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점령
차디찬 북풍 사이로 온화한 동풍이 한 줄기 불어왔다. 꽁꽁 얼어붙은 땅이 깨어나자 성미 급한 새싹은 바스러진 흙 위로 머리를 내밀고 부지런한 개울은 갈라진 얼음 틈새로 졸졸 흘러내렸다. 한 해를 시작하는 계절,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생명의 계절, 한마디로 정의하면...
“봄이야.”
처벅! 처벅!
눈 녹은 진창에 쇠징이 박힌 가죽 부츠가 떨어졌다. 흙탕물이 좌우로 튀었다. 하지만 신발 주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자리를 밟을 사람은 자신 혼자가 아니니까.
처벅! 처벅! 처벅! 처벅!
진창 위로 수많은 발이 지나갔다. 철 조각을 덧댄 발, 털가죽을 두른 발, 아마포로 감싼 발 등등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지나갔다.
사람의 발이 지나간 뒤 짐승과 짐승이 끄는 수레바퀴가 지나갔다. 그제야 누군가 진창에 신경 썼다.
“어이! 여기 땅이 꺼졌다! 수레 안 빠지게 조심해!”
“수레 조심하시란다!”
“수레 잘 봐라!”
선두에서 후미까지 오랫동안 전달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외딴 길로 1,000명이나 되는 군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로벨은 기사 체면이고 영주 체통이고 모닝스타에서 내려 진흙투성이 길을 두 발로 걸었다. 장딴지가 부실한 말에게 진창은 빙판보다 위험했다.
모닝스타는 괜찮으니 어서 타라는 듯 로벨의 꽁지머리를 핥았지만, 그 대가는 재갈이었다. 재갈 씌워진 모닝스타의 눈초리가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것 같으나 12명의 기사와 1,000명이 넘는 장병을 책임진 로벨은 애마를 배려하지 못했다.
“주군, 전방 1마일에 개울이 있습니다. 조금 이르지만 그곳에서 잠시 쉬지요.”
로벨이 지휘하는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붉은 산 하인즈 자작령을 향해 진군 중이었다.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의 기사, 검은 숲의 해방자, 포클랜드 시티의 정복자가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다는 소식에 볼탄 반도가 발칵 뒤집혔다. 가장 놀란 것은 붉은 산의 주민들일 것이다.
정세에 밝고 풍문에 민감한 자유민은 진작 값나가는 것을 들고 도망갔지만, 손바닥만한 땅이 유일한 재산인 농민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옛 신에게 간절히 기도만 올렸다. ‘부디 조금만 약탈하길!’
그러나 정작 공포의 대상 로벨 로드릭은 심경이 좋지 않았다. 진군 속도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울프 용병단만 이끌고 다니던 시절에는 하루에 15, 6마일도 가뿐히 이동했다. 체력이 좋은 용병이 사나흘 치 보급만 챙겨서 움직이니 길만 좋으면 그보다 더 갈 수 있었다. 그러나 1천 명을 움직이니 하루에 10마일 행군하기도 빠듯했다. 대포, 사다리, 식량마차, 가축 등을 끌고 가야하며, 1천 명이 이용할 풍부한 수원이 있는 곳에 주둔해야하기에 길이 좋고 시간이 남아도 일찌감치 야영할 때가 많았다.
‘전쟁은 신속함인데, 첫 단계를 건너뛰었어.’
하지만 하인즈 자작의 사정도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라 크게 낙담하진 않았다. 클리포드 하인즈 자작의 봉신, 그리고 볼프 사트로 후작의 지원군도 가파른 지형과 눈 녹은 진창에 곤욕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마로드, 전진합니까?”
호른 경의 수행원, 켈트 경의 기사 종자, 마튼 경의 시종 등이 찾아와 물었다.
로벨은 대답에 앞서 정찰을 마치고 대기 중인 과묵한 몬트에게 물었다.
“어때?”
“2마일 앞에 작은 농장이 있지만, 우리 군이 야영하기에는 작습니다.”
“물은?”
“옹달샘 하나가 전부입니다.”
로벨은 결심을 굳혔다.
“오늘은 이곳에서 야영할 거야. 너희 주인에게 그리 전해.”
울프 용병단 300명을 포함한 약 1,000명이 숙영지를 차렸다. 그래도 사흘째라 제법 능숙했다. 개울을 따라 막사를 세우고, 소대 단위로 비스킷과 생고기를 배급하고, 중대 단위로 구역을 나눠서 초병을 배치했다.
로벨은 외팔이 더치가 낑낑거리며 세우는 육각막사를 바라보며 펄프 대장에게 물었다.
“오늘은 얼마나 이동했지?”
“9마일이 조금 안 됩니다.”
로벨은 붉은 산까지 거리를 가늠했다. 남쪽으로 크게 돌아가는 탓에 이틀이 더 소비되었다.
“내일은 조금 무리해서 이동해야겠어.”
“이제 곧 하인즈 자작령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지금쯤이면 ‘늙다리’ 하인즈 자작도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진군로를 보고받았을 것이다. 펄프 대장은 선전포고 후 쳐들어가는 지휘관의 상식적인 의심을 발휘했다.
“복병을 배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로벨은 상식을 무시했다.
“하인즈 자작은 욕심이 많은 기회주의자야. 자기 혼자 싸울 생각은 안 할 거야. 이기기도 힘들고, 이기더라도 피해가 클 테니까. 그러니까 봉신들을 모으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 해.”
“아... 그럴 수 있겠군요.”
“우선 정예부대를 먼저 보낼 거야. 광산마을을 점령하고 요새를 공격하는 시늉하면 하인즈 자작군의 사기가 크게 꺾이겠지.”
“정예부대라면...”
“당연히 울프 용병단이지.”
펄프 대장은 300명의 동료를 대표해 한숨을 푸욱- 쉬었다.
“기사도 몇 명 보낼 거야. 호른 경이 좋겠어. 휘하 병력이 몇 안 되니 몸이 가볍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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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즈 자작의 평가 중에는 ‘훌륭한’, ‘뛰어난’, ‘우수한’ 같은 수식어는 거의 없었다. 젊은 시절에도 그저 그런 기사였고, 백발이 성성한 지금도 그저 그런 영주였다.
“그저 그런 수준으로 못 막아.”
펄프 대장이 이끌고 간 울프 용병단 2개 중대는 한나절 만에 붉은 산 광산과 광산 아랫마을을 점령했다.
하인즈 자작이 보낸 젊은 기사와 곡괭이로 무장한 광부들이 저항했지만, 전투라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간단히 승리했다.
지금의 볼탄 반도에는 울프 용병단을 단독으로 상대할 군대가 전무했다. 강철을 두른 맨앳암즈와 숙달된 아바레스터의 조합은 완전무장한 기사조차 경시할 수 없었다.
울프 용병단 200명이 하인즈 자작의 자금줄을 틀어쥐고 겁 없는 광부들을 놀리는 사이, 로벨이 이끄는 800명이 하인즈 성을 포위했다.
“쉽지 않겠는뎁쇼?”
로벨은 계곡을 등지고 우뚝 솟은 하인즈 성을 바라보았다. 붉은 산의 이름을 빌려 ‘붉은 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성 자체에는 붉은 기운이 거의 없었다. 하얗고 단단한 화강암으로 지어진 성이었다.
“대포로 힘들겠지?”
“캐벌린을 가져오면 혹 모르지만, 우리가 가진 팔코넷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인즈 가문이 지금까지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광산도 광산이지만 난공불락의 붉은 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쪽과 동쪽은 깎아질 듯한 계곡이 자리해서 접근이 불가능하고, 남쪽은 경사가 급해서 공성무기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결국 공격할만한 곳은 서쪽뿐인데, 수비군이 바보가 아니라 서쪽에 병사와 무기를 집중시켰다.
“대포로 허물 수 없으면 사다리로 넘어가야지.”
“피해가 클 겁니다.”
남쪽과 북쪽에 비해 ‘그나마’ 공략할 만한 곳일 뿐,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성벽 높이만 28피트이며, 총안이 뚫린 보루가 촘촘히 에워싸고 있었다. 위아래에서 활을 쏘아대면 사다리에 오르기도 전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다.
구릉성의 마튼 경이 난공불락 요새를 공략하는 전통적인 전술을 내놓았다.
“고사시키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벨은 고민 없이 고민하는 시늉하고 대답했다.
“안 되오. 볼프 후작이 지원군을 끌고 올 것이오.”
늪지성의 메튜 경이 또 다른 전통을 제시했다.
“인근 마을과 농가를 불태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영지민과 영지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뛰쳐나올 겁니다.”
이번에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보급품을 징발하는 것은 허락하나, 살인과 방화는 안 되오. 돌이킬 수 없는 적을 만들 생각은 없소.”
로벨은 농민들을 생각하고 한 말이지만, 로벨의 봉신은 하인즈 가문의 기사들로 이해하고 수긍했다.
바위성의 켈트 경이 짜증을 한 스푼 담아 쏘았다.
“그럼 출혈을 감수하고 정공법으로 가실 겁니까?”
“정공법? 그렇소이다.”
로벨은 노파심 가득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걱정과 달리 출혈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성을 공격할 것이오. 단, 저 성이 아니오.”
“그 말씀은?”
“경들이 군사를 이끌고 하인즈 자작의 봉신들을 공격하시오.”
“...저희가 말입니까?”
“부족한 무기와 병력은 지원해주겠소. 최대한 많은 땅을 점령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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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휘하 봉신들을 붉은 산 각지로 보냈다. 각 부대의 병력은 100에서 200명으로 결코 많지 않지만,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은 소규모 하인즈 가문 부대와 20~30가구의 작은 장원을 점령하기 충분했다.
이 작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고작 100명의 울프 용병단으로 붉은 성을 포위한 로벨의 본진이었다. 규모로 보면 본진이라 할 수도 없었다. 클리포드 하인즈 자작군이 역습하면 전투가 아니라 전쟁까지 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의심과 겁이 많은 늙은 하인즈 자작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로벨 또한 그럴 거라 생각했다.
로벨은 성 앞 주둔지에서 봉신들의 전공을 보고받으며 푹 쉬었다. 하지만 마냥 놀고먹은 것은 아니었다. 사흘이 지나서 허풍쟁이를 비롯한 볼탄 반도 토박이 용병들을 은밀히 불러 모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로벨 로드릭 후작이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화친을 청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로벨 로드릭은 붉은 산에서 점령한 성과 마을을 둘로 쪼개어 볼프 사트로 후작과 나눠 가질 생각이다.’
성 안에 틀어박혀 볼프 후작군의 지원만 기다리는 하인즈 자작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면 눈 뜨고 영지의 태반을 잃을 수 있었다.
“세상에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볼프 후작이 거저 생기는 땅을 거부할 리 없다!”
하인즈 자작은 생각이 짧고 마음이 편협하여 세상 사람을 자기 수준으로 여겼다.
“로벨 로드릭이 약탈을 금지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의심했어야 했다! 이놈! 이노오옴! 붉은 산을 통째로 꿀꺽할 작정이었냐!”
한번 믿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짜 맞춰진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었다. 의심을 할 줄 아는 수행기사와 행정관이 재고를 권했으나 하인즈 자작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만에 피가 끓어올라 고작 100여 명 남은 성 앞 로벨 로드릭 군이 만만해 보였다.
붉은 성에는 300명의 병사가 있었다. 모두 이끌고 나가면 단번에 무적무패의 신화를 짓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를 따르라! 저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어린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것이다!”
로벨에게 지독히 당한 볼프 후작, 자비에 후작 등이 보았으면 한숨부터 쉬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즈 자작이 성문을 열고 나와 제일 먼저 목격한 것은 사각천막 속에서 수줍게 머리를 내미는 7문의 대포였다.
겁쟁이 데비가 모처럼 신이 나서 소리쳤다.
“성벽은 못 부숴도 꼴통은 부술 수 있지! 으하핫! 파이어!”
“Fire!”
용기 내어 성 밖으로 나온 클리포드 하인즈 자작 이하 7명의 기사가 단 한 차례 일제포격으로 ‘기사였던 무언가’가 되었다.
영주와 기사들을 한꺼번에 잃은 수비군은 싸울 힘은커녕 의지도 사라졌다. 자신들이 3배 많다는 사실도, 성 안에 도망칠 곳이 없다는 사실도 잊고 무작정 후퇴했다. 말이 좋아 후퇴지, 늑대 무리를 피해 도망가는 양떼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늑대들의 우두머리가 샛별에 앉아 느긋하게 명령했다.
“성을 점령해라. 돌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