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꽃
222화. 꽃
토너먼트는 기사의 축제이자 출세의 기회였다.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기 힘든 가난한 기사와 영지를 물려받지 못한 차남 이하의 이름뿐인 기사가 단숨에 출세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지역에 따라 검술, 궁술, 레슬링 등을 겨루기도 하지만, 그런 종목은 인기가 없어 무명을 떨치기 좋지 않았다. 토너먼트의 꽃은 누가 뭐라 해도 마상시합이었다. 심지어 마상시합만 치르는 토너먼트도 흔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 로벨 로드릭 후작, 하버트 페르젠 백작까지 참관하다니...’
‘그중 한 명 눈에 띄기만 하면...!’
이번 마상시합에 참가한 기사들은 어느 때보다 열정을 보였다. 오랜만에 개최된 토너먼트이기도 하지만, 주최자와 참관자의 직위가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잘만 하면 상금뿐만 아니라 작위와 봉토도 수여 받을 수 있었다.
에릭 공작은 가장 높은 관중석에서 퍼레이드를 펼치는 기사들을 굽어보았다. 멋들어진 갑옷에 휘황찬란한 장식을 한 기사들이 에릭 공작과 여러 귀부인에게 예를 표시하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며 시민들의 환호에 화답했다.
에릭 공작은 바이저를 올리고 목례하는 기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로벨에게 말했다.
“로벨 경이 볼 때 누가 우승할 것 같은가?”
로벨은 팔걸이에 팔을 얹고 턱을 괴었다. 곧은 자세라 할 수 없지만 그랜드 챔피언의 자신감을 보이기 좋았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싸워보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다?”
페르젠 백작은 자신의 기사들에게 격려를 보내다가 로벨의 거만한 자세에 심통이 난 듯 따라 앉았다.
“그야 물론이지! 분명히 말하는데, 다시 붙으면 절대 지지 않을 것이오!”
로벨은 고개를 돌려 젊은 페르젠 백작을 보았다. 두 가지 의문이 맴돌았다. 하나는 언제 붙은 적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저자가 정말 호크 경을 시켜 자신을 공격했는가 하는 것이다.
“왜? 뭐요? 그리 보면 무, 무서울 줄 아시오?”
전자는 모르겠지만, 후자의 경우 확실히 아니었다.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은 흉계를 꾸밀 만큼 음흉하지 못했다.
‘역시 봉신 중 하나인가?’
페르젠 백작의 봉신 중 로드릭 영지와 관련이 있는 자를 추리면 용의자를 찾을 수 있을 듯했다.
로벨이 바엘 경과 호크 경 이야기를 할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하자 무슨 오해를 하는지 페르젠 백작의 얼굴에 핏기가 줄어들며 살금살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지금 싸우자는 것은 아니고... 자리가 안 좋잖소? 그러니 눈에 힘 좀 푸시오!”
로벨은 상념에서 깨어나 앞을 보았다. 어느덧 퍼레이드가 끝나고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첫 시합인 만큼 실력과 명성이 있는 기사가 등장했다. 로벨이 깜짝 놀랄 정도의 기사였다.
“북방에서 찾아온 강철의 기사! 숲 속의 고고한 요정 기사! 무적무패의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후작의 제일 가는 기사! 주군을 위해 칼을, 사랑을 위해 꽃을 바치는 낭만의 기사! 패트릭 호른 경!”
로벨은 상체를 일으키고 경기에 참가한 기사를 살폈다. 익숙한 투구, 익숙한 갑옷이었다.
“호른 경이?”
로벨의 기사라고 토너먼트에 참가 못 할 이유가 없다. 로벨의 봉신, 혹은 봉신의 봉신 중에 오늘 참가한 기사가 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른 경만큼은 의외였다. 호른 경은 성과 마을을 가졌고, 명예와 명성이 충분했다. 그리고 욕심이 많지 않았다. 최근 5, 6년 동안 토너먼트에 출전하지 않았으며 로벨에게 충성맹세하기 전까지 수많은 제안에도 주군을 섬기지 않았다.
광대가 목을 가다듬고 호른 경의 상대를 소개했다.
“거인의 피가 흐르는 괴력의 기사! 그의 창은 갑옷을 꿰뚫고, 그의 철퇴는 바위를 깨부순다! 살아 있는 공포! 숨 쉬는 재앙! 호크 가문의 장자! 글렌 호크 경!”
이번 기사도 익숙했다. 특히 가문이 익숙했다.
“최선을 다해 싸워라! 가문의 명예를 높여라!”
에릭 공작이 호탕한 웃음과 묵직한 박수로 시합을 축복했다. 그러나 로벨은 충직한 기사와 악연의 기사를 앞에 두고 웃을 수 없었다.
‘에릭 공작의 말이 맞아. 시합에 나갔으면 큰일 날 뻔 했어.’
주군과 시합하게 된 기사는 대개 기권한다. 이겨도 문제, 져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로벨은 예전의 시골 기사가 아니라 시합에 출전하면 불평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하나 더, 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그 외 적대적인 가문이 어찌 행동할지 알 수 없다. 뭉툭한 버드나세로 치르는 시합이라도 위험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Fight!”
호른 경과 호크 경의 마상시합은 박빙이었다. 1차전에서는 호른 경이, 2차전에서는 호크 경이 각각 점수를 냈다. 약간의 편파성이 있다면, 호른 경의 버드나세가 부러졌을 때는 함성이, 호크 경의 버드나세가 부러졌을 때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처녀들의 비명이 대단했다. 젊고 잘생긴데다 미혼이기까지 한 호른 경의 인기는 과거 로벨과 견줄 정도였다.
와아아아-! 와아아-!
3차전에서 호른 경이 점수를 내어 3대 2로 첫 시합이 끝났다. 깔끔한 역전승이었다. 마상시합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관객들이 모자를 흔들며 패트릭 호른의 이름을 열창했다. 에릭 공작도 분위기를 끌어올린 로드릭 가문의 기사를 극찬했다.
“경의 기사도 대단하군.”
호른 경은 시합장을 한 바퀴 돌아 로벨 앞에 멈췄다. 그리고 헬름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정중히 묵례했다.
“나의 주군께 첫 승리를 바칩니다.”
로벨은 머뭇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호른 경의 승리를 축하했다.
“경의 무용이 나와 나의 가문을 빛나게 해주었소.”
“끼야아아-! 꺄아-!”
“어떡해! 어떡해!”
시합을 치를 때보다 더 큰 환호성이 나왔다. 주로 젊은 여자들이었다. 주군과 기사가 모두 빼어난 미남이라 흡사 기사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호른 경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로벨은 작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 앉았다.
‘보통 레이디에게 승리를 바치지 않나?’
로벨은 문득 불안을 느꼈다. 호른 경이 뭘 알고 저러는 건지, 모르고 저지른 건지 궁금해졌다.
@
첫째 날 토너먼트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시합장의 열기는 고스란히 장미성으로 옮겨져 술과 고기로 타올랐다. 승리한 기사에게는 축하주가, 패배한 기사에게는 위로주가 쏟아졌다.
귀부인들은 높이 올린 애냉(Hennin:원뿔 모양 여성 모자)을 쓰고 낯에 눈여겨본 기사를 찾아가 속 보이는 칭찬을 늘어놓았다.
챔피언이 되는 것만큼이나 챔피언의 경의를 받는 것이 영광이었으니, 자신의 챔피언이 되어 달라는 유혹이었다.
“자작나무 숲은 아주아주 아름답다지요?”
“오호호! 부인, 언제 적 이야기인가요? 로벨 후작님에게 봉토를 하사받은 지가 언제인데요.”
“어쩜! 어쩜! 늠름하기도 하셔라! 내일도 분명 승리하실 거예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조각 같은 미남인 호른 경의 인기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로벨은 귀부인에게 둘러싸인 호른 경을 안쓰럽게 지켜보았다. 로벨도 자주 당해서 저 심정을 잘 알았다.
‘아닌가? 호른 경은 남자라서 다르나?’
로벨을 잘 아는 사람들은 로벨이 성(性)에 대해 자각하는 것을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이 부족한 탓인지 원초적인 수준에서 끝났다.
‘그래도 싫어하네? 아하! 귀부인은 누구나 싫어하는구나!’
로벨은 자신이 정상이란 것에 만족했다. 호른 경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쏘아 보내는 다른 기사를 보지 못한 탓이다.
“소문이 정말 사실이오?”
“그런데 그자는 정녕...”
레이디와 무용담보다 정치와 정세에 관심이 많은 몇몇 기사들이 숙덕였다. 로벨은 우플랑드의 펑퍼짐한 소매를 짧게 줄이고 정치 무리에 슬그머니 섞여들었다.
“누구 말이오?”
“그야 당연히 헤르만 백작이... 오옷?”
기사들은 한 박자 늦게 로벨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기사 작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기사들이라 로벨 같은 ‘거물’이 어려웠다.
“로벨 로드릭 후작! 어, 언제 오셨쇼?”
“조금 전에. 그보다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해보시오.”
기사들은 곤란한 듯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똑같은 ‘노블레스’라도 공, 후, 백작과 아무 직위도 없는 가난한 기사 사이에는 크나큰 벽이 있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 앞에서 대영주를 욕하기가 쉽지 않았다. 로벨은 그런 기사들을 거들어주었다.
“그 간사한 몰드 헤르만 백작 이야기가 아니오?”
로벨이 대놓고 비하하자 기사들의 피식- 피시식- 웃었다. 저번 전쟁 이후로 헤르만 백작의 명예가 많이 떨어졌다.
“그렇소. 그 간사하고 간악한 자가 참전을 거부한 것도 모자라 승전축하연회에도 불참하지 않았소.”
“그 의도가 심히 의심되오. 전(前) 헤르만 백작의 일도 있지 않소.”
로벨도 일부 긍정했다. 페르젠 백작의 정체 모를 봉신뿐만 헤르만 백작의 세력 또한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볼프 후작과 옛 왕, 그리고 잉그비아 왕국으로 망명한 류트 공자도.’
말을 꺼내고 보니까 사방이 적이었다. 로벨의 아군은 에릭 공작, 제임스 공작, 그리고 새로운 왕인데, 셋 다 자기 코가 석 자라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에릭 윌리엄 폰 프란시스 공작님이 입장하십니다!”
에릭 공작의 시동이 낭랑한 목소리로 호스트의 등장을 알렸다. 기사와 귀부인은 잡담을 멈추고 연회의 주인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잠시 뒤, 의상에 한껏 힘을 준 에릭 공작이 메인 홀 상석에 올라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모두들 즐기고 계시오?”
에릭 공작의 봉신은 목례로 대답하고, 외지에서 온 기사들은 술잔을 들어 화답했다.
“참으로 즐겁소이다!”
“과연 프란시스 가문의 연회요!”
에릭 공작은 손을 들어 진정시키고 다시 말했다.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겠소.”
에릭 공작의 착잡한 말에 성미 급한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에릭 공작은 두 팔을 벌리고 돌연 환하게 웃었다.
“이제 첫날이니 쉬엄쉬엄 달리시오! 내일은 더욱 거창하게, 모레는 더욱 성대하게 즐겨야 하니 첫날에 쓰러지면 안 되잖소? 하하핫!”
“과연! 과연 프란시스 공작이오!”
“에릭 프란시스 공작 만세!”
“우리의 왕과 프란시스 가문을 위하여!”
로벨은 술잔을 살짝 들어 호응하고 슬그머니 내렸다.
흥이 오른 기사들은 본격적으로 술을 퍼붓기 시작했다. 버릇이 나쁜 일부는 시녀와 하녀에게 추파를 던졌다. 일부는 눈이 맞아 성내 으슥한 곳으로 사라졌지만, 대부분은 모진 퇴짜를 맞았다. 그러나 화내거나 실망하는 기사는 없었다. 그것이 기사답고 남자다운 모습이었다. 웃고, 떠들고, 마시고, 싸우다가, 다시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하얗게 발라진 뼈다귀가 수북이 쌓이고, 주인 잃은 술잔이 굴러다닐 무렵, 몸을 가눌 수 있는 기사가 다섯이 남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야.”
그중 한 사람이 로벨이었다. 술 취하면 챙겨줄 어린 집사가 없으니 가능한 자제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쯤 기둥을 골라잡고 신세한탄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래서 평소와 똑같은 연회잖습니까?”
또 한 사람은 호른 경이었다. 꽤 많은 술잔을 기울였는데 신기하게 취한 기색이 없었다.
로벨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경이 올 줄은 몰랐소.”
“실은 열하루 전에 출발했습니다. 늑대성의 집사에게 소식을 듣고 곧장 따라왔지요.”
“그런데 왜 이리 늦었소?”
“페르젠 시티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어 확인하느라 늦었습니다.”
로벨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혹시 호크 경 일이오?”
“호크 경? 그게 누굽니까?”
“오늘 낮에 싸운... 아니오. 나도 잘 모르오.”
호른 경은 첫 시합 첫 승리에도 관심이 없었다. 시합 중 한 판을 내준 것은 관객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그럼 무슨 소식이오?”
호른 경은 테이블에 자빠진 에릭 공작과 공작을 챙기는 수행기사를 한번 살피고 속삭였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지금 호수성에 있다고 합니다.”
로벨은 조금 전에 생각한 인물이 거론되자 깜짝 놀랐다.
“류트 공자가? 말도 안 되오!”
“제가 직접 확인하고 왔습니다.”
로벨의 걱정이, 그리고 기사들의 의심이 적중했다. 헤르만 백작이 제2의 랭스터 백작이 되려 하고 있었다. 사트로 가문의 지원까지 후계자 전쟁 때와 똑같았다.
로벨은 기절한 에릭 공작과 술주정하는 기사들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저렇게 웃고 떠들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준비를... 전쟁 준비를...”
“지금 당장 군사를 일으키지는 않을 겁니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견제해야겠지만, 당장은 호수성을 적으로 돌릴 상황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지. 아직 전쟁의 피로를 풀지 못했으니까.”
로벨은 중얼거리다가 새롭게 깨달았다.
“그러데 류트 공자 소식과 토너먼트 출전이 무슨 상관이오? 그 소식을 전할 거면 그냥 장미성으로 찾아와도 되지 않았소?”
로벨의 지적에 호른 경이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그, 시합 때 말씀드렸다시피, 주군께, 그러니까 영광을..”.
로벨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 명예가 부족하지도 않은데 그럴 필요 없소. 오늘 만난 레이디 중 한 명에게 바치는 것이 어떻소? 그리하면 경의 가문에도 꽃이 필지 누가 아오?”
로벨의 조언에 호른 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전쟁 때도 본 적 없는 안쓰러운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