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29화 (229/605)

229화. 근심

살인, 방화, 강간, 약탈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로벨과 로벨의 측근이 안 보는 곳에서 일어났을지는 모르지만, 공개적으로는 어떤 전쟁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신이 난 기사들과 가장 날뛰어야 할 용병들이 점잖으니, 겉으로는 험악한 척해도 속내는 어리숙한 농민병도 눈치 보며 조심했다.

로벨은 시체가 좀 굴러다니는 것 외에 깨끗하고 조용한 붉은 성 풍경에 만족했다.

“하인즈 자작은?”

겁쟁이 데비가 피곤한 얼굴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열심히 짜 맞추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대포에 직격 당한 하인즈 자작과 기사들은 말 그대로 산산이 조각났다. 창칼 앞에서 무적을 자랑하는 풀 플레이트 아머도 3파운드의 화약으로 쏘아진 돌덩어리를 버티진 못했다. 갑옷은 버텨도 갑옷 안의 몸뚱이가 버티지 못했다.

“얼마나 걸리는데?”

“그것이... 기사 나으리가 이렇게 떼로 죽은 경우는 좀처럼 없어서...”

성문 앞에 대포를 반원형으로 포진해 놓고, 성문이 열리자마자 일제히 포격했다. 표적을 정해놓고 쏜 것이 아니라 몇 명이 휘말렸는지 파악이 안 되었다. 어느 조각이 하인즈 자작의 조각인지 골치 아픈 퍼즐 맞추기를 해야 했다.

“시신이 있어야 붉은 산의 기사들을 진정시킬 수 있어. 좀 더 서둘러.”

“예예. 내일 아침까지 필히 꿰매놓겠습니다.”

표현이 조금 끔찍하지만, 현실이 더욱 끔찍하기에 지적하지 않았다.

로벨은 휴식 중인 울프 용병단에게 명령했다.

“성 안의 무기와 식량을 보급마차에 실어. 못 가져가는 것은 영지민에게 나눠줘.”

아직 용병물이 덜든 신참 용병이 손바닥을 비비며 물었다.

“헤헤, 나으리? 저희 몫은...?”

겁쟁이 데비 이하 고참 용병이 인상을 꾸겼다. ‘그걸 기사 나리한테 묻는 얼빠진 새끼가 어디 있냐!’ 로벨은 방긋 웃었다.

“가져가도 되는 것은 챙겨.”

신참 용병들은 뛸 듯이 기뻐했지만, 고참 용병들은 성벽이 무너져라 한숨을 쉬었다.

고귀한 기사와 고상한 귀부인의 보물 중 미천한 용병이 가져도 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장담하건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호주머니에 ‘우연히’ 들어가는 경우가 있을 뿐인데, 로벨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우연이라도 챙길 수 없게 되었다.

“저 자식을 그냥...!”

“참아.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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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내쟁이 퍼시발이 갑자기 낄낄 웃었다.

창고 밖으로 밀자루를 끄집어내던 허풍쟁이가 의아해서 물었다.

“싸우다 머리 맞았냐?”

과묵한 몬트가 걱정되는 듯 뒤통수를 유심히 살폈다. 흉내쟁이는 파리 쫓듯이 손사래치고 말했다.

“이제 붉은 산은 우리 기사 나리꺼 아니냐? 이만한 땅을 차지했으면 우리 몫도 넉넉히 챙겨주겠지? 안 그래?”

허풍쟁이가 피식- 웃었다. 농장주인 퍼시발이나 목장주인 퍼시발을 꿈꾼 모양이다.

“엉. 안 그래.”

과묵한 몬트도 상황을 알아채고 수레로 돌아갔다. 헛된 망상이었다. 흉내쟁이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왜? 늙다리 하인즈 자작이 죽었잖아?”

“그 자식들이 있잖아. 아들을 낳은 정실부인만 셋이고, 이름 모를 사생아가 소대규모라는데 어떡하냐.”

“그런 놈들을 왜 신경 쓰는데?”

“정통성이란 게 있으니까. 배부른 기사 나으리들의 트집 같지만, 그 기사 나으리들한테는 금화, 은화보다 중요한 거야. 우리 기사 나리가 억지로 붉은 산을 차지하면 하인즈 가문 핏줄과 기사들은 물론이고, 아무 상관없는 다른 영주들까지 들고일어날 거다.”

“허! 참나! 지들 일이나 잘할 것이지...”

“지들 일이니까.”

과묵한 몬트가 수레에 밀자루를 던지고 말했다.

“오늘은 붉은 산이지만, 내일은 자신의 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도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 신분제도의 연장선이다.”

‘과묵한’ 몬트답지 않게 말꼬리 길었다. 허풍쟁이, 흉내쟁이, 그리고 발가락과 발냄새까지 멍하니 과묵한 몬트를 보았다. 과묵한 몬트는 강철 모리안을 아래로 내리고 어색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진짜 적은 아직 오지도 않았으니.”

“진짜 적?”

과묵한 몬트는 입을 다물고 작업에 집중했다. 흉내쟁이와 발가락은 어리둥절해서 서로를 보았지만, 머리가 좋은 허풍쟁이는 금방 이해했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 미망인 전쟁부터 작년에 치른 왕위계승전쟁까지. 볼탄 반도의 전쟁은 항상 두 가문의 대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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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적’이 남하하는 것과 동시에 아군도 북상했다. 페르젠 가문, 헤르만 가문, 맥기 가문, 도이첼 가문 등으로 구성된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이었다.

“이번에 아주 작정한 모양이오.”

“작년 여름에 프란시스 시티가 함락될 뻔했으니까. 공작님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진노했겠나.”

로드릭 가문의 봉신들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의 규모를 듣고 흥분해서 떠들었다. 소집된 기사가 77명, 고용한 용병이 550명이며, 각 영지에서 징집한 농민병이 1,800명이었다. 볼탄 반도 남부의 군사력이 총동원되었다.

“하긴, 주군이 아니었으면 페르젠 백작, 그 얼간이가 며칠이나 버텼겠어?”

“페르젠 백작보다 심각한 것이 헤르만 백작 아닌가. 그 가문은 정통성 전쟁 때부터 배신을 밥 먹듯이 했네.”

“그런데 이 전쟁에 참전시킨 것은...”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가 아니겠나. 그 자를 호수성에 그냥 뒀다가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

구릉성의 마튼 경이 의문을 풀어주었다. 나이를 헛투로 먹지 않아 연륜이 묻어났다.

그때, 켈트 경 휘하의 기사가 메인 홀로 들어와 고했다.

“주군께서 오셨습니다.”

로벨이 작전회의실이 된 붉은 성의 메인 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높이로 보나 넓이로 보나 늑대성의 홀보다 웅장했다. 철광을 가진 대영주의 성다웠다. 반면, 로벨의 기사들은 로벨의 복장에 집중했다. 전투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났으나 로벨은 여전히 갑옷을 벗지 않았다.

쇳덩이를 떼어내고 가벼운 아밍 더블릿에 망토만 두르고 찾아온 기사들은 주군보다 못한 무장 상태에 얼굴을 붉혔다. 로벨의 육중한 필드 아머가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해이해졌는가!’ 라는 질책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런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수리가 끝난 고오급 갑옷을 좀 더 자랑하고 싶을 뿐이었다.

로벨은 열처리까지 완벽하게 끝나 번쩍번쩍 빛나는 폴드런을 으쓱였다-그래서 기사들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군 1,200명이 붉은 산 북쪽에 도착했소.”

승전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기사들은 금방 흥분해서 떠들었다.

“고작 1,200명이면 우리군으로 싸워볼 만 합니다!”

“주군! 북쪽으로 가시지요!”

로벨은 굳은 얼굴로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난공불락의 붉은 성을 사흘 만에, 그것도 아무 피해 없이 점령했으니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했다. 그러나 자만은 독이었다.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는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가 있었다.

한 가지 희소식이라면, 이번 전쟁에 늑대의 왕은 참전하지 않았다.

‘구름평야에서 패배가 꽤 아팠나?’

로벨이 딴 생각하며 침묵하자 기사들은 뒤늦게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로벨은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우린 하인즈 성과 붉은 산 요새에서 수비할 것이오. 식량과 무기를 옮겨두었으니 에릭 공작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오.”

켈트 경이 즉시 항의했다.

“우리에게는 300명의 울프 용병단과 100명의 프리랜서, 그리고 500명의 농민병이 있습니다. 이만한 군사를 거느리고 농성만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이유를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볼프 후작의 속내를 알 수 없어서, 뱀파이어 군주와 같은 괴물이 무서워서라고 말할 수 없었다. 로벨은 최선을 다해 핑계를 만들었다.

“이 전쟁은 늑대성의 전쟁이 아니오. 무능하고 무책임한 옛 왕과 옛 왕을 조종하는 야심 많은 제후들을 처단하기 위한 전쟁이오.”

“우리의 새로운 왕이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또는 새로운 왕의 의지를 받드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싸워야 하오.”

기사 교육을 잘 받은 기사들은 ‘옳다구나!’ 감탄했고, 쇳가루를 덜 마신 기사들은 아군의 피해를 줄이려고 저러는구나 납득했다.

로벨은 기사들의 표정을 꼼꼼히 확인 후 명령했다.

“켈트 경, 바이란 경, 호른 경, 메튜 경은 내일 아침 붉은 산 요새로 출발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브릭 경, 마튼 경, 램지 경은 이곳에서 수비태세를 갖추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로벨은 부대배치, 연락방법, 유사시 후퇴할 방법과 재집결할 장소 따위를 결정한 후 작전회의를 마무리했다. 내일 아침 계곡을 건너 요새로 가야 하는 기사들은 출발준비를 위해 자리를 떠났다. 붉은 성에 남게 된 기사들도 휘하 병사들을 단속하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나 한 사람, 호른 경은 끝까지 자리에 남았다.

로벨은 의아해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고기 좋아하는 요정은 잘 있소?”

호른 경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기분 탓인지 눈을 피하는 것 같았다.

“소피는 자작나무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아, 그렇지. 숲을 떠나 오래 머물 수 없다 했지. 경도 이번 전쟁이 끝나면 자작나무 숲에 돌아가 푹 쉬도록 하시오. 고향만큼 좋은 곳이 없으니까.”

“주군은... 어찌해서...”

호른 경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작전회의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로벨은 자신의 제일 가는 기사(자칭)가 힘이 없자 걱정했다.

“왜 그러시오? 몸이 안 좋은 것이오? 그런 것이면 이번 작전에서 제외해줄 테니...”

호른 경이 고개를 들어 로벨의 까만 눈동자와 발그레한 두 뺨과 붉은 입술을 보았다. 나이에 비해 앳된 주군이었다. 스물이 훨씬 넘었지만 콧수염은 고사하고 솜털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금껏 의심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아닙니다.”

선입견이 무서운 것이다. 저만한 무용과 저만한 카리스마를 앞에서 누가 의심할 수 있었을까.

호른 경은 로벨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빤히 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말 별일 아닙니다. 자그마한 근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경의 근심이 곧 나의 근심이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오?”

호른 경은 머리를 가로젓고 일어났다.

“제가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아, 그렇소? 다행이오.”

호른 경은 목례하고 작전회의실을 떠났다. 로벨은 의아했지만 붙잡지 않았다. 떠나기 직전에 환한 미소가 그나마 안심되었다. 무슨 근심인지 모르지만 잘 해결할 것 같았다. 로벨은 지금 눈앞에 닥친 일만 해도 정신없었다.

로벨은 하인즈 자작이 조각나기 전에 식탁으로 사용했을 원형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산의 지형이 세세하게 음각되어 있었다.

로벨은 북쪽의 볼프 후작군과 남쪽의 에릭 공작군을 쭉 훑고서 붉은 산 요새로 돌아갔다.

“병력도, 물자도, 지형도 유리해.”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번에야말로 끝을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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