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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23화 (223/605)

223화. 호른 성

223화. 호른 성

에릭 공작이 선언한 대로 해가 뜨면 열광적인 시합이, 해가 지면 열정적인 파티가 3일 동안 지속되었다.

로드릭 상회가 준비한 고급 식자재는 축제 이틀 만에 바닥이 나서 사흘째는 인근 농장에서 화급히 공수해야 했다. 추가적인 비용이 나갔지만, 그럼에도 어느 상회보다 큰 수익을 올렸다.

그 외 이변이라면 우승 후보 중 하나인 호른 경이 돌연 기권했다는 것이다. 에릭 공작과 여러 귀부인이 못내 아쉬워했으나 호른 경은 시합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대신 귀빈석에 올라와 로벨의 곁을 지켰다.

“어째서?”

로벨의 의문에 호른 경은 짧게 대답했다.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셨습니다.”

그런 것치고 얼굴이 너무 좋았다. 로벨은 거짓말이라 생각했지만 호른 경의 뜻을 존중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올해의 프란시스 시티 챔피언은 노스우드 가문의 삼남이 되었다. 그러나 영광된 몰골은 아니었다.

마상창으로 승부를 내지 못해 치열한 도보전을 치러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헬름이 찌그러지고 갑옷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본인은 기뻐했지만, 챔피언의 위엄은 많이 떨어졌다.

에릭 공작은 금화자루와 고급 말안장을 하사했으나 작위를 내리거나 봉토를 수여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챔피언을 축하하는 마지막 연회가 끝나고, 또다시 아침 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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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장미성이 자랑하는 장미 정원을 가로질러 프란시스 시티가 내려다보이는 첨탑을 올랐다. 첨탑을 지키는 장미성 용병은 아침 댓바람부터 싸돌아다니는 기사를 이상하게 여겼지만 감히 제지하지 않았다. 공작 나리도 껌벅 죽는 위대한 챔피언이었다.

로벨은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 탑 꼭대기에 도달했다. 시야가 트이며 온 세상이 발아래로 굽어보였다.

인어의 바다에서 불쑥 솟아난 태양이 강렬한 빛으로 지상을 덮었다. 외항에 정박한 수십, 수백 척의 갤리선이 해수면에 기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새벽 내 소동을 피우다 간신히 잠이 든 도시가 간지러운 듯 꿈틀거렸다.

붉은 기와 사이로 빵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골목골목으로 배고픈 개와 사나운 수탉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부지런한 새들은 밤을 꼬박 새운 취객 주위를 기웃거리며 빵 부스러기와 과일 껍질을 쪼아 먹었다. 그러다 기운 넘치는 거리 아이들이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쫓아오자 홰를 치며 날아올랐다. 여명이 밝아오는 파란 하늘에 새들이 점점이 그려졌다.

“좋은 아침이야.”

“그렇군요.”

로벨의 뒤로 무장을 갖춘 기사가 따라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끌어내리며 돌아보았다. 호른 경이 하품을 참으며 탑을 올라왔다. 아성의 홀에서부터 로벨을 따라온 듯했다. 로벨은 태양을 등지고 난간에 기대섰다.

“경은 피곤하지도 않소?”

“주군을 호위하기로 했으니 이 정도는 참아야지요.”

“나에게는 예리한 칼과 용맹한 병사와 사나운 늑대가 있소.”

“...앞에 두 개는 몰라도 마지막은 동의하기 힘들군요.”

호른 경은 장미정원을 가리켰다. 아야와 이야카가 연회장에서 슬쩍해 온 뼈다귀를 파묻으며 행복해하고 있었다. 꼴에 늑대라고 하울링 하는데, 술 취한 개가 기분이 좋아 흥얼거리는 수준이었다.

“저래 봬도 야생 늑대요.”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를 변호한 후 외면했다.

호른 경은 로벨 곁으로 다가가 프란시스 시티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늑대성으로 출발하십니까?”

로벨은 조금 고민한 후 대답했다.

“그럴 생각이오.”

호른 경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외눈박이 용병에게 들으니 대포와 노잡이 노예와 미망인 모자를 데리고 간다지요?”

“그렇소.”

“갤리선을 한 척 빌려서 로드릭 항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드릭 항은 옛 아만다 항으로, 로벨이 호른 경에게 수여한 영지였다.

“로드릭 항에서 늑대성까지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으니, 대포를 옮기기에도 수월할 겁니다.”

로벨은 또 배를 타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생각해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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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새것 같은 필드 아머를 꼼꼼히 갖춰 입고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인 시장을 지나 선착장으로 향했다. 완전해진 갑옷 때문인지, 화창한 날씨 때문인지 악취 나는 거리에도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좋은 날에는 좋은 일이 있기 마련이다.

로벨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로, 로벨 후작님?”

“으아닛! 선주님이다!”

로벨은 부두 앞에서 우뚝 멈췄다.

로벨을 지칭하는 호칭은 다양한데, 그중 ‘선주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사람은 한 부류였다. 푸른고래 호와 청새치 호의 선원들이다.

로벨은 웃통을 벗고 시커먼 피부와 깡마른 근육을 자랑하는 선원들을 보았다. 낯이 익은 선원도 있고, 처음 보는 선원도 있었다. 그것은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분이 선주님이야?”

“쉿! 조용해!”

로벨은 두 눈을 깜박이다가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이해했다.

“이안 선장이 이곳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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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선장은 흔들리는 선실에서도 능숙하게 술병을 따고 술잔을 채웠다.

“이 계절에는 먼 남쪽 바다에서 태풍이 올라옵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심할 때는 인어의 바다를 통째로 뒤집어엎을 정도입니다.”

로벨은 푸른고래 호 선장실을 위아래로 유심히 보았다. 율리아 유리우스 호 선장실에 비하면 아무래도 작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인어의 바다 전체를 그려놓은 큰 해도와 각 지역별로 해안선을 그려놓은 작은 해도, 나침반과 망원경과 육분의 등의 항해도구, 무기 진열대와 밧줄로 꽁꽁 묶어놓은 술병 진열대, 그리고 바닷사람답지 않은 곰가죽과 늑대박제가 신기했다.

‘아야랑 이야카가 보면 무서워하겠다.’

로벨은 엉뚱한 생각을 잠깐 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럼 귀항할 거야?”

전직 바텐더, 전전직 해적두목이란 기이한 이력을 가진 흉터투성이 사내가 푸른고래 호 주인 앞에 술잔을 놓았다.

“로드릭 항으로 돌아가 가을 추수가 끝날 때까지 머물 예정입니다. 봄과 여름의 전쟁으로 곡물 가격이 많이 올랐을 테니 잉여작물을 포클랜드 지방으로 가져가면 좋을 듯합니다.”

“그, 그래?”

“늑대성의 집사와 상의 후 결정하겠지만, 아마도 그리할 것 같습니다.”

어린 집사가 있었으면 수확량이 어떻고 운송비가 어떻고 시세변동이 어떻고 1시간 동안 떠들었겠지만, 로벨은 ‘그렇구나’ 이외에 할 말이 없었다.

“로드릭 항으로 돌아간단 말이지?”

호른 경의 제안 직후 이안 선장과 만난 것이 운명 같았다.

“사람 12명하고 말 5마리하고 대포 2문을 추가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호른 성을 방문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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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마녀 키르케, 아야와 이야카,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을 불러모아 푸른고래 호에 승선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숙취로 고생하는 에릭 공작을 찾아가 작별인사했다.

“경이 와서 참으로 즐거웠소. 영지에 일이 많겠지만 그래도 종종 놀러 오시오. 경이 아니면 누구를 믿고 내 가문과 내 땅을 지키겠소?”

로벨은 정중히 그리하겠노라 대답했다. 어린 집사가 지시한 ‘에릭 공작과 친해지기’ 퀘스트를 완수한 느낌이었다.

기왕 대도시에 나온 김에 몇 가지 물건을 구매했다. 어린 집사에게 선물할 와인, 펄프 대장에게 선물할 고래힘줄, 외팔이 더치에게 선물할 손도끼 등등. 그것으로 여행 경비가 딱 떨어졌다. 로벨은 텅 빈 지갑을 모닝스타 안장주머니에 쑤셔 넣고 홀가분하게 선착장으로 향했다.

“기사님! 기사님! 어서 와요!”

“기사 나리! 이쪽입니다요!”

마녀 키르케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푸른고래 호 갑판에서 손을 흔들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고삐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점점 멀어지는 장미성과 프란시스 시장을 돌아보았다.

‘도시도 아주 나쁘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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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선장은 노련한 선장이었다.

바람과 해류를 읽는 솜씨와 선원과 노잡이를 다루는 솜씨가 모두 나무랄 곳이 없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취미인 호른 경이 한나절 만에 감탄할 정도였다.

“저런 선장을 어디서 구했습니까?”

“...해적을 때려잡고 구했소.”

두 사람이 말하는 ‘구함’이 다른 뜻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안 선장이 걱정과 달리 바다는 조용했다. 북방해류에 올라타기 위해 바다 먼 곳으로 나왔지만 바람이 온화하고 파도가 잔잔해서 아주 편안했다.

로벨은 율리아 유리우스 호에서처럼 선실을 독차지하고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칼날을 닦고, 갑옷을 손질하고, 물동이를 들었다 놓는 훈련을 반복했다. 이안 선장이 로벨이 선장의 직위와 명령권을 존중하기 위해 두문불출한다 여기고 감동했다.

“정말 좋은 선주를 만났지.”

“저런 나으리니까 볼탄 반도 최고의 기사가 된 것 아니겠소?”

직위가 높고 명성이 높으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찬양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땡! 땡! 땡! 땡!

출항 사흘째 되는 날, 아야와 이야카 또래의 어린 선원이 메인마스트에 걸린 종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로벨은 젖은 수건으로 얼굴과 목을 닦고 창가로 다가갔다. 까마귀 둥지에 올라간 감시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보고했다.

“12시 로드릭 항-! 12시 로드릭 항-!”

로벨은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이름에 미소 지었다. 호른 경의 의견을 받아 개명하길 잘한 듯했다.

“집에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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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항에는 먼저 온 상선과 십수 척의 어선이 있었지만, 푸른고래 호의 입항을 늦추지는 못했다. 푸른고래 호 메인마스트에 걸린 로드릭 깃발이 로드릭 마을과 로드릭 항구의 주인, 로벨 로드릭의 개인 상선임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어어? 영주님이다!”

“우리 영주님?”

“우리 영주님하고 진짜 영주님이야!”

푸른고래 호가 정박하자 선착장의 인부와 마을주민이 깜짝 놀랐다. 영지의 주인과 그 주인의 주인이 차례로 내리고, 고깔모자 마녀, 송아지만한 늑대, 우락부락한 용병이 등장하자 정신을 못 차렸다.

호른 경은 친분이 있는 영지민을 호명해서 짧게 명령했다.

“성으로 가서 전해라. 주군이 오셨으니 성대하게 맞이할 것이다.”

호른 성이 그동안 많이 변하였다.

로드릭 항을 찾는 상인이 많아진 만큼 항만세도 늘어났다. 호른 경은 수익으로 낡은 성을 증축하고 피폐한 마을을 정비했다. 가난한 어촌에 그럴싸한 여관이 생기고, 선원과 인부를 상대하는 술집도 생겼다. 뉴 로드릭 마을에서 맥주를 직통으로 공급받아 선원 사이에서 아주 호평이었다.

로벨은 모건 아만다 남작 몰래 성을 점령한 일과 주드 멕켈런 남작과 1대 1로 결투를 벌인 일을 회상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로벨의 안색을 살피던 호른 경은 로벨이 웃자 덩달아 웃었다.

“주군의 도움으로 성벽과 안뜰을 새로 단장했습니다. 성 안에는 100명의 군사가 100일간 농성할 식량과 무기가 있습니다.”

“정말 수고가 많았소.”

“그리고 조촐하지만 저녁식사에 초대하고자...”

“야!”

호른 경의 말을 뚝 잘라먹는 소리가 있었다. 군주와 기사의 대화에 끼어드는 간 큰 자가 있다니. 애꾸눈의 하나뿐인 눈이 주먹만큼 커지고 허풍쟁이 턱이 한 뼘 가량 주저앉았다.

“...야?”

로벨이 어떨 결에 반문했다. 성인이 된 이후로 듣지 못한 호칭이었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이게 전쟁이니 뭐니 싸움질만 하더니! 또 정신 못 차리고...!”

그러나 다행히 로벨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다행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호통치는 상대가 사람 주먹보다 조금 큰 이인족(異人種)이기 때문이었다.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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