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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25화 (225/605)

225화. 좋은 사람

225화. 좋은 사람

가파른 봄과 숨 막히는 여름이 지나 찬란한 가을이 찾아왔다. 바야흐로 풍요의 계절, 결실의 계절, 황금의 계절이었다.

노랗게 물든 추경지와 빨갛게 물든 북쪽 숲 사이로 바쁜 일손이 오갔다. 햇살을 머금은 밀과 귀리를 수확하고, 겨울을 날 장작을 옮겨오는 손길이었다.

로드릭 마을의 풍경은 작년과 다르고, 재작년과 또 달랐다.

흙벽에 짚단을 올린 나지막한 초가집은 거의 사라지고, 돌과 나무로 쌓은 2, 3층짜리 기와집이 자리했다. 광장 근처의 큰 집에는 침대, 맥주, 절구, 바늘 등이 그려진 간판이 다닥다닥 걸려있고, 짐말과 당나귀가 끄는 수레가 포장도로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떠나갔다. 외딴 농촌이 아니라 도시의 번화가 느낌이었다. 그러나 로드릭 마을의 근간은 누가 뭐래도 농사였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개울가에는 밀과 귀리를 수확하는 낫질이 한창이었다.

“오늘 중에 추수를 끝내야 해요! 아니면 방앗간을 이용하지 못해요!”

어느덧 로드릭 마을 주민이 다 된 리암 수사가 민머리를 쓱쓱 만지며 독려했다. 성스러운 재촉에 늙은 농부들은 투덜거리면서도 낫을 구부렸다.

로드릭 마을의 인구는 크게 늘었지만, 농사짓는 일손은 오히려 줄었다. 방앗간 장남 지미가 그러하듯 농사보다 장사하는 젊은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이삭줍기도 못하겠구만...”

“그거 주워봐야 얼마나 나온다고요?”

“에끼! 그걸 끓여서 모진 겨울을 열흘이나 더 버텼어!”

영주의 밭을 수확하고 나면 영주의 허락으로 낱알이 떨어진 이삭을 가져갈 수 있으니 이삭줍기라 불렀다.

“가만, 가만, 영주님은 지금 뭐하신당가?”

“지난밤에 돌아오셨다지요?”

“지금쯤이면 나오실 때가 됐는데...”

농부들은 낫을 지고 수레에 실으며 리암 수사를 힐끔힐끔 보았다.

고귀하고 존귀해서 손이 닿지 않는 영주님이지만, 그렇기에 항상 궁금한 영주님이었다. 외지에서 온 행상인과 시장 손님이 칭찬을 마다 않으니, 수대에 걸쳐 로드릭 가문을 섬겨온 로드릭 마을 영지민은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리암 수사는 거뭇거뭇 자란 수염을 만지고 호기심을 풀어주었다.

“영주님은 지금 바빠요.”

“어이구! 뭔 일이 있당까요?”

리암 수사는 어떻게 설명해야 저들이 존경하는 영주님의 위엄이 살아나질 고심했다.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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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울부짖었다.

“크아악! 갑옷값을 제값 다 주고! 홍보까지 해줬다고요? 크앗! 내가 못 살아!”

로벨은 목을 움츠리고 힘겹게 변명했다.

“홍보 아니야. 그냥 이름만 적어주고 왔어.”

“그게 그거죠! 게다가 가져간 1,000페닝을 몽땅 다 썼다고요? 어떻게? 그 큰돈을 어떻게 다 써요?”

“갑옷 수리하고, 대포 끌 수레랑 짐말 사고, 군것질도 좀 하고...”

“저 마녀의 빗도 사고요? 저건 왜 사줘요? 에이잇! 그거 당장 내놔요! 공금이야!”

하루 종일 상아 빗을 자랑하던 마녀 키르케는 자신에게 불똥이 튀자 냉큼 도망쳤다. 로벨에게 허리띠를 선물 받은 펄프 대장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너무 그러지 마. 다른 영주들은 더 큰 것도 막 사잖아.”

“다른 영주들은 숨 쉴 때마다 돈 잡아먹는 용병단을 안 쓰니까요!”

역시나 울프 용병단에게 불이 번졌다. 영지의 수익 중 절반이 울프 용병단에 쓰이니 한 푼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어린 집사는 전쟁이 끝났으니 울프 용병단을 100명 이하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로벨이 정색하고 반대했다.

“지금 울프 용병단을 해산하면 고스란히 구왕파에 갈 거야. 저만큼 훈련된 용병단을 어디서 구할 거야.”

어린 집사는 전쟁, 전술, 전투를 모르지만, 울프 용병단이 대단한 군사력이란 것은 알았다.

개개인의 무장수준과 실전경험은 말할 것도 없고, 기마대와 포병대까지 구성된 용병단이니, 볼탄 반도에서, 나아가 왕국 전체에서도 찾기 힘든 최정예 군대였다. 적으로 돌리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도 200명은 너무 많아요... 조금쯤 줄여도...”

로벨은 어린 집사의 제안에 딱 잘라 말했다.

“아니야. 오히려 늘릴 거야. 최소 300명으로.”

“머, 뭐라구요!”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멀찍이 도망치던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 핵심 멤버들도 귀를 의심했다.

“그럴 돈이 어디 있어요? 안 그래도 지금 소금광산과 식품공장 수익 전부를 저 식충이들이 잡아먹고 있는데요! 시장에서 빠듯하게 거래세, 통행세 걷어도 전투수당 주면 남는 것이 없고요! 지금 겨우 농사지은 거랑 갤리선 두 척으로 먹고 사는 거라고요!”

로벨은 기세에 눌려 찔끔했다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원래 그랬잖아? 달라진 게 없는데?”

“후작쯤 됐으면 좀 달라져야죠!”

어린 집사가 앓는 소리 하긴 하지만, 사실 300명의 영지민으로 땅 부치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었다.

영지 인구가 3배 가까이 늘어나 인두세도 크게 늘었다. 뉴 로드릭 마을의 논밭과 리암 수사의 맥주로 토지세와 거래세 또한 수십 배 늘어났다. 전쟁비용은 포로 몸값으로 해결하고도 남았으니, 울프 용병단을 운영해도 여유가 있었다. 다만, 여유자금을 모아 성벽을 짓고 포장도로를 확장하려다보니 아끼고 또 아낄 뿐이었다.

어린 집사는 자신의 장기적인 계획을 몰라주는 주인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로벨은 기사 흉내나 내는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프란시스 시티의 지부장이 재미난 이야기를 했어.”

“지부장? 마틴 루드요?”

“그 친구 이름이 마틴 루드야?”

“...이름도 모르고 만났어요?”

“아, 아니, 잠깐 까먹은 거야.”

로벨은 억울하단 표정을 3초 정도 지은 후 다시 말했다.

“마틴 지부장이 말하길, 철과 구리의 가격이 크게 오를 거래.”

어린 집사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로벨이나 마녀 키르케 그리 말하면 듣지 않았겠지만, 에릭 공작의 귀향과 프란시스 시티의 정세를 꿰뚫어 본 지부장이라면 분명 근거가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로벨은 지부장의 장엄한 설명을 한 줄로 요약했다.

“전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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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도, 에릭 공작도, 마틴 지부장도, 그리고 어린 집사도 3차 왕위계승전쟁을 직시했다. 야심 많은 볼프 후작과 정통성을 가진 도리아 왕이 이대로 포기할 리 없었다. 설령 두 사람이 포기해도 새로운 데이브 왕과 신왕파 영주들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직은 훗날의 일이다.

지금은 가을이고, 곧 겨울이 찾아온다. 생존 자체가 싸움인 계절에 전쟁은 어불성설이다. 신왕파든, 구왕파든, 양측 사이에서 이득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든 당장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에헤라! 에헤라!”

“부어! 부어! 더 부으라고!”

로드릭 마을 광장을 가득 메운 좌판이 치워지고, 커다란 모닥불이 피어났다.

로드릭 마을 토박이와 외지에서 온 정착민과 떠돌아다니는 행상인과 다른 영지에서 온 이방인이 모두 하나 되어 모닥불 주위를 돌았다. 헨리 피터 상회장이 고용한 유랑악단이 커다란 만돌린과 육중한 트럼펫으로 신나게 연주했지만, 웃고 떠드는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냥 뛰기가 심심한 소년은 물구나무서서 빙글빙글 돌았고, 남다른 주량이 자랑인 청년은 깔때기를 물고 맥주 석 잔을 들이부었다. 술보다 분위기에 취한 처녀들은 치맛자락을 좌우로 흔들며 춤을 추었다.

오늘은 포비아 왕국의 유서 깊은 축제이자 로드릭 마을의 하루뿐인 잔치인 가을 추수제였다.

“고기는 많아요! 술도 많고! 빵과 과일도 있으니까 마음껏 드세요! 거기 아저씨 토할 거면 저쪽으로 가!”

작년에도 이리 말한 것 같지만, 올해 추수제는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성대했다. 천 명이 넘는 사람이 광장과 골목을 가득가득 매워 웃음만으로 밤하늘을 흔들었다. 고기, 술, 음악, 커다란 모닥불, 그리고 젊은 총각과 아리따운 처녀가 한곳에 모였으니 조용할 수 없었다.

늑대성에서도 고기와 술을 내줬지만, 예년처럼 그리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로드릭 시장에 정착한 상인들, 특히 로드릭 상회 소속 상인이 로벨과 어린 집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앞다퉈 음식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꼬챙이에 꿰인 양과 돼지가 쉴 새 없이 불 위를 돌고, 토막 난 닭과 오리가 냄비에 넘치게 들어찼다. 리암 수사가 여름내 담근 맥주도 오래된 순으로 풀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두가 공짜란 것이다.

“우리 자비로운 영주님을 위하여! 건배!”

“위하여!”

“건배!”

몇 번째 건배인지 세는 것은 진작 포기했다.

로벨은 광장 북쪽에 마련된 야외 테이블에 어린 집사, 펄프 대장, 헨리 피터 상회장, 페리 피터 행정관, 리암 수사, 그람 형제 등과 함께 점잖게 술잔을 기울였다. 리암 수사는 마을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들썩했지만, 직위가 있어 차마 떠나지 못했다. 이곳은 로드릭 영지를 책임진 관리들의 자리였다.

찰드 촌장이 직접 담근 과일주를 안고 테이블 앞에 조아렸다.

“이처럼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영주님. 그리고 용병대장님, 상회장님, 행정관님, 수사님, 징수관님...”

“됐어. 됐어.”

로벨은 찰드 촌장이 가져온 과일주를 직접 받았다. 찰드 촌장은 환하게 웃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어서 숲지기와 숲지기 아들이 토끼 가죽과 사슴뿔을 진상했다.

“영지의 평화와 영지민의 안전을 위해 힘써주시는 영주님, 그리고 용병대장님, 상회장님, 행정관님...”

“됐다니까!”

그 외에도 이웃 영지에서 온 기사, 노스폴드 시장의 심부름꾼, 길드 아랫사람, 행상인 등이 차례로 진상품을 바쳤다. 지미와 루시의 3살 난 쌍둥이도 꽃다발을 바쳤다. 로벨은 젖살이 통통한 쌍둥이가 귀여워 10페닝짜리 금화를 꺼냈지만, 어린 집사의 도끼눈이 무서워 50로닝 은화를 하사했다.

“그만 받자. 술 마실 시간도 모자라잖아.”

로벨이 진상품을 물리자 어린 집사가 벌떡 일어나 광장에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오늘 못 가져온 진상품은 늑대성으로 보내세요! 아시겠어요? 늑대성이에요!”

억척스러운 늑대성의 귀재였다.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에게 양고기를 주고 엉덩이를 두드렸다. 고기에 취한 늑대 남매는 마을 처녀들과 팔짱 끼고 둥글게 둥글게 춤을 추는 마녀 키르케를 쫓아 뛰어갔다.

로벨이 술잔을 돌리고 일을 보라 허락하자 좀이 쑤시던 리암 수사와 아직 젊은 그람 형제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국에서 잉크 좀 먹은 페리 행정관도 젊은 처녀에게 이끌려 못 이기는 척 모닥불 쪽으로 떠났다. 로벨 주위에는 나이 든 용병대장과 상회장, 그리고 애어른 집사만 남았다.

헨리 피터 상회장이 평소와 달리 들뜬 얼굴로 아부했다.

“올해 추수제는 어느 해보다 대단합니다. 영주님의 보살핌으로 해가 갈수록 번화하니 실로 감격스럽습니다.”

“내 덕이 아니야. 어린 집사와 상회장, 그리고 펄프 대장 덕분이야.”

로벨은 괜히 머쓱해서 화제를 돌렸다.

“저번에 말한 것은 어떻게 되었어?”

마침 관련 인물만 남아 있었다. 어린 집사와 헨리 상회장이 나직이 속삭였다.

“노스폴드 시티와 거래하는 강철산과 붉은산의 상인을 통해 알아봤어요. 영주님 말씀대로 철과 구리의 가격이 오르고 있어요.”

“저희쪽에서도 최대한 확보하고 있습니다만, 저희 상회만으로 남쪽 시장을 안정시키기는 힘듭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루트를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그전에 우리 쪽에서 수익을 뽑아내고요.”

“철과 구리는 재생산이 가능해서 전시가 아니면 큰 수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전쟁 당사자입니다.”

로벨은 경제 쪽으로 심도가 깊어지자 군사 쪽으로 무게를 돌렸다.

“울프 용병단은?”

펄프 대장은 주름진 볼살을 긁적였다.

“쓸 만한 놈 구하기가 힘듭니다. 용감한 놈은 애저녁에 다 죽었고, 똑똑한 놈은 전쟁 직전에 몸값을 올립니다.”

“그래도 찾아봐. 정 안되면 검은 숲이나 포클랜드 출신도 괜찮아.”

어린 집사, 펄프 대장, 헨리 상회장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축제에 어울리지 않는 음험한 일당이 못마땅한 사람이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깡총깡총 뛰어서 야외 테이블로 다가왔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하세요? 오늘은 추수제잖아요! 그만 일어나세요! 기사님, 저랑 춤을 춰요! 어서 가요!”

로벨은 생기발랄한 마녀 모습에 조용히 미소 지었다.

“난 됐어. 그 대신 집사를 빌려줄게.”

“저, 저요?”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외쳤다. 마녀는 혀를 한번 차고 손을 내밀었다.

“꿩 대신 닭이지만, 오늘은 봐 드리죠. 갈까요, 꼬마 집사님?”

“누가 닭이에요! 누가 꼬마야!”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면서도 마녀 키르케와 함께 모닥불로 나아갔다. 헨리 상회장은 창고에 술과 음식을 살펴보겠노라 고한 후 자리를 떠났고, 펄프 대장은 애꾸눈과 외팔이의 부름을 받아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로벨은 홀로 남아 웃고 마시고 떠들고 다시 웃는 영지민을 구경했다.

좋은 축제고, 좋은 밤이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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