의 동시였다.
“산 사람을 죽여서, 구울로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