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요정
224화. 요정
요정은 덩치에 비해 목청이 좋았다.
“시끄러! 시끄러! 인간은 전부 똑같아! 하루만 지나면 마음이 바뀌잖아! 거짓말쟁이야! 너도 거짓말쟁이야!”
“...네 녀석이 제일 시끄러워.”
로벨은 벌새처럼 날아다니는 요정이 신기했다.
몸집이 손바닥만한 것만 빼면 인간과 똑같았다. 머리 하나, 팔 두 개, 다리 두 개를 가졌으며, 리넨으로 만든 튜닉을 걸쳤다. 요정이라 나뭇잎이 어울릴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잎사귀로 옷을 만들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어떻게 날아다니는 거지?’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요정의 등짝, 등짝을 보았다. 손톱만한 구멍을 내서 날개를 돌출시켰다. 잠자리처럼 영롱한 날개였다.
“주군,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원래 이곳에 사는 녀석이 아니라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이, 이, 잊어? 날 잊어? 날 잊었다고!”
“그런 뜻이 아니잖아. 주군께 소개하는 중이니까 얌전히 있어.”
로벨은 빼액! 빽! 소리치는 요정을 재미있게 보았다. 북쪽 숲에서 요정왕과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지금처럼 자세히 관찰할 수 없었다.
요정 역시 쇳덩이를 두른 로벨을 신기하게 보았다.
“이 인간이 ‘주군(Lord)’이란 사람이야?”
호른 경은 난감한 얼굴로 정정해주었다.
“주군은 이름이 아니라 호칭이야.”
그때, 간신히 정신 차린 허풍쟁이 제이콥과 흉내쟁이 퍼시발이 산통을 깨트렸다.
“우아악! 요정이잖아!”
“요정 맞아? 요정이야?”
두 사람 다 나잇값 못하는 표정과 말투였다.
로벨은 아랫사람을 대신해 호른 경에게 사과했다.
“요정과 친분이 있는 줄 몰랐소.”
“제 고향 자작나무 숲에서 데려왔습니다.”
마녀 키르케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떻게요? 요정은 태어난 곳을 못 떠나잖아요?”
요정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풀잎보다 작은 손가락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좀 아는 인간이 있네?”
“에헴! 제가 좀 잘 알죠!”
“내가 태어난 자작나무의 가지를 가져왔어. 하지만 시들기 전에 돌아가야 해. 여기는 너무 독해서 오래 못 머물러.”
아야와 이야카는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뽀로롱거리며 날아다니자 대뜸 입을 벌렸다. 하마터면 자작나무 숲의 신비로운 요정에서 호기심 많은 늑대 남매의 한 끼 식사가 될 뻔했다.
“저리가! 못생긴 털북숭이야! 저리 가라고!”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버럭! 화를 냈다.
“아니에요! 우리 애들 잘생겼어요! 우리 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늑대에요!”
“아닌데? 아닌데? 엄청 멍청하게 생겼는데? 멍청해! 멍청해! 베에에에-!”
요정은 기사에 이어서 마녀와 싸우기 시작했다. 로벨은 먼 바다에서도 겪지 않은 배멀미를 느꼈다. 과묵한 몬트가 ‘우리 마을에 늑대는 걔네뿐이오...’ 어쩌고 지적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호른 경은 고향 친구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소피, 그만해. 실례잖아.”
“시끄러! 거짓말쟁이!”
호른 경은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최후의 수단을 써야 할 듯했다.
“너! 약속했잖아! 약속! 평생 동안 자작나무 숲에서 지켜준다고! 그래놓고 주군인지 뭔지를 돕겠다고 구역질나는 이딴 곳으로...!”
“그만. 그만해.”
호른 경은 포댓자루를 휘둘러서 수다쟁이 요정을 잡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신속 정확했다. 소싯적에 잠자리를 많이 잡아본 듯했다.
수다쟁이 요정은 자루 속에서 주먹질, 발길질하며 항의했다. 꼭 살쾡이를 넣어둔 것 같았다. 애꾸눈 볼포스가 난감한 듯 외눈안대를 만지며 물었다.
“이름이 소피입니까? 여자 요정이군요.”
“웁! 웁웁! 우웁!”
수다쟁이 요정 대신 마녀가 대답했다.
“요정은 성별이 없어요.”
로벨은 예전에 마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인지의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니까?”
마녀는 기특한 제자를 보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맞아요. 요정은 고블린과 마찬가지로 우리 세계의 종족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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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과 이안 선장은 호른 경의 배려로 조금 이른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다.
배 위에서 맛없는 비스킷과 염장고기로 배를 채워온 육지 사람들은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스튜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화재 걱정 없이 환하게 밝힌 촛불과 잘 익은 와인까지 완벽했다. 수다쟁이 요정, 소피가 단단히 삐진 것만 빼면 말이다.
“정말 훌륭한 저녁이었소.”
“흥! 그렇겠지!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겠어?”
요정이 양갈비를 양손으로 잡고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요정이 고기를 먹어... 고기... 육식 요정...’ 따위를 중얼거렸지만, 집주인과 당사자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소피, 말조심해. 주군은 고귀하신 분이다.”
“고귀해? 왜? 너랑 똑같은 인간이잖아?”
“인간은 타고난 운명과 물려받은 혈통에 따라 신분이 정해진다. 주군은 옛 신의 가호를 받는 로드릭 가문의 적통이시니 나보다 훨씬 고귀하다.”
“음... 패티가 그렇다면 그렇겠지만... 앗! 흐룬팅이잖아?”
요정은 화제를 돌리려는 듯 로벨에게 날아갔다. 로벨은 흐룬팅의 손잡이가 잘 보이게 몸을 돌리고 말했다.
“요정왕의 선물이야.”
“요정왕? 요정왕 오벨론? 정말? 너 정말 고귀했구나?”
요정은 폼멜 위에 앉아 손잡이를 더듬었다. 그러다 반대쪽에 찬 칼자루로 시선을 옮겼다.
“앗! 호수의 검까지?”
요정은 뽀로롱 날아서 아론다이트 손잡이로 옮겨갔다. 로벨은 요정이 다칠까봐 양손을 머리 위로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요정은 덩치 큰 인간의 고충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와아아! 파나케아의 모자까지?”
로벨은 머리와 몸을 반대로 비틀다가 ‘윽!’ 하고 비명을 질렀다. 참다못한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를 휘둘러 요정을 포획했다.
“에이잇! 자작나무의 요정은 다 이런가요?”
호른 경은 살점이 붙은 양다리를 아야와 이야카에게 내주고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요정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신비한 힘을 다루는 마녀도,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닌 용병도 요정은 본 적은 없었다. 그때, 의외의 인물이 뜻밖의 사실을 고백했다.
“전 요정을 본 적 있습니다.”
새끼 양 한 마리가 사라질 동안 침묵하던 이안 선장의 고백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반색하고 되물었다.
“어디서요?”
“에르나 왕국에서 해ㅈ... 특수한 해양업에 종사할 때였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잉그비아 왕국의 화물을 잠시 맡아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저것과 같은 요정을 보았소.”
“에이, 윌 오 위스프 아니에요?”
“그것도 본 적 있으니 확실히 말할 수 있소. 아니오.”
이안 선장의 흉터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그러고 보니 성문 앞에서 요정을 보았을 때 이안 선장만 놀라지 않았다.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저것처럼 시끄럽진 않았소. 단순히 얌전하다기보다 아예 말을 못하는 것 같았소.”
이안 선장은 진지했지만, 로벨은 대수롭지 않고 생각했다.
“인간 중에도 벙어리가 있으니까. 요정 중에도 말 못하는 요정이 있겠지.”
마녀 키르케가 요동치는 고깔모자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면 이 요정이 이상한 요정이거나요.”
로벨은 요정을 풀어주라고 손짓했다. 마녀가 고깔모자 주둥이를 살며시 풀자 요정이 쏜살같이 튀어나와 마녀의 이마에 박치기를 날렸다. 콩-
기세만 보면 기사의 랜스 차치 버금가지만, 질량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마녀는 꿈쩍도 안하는데 요정만 튕겨나갔다.
“아야야...”
요정은 비틀비틀 거리다 식탁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입담만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이 정도로 용서해 주지! 하지만 자꾸 무례하게 굴면 가만 안 둘 거야!”
마녀는 이마를 쓱쓱- 만지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재미있는 요정이에요!”
호른 경을 제외한 호른 성의 모두가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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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경은 해가 저무니 하룻밤 자고 가라 권했지만, 로벨은 달이 밝고 길이 평탄하니 사뿐히 걷겠다고 말했다.
“그리 먼 길이 아니잖소. 자정 전에 도착할 거요.”
“허나,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내 마음은 편하니 걱정하지 마시오.”
로벨은 늑대성까지 따라가겠다는 호른 경을 억지로 떼어내고 대포 수레를 끄는 애꾸눈 볼포스, 과묵한 몬트에게 출발을 명령했다.
“히이럇! 이럇!”
소처럼 우직하고 나귀처럼 부지런한 짐말이 느릿느릿 '늑대도로'에 올랐다.
로벨의 수행원이 크게 줄었다.
도시로, 바다로 끌려다니던 도적 포로들은 푸른고래 호의 노잡이로 남겨졌다. 이안 선장은 3년간 일하면 풀어주겠노라 약속했다. 죽다가 살아난 도적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악착같이 버텨서 자유를 되찾는 방법뿐이었다.
바엘 마을에서 따라온 미망인 모자도 호른 성에 남았다. 호른 경의 하인과 하녀 중 상당수가 자작나무 숲 오두막에 남아 호른 성에서 일하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때그때 영지민을 시켜서 처리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상주하며 일해 줄 시녀와 시동이 필요했다. 미망인 모자도 크게 좋아했다. 무엇보다 기사의 시동이면 잘하면 종자가 되고, 나아가 기사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호른 경이 마음먹기 달렸으나 신분상승의 길이 열린 것이다.
“안녕! 안녕히 가세요!”
‘마구간 짐’에서 ‘시동 짐’이 된 꼬마가 로벨 일행을 향해 손 흔들었다. 돌고 돌아 정착하게 된 미망인은 눈물을 훔치며 은인을 배웅했다.
“잘 사쇼! 잘 살아!”
허풍쟁이 제이콥이 수레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나뉘었다.
요정은 슬퍼 보이는 오랜 지기 어깨에 앉아 귓가에 속삭였다.
“저 사람이구나?”
“...그래.”
호른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옛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사로서, 한 가문을 책임진 당주로서 말 못 할 고민이 가득했다.
요정은 한쪽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오랜 친구의 낯선 모습에 왠지 심통이 났다.
“그런데 너, 동성(同性)이 좋다고 하지 않았어?”
“...자랑할 일이 아니니 남한테 말하지 마.”
“흐으음? 그렇다 말이지?”
요정은 입을 가리고 엉큼하게 웃었다. 호른 경은 고향 친구가 장난치기 직전이란 것을 알았다.
“왜 그래?”
요정은 뽀로롱- 뽀롱- 소리 내며 반대쪽 어깨로 날아갔다. 그리고 친구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네 주군이란 인간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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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스타는 오랜만에 땅을 밟게 되어 몹시 행복했다. 도시의 지저분한 오물바닥과 갤리선의 흔들리는 나무바닥은 갈기와 발굽을 타고난 초원의 종족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푸릉-! 푸르릉-!”
로벨은 콧노래 비슷한 것을 부르는 모닝스타를 쓰다듬고 몸을 뒤로 기울였다.
똑같은 볼탄 반도라도 고향의 냄새는 달랐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도,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도, 이름 모를 빨간 과일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로벨이 안장 위에서 손을 뻗어 과일을 하나 딸 때였다.
“저 미망인 아줌마를 좋아했죠?”
“어억? 억? 억!”
마녀 키르케가 진짜 마녀처럼 깔깔 웃었다. 우울한 얼굴의 허풍쟁이가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다. 인간사의 관심 없는 짐말이 항의할 정도로 거친 동작이었다.
“어, 어떻게?”
“흐흐흣... 제가 바로 사랑과 우정의 마녀 키르케니까요!”
“...그 컨셉 아직 안 버렸소?”
로벨은 용감하게 과일을 한 입 깨물고 마녀와 허풍쟁이를 구경했다. 세상풍파를 불친절하게 겪은 용병의 삶에도 순정이 남아 있었다.
“조, 좋아한 게 아니요. 그냥 어릴 때 헤어진 누가 생각난 거지.”
“기억이 빛을 바래면 추억이 되고, 추억이 되돌아오면 사랑이 되는 법!”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주워오는 거요?”
“히히힛! 뒷부분은 방금 지었어요. 아무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세요! 미망인이면 어떻고, 옆 마을에 살면 어때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100배 나아요!”
허풍쟁이는 힘없이 마부석에 앉아 괜한 채찍을 구부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리고 내가 아니어도 약삭빠른 여자라 잘살 것이오. 내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말이오.”
로벨은 허풍쟁이의 뒷말을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다.
“컹! 컹! 컹컹!”
아야와 이야카가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갔다. 달빛을 이기지 못해 꾸벅꾸벅 졸던 흉내쟁이가 번뜻 정신 차리고 깃대를 곧추 세웠다. 창끝이 은하수에 닿고, 깃발이 별을 따라 흘러 언덕 위의 외로운 성에 닿았다.
로벨은 씨앗만 남은 과일을 길가에 버리고 활짝 웃었다.
“저기 봐. 늑대성이야.”
계절을 숨 가쁘게 넘어가는 어느 늦은 밤, 로벨 로드릭이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