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21화 (221/605)

221화. 상회

221화. 상회

로벨은 지부장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붉은 산’은 하인즈 가문을 의미하는데, ‘배신’은 아무래도 모르겠다.

“애초에 우리 편도 아니었는데?”

“그러나 사트로 가문의 편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후작님이 사고를 쳐서입니다.”

로벨은 끝내 신음을 참지 못하고 흐룬팅의 칼자루를 쥐었다.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지만, 그 버릇을 알지 못하는 지부장은 심장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슨 사고?”

“사, 사고가 아니라, 그냥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무, 물론 의도한 것이 아니겠지만... 하인즈 자작의 중매를 거절하고, 그의 기사까지 모욕하지 않았습니까?”

“고작 그런 일로?”

“더불어 볼프 사트로 후작의 입김도 있을 겁니다. 볼프 후작은 영악한 자라 기회와 명분을 놓치지 않을 겁니다. 십중팔구 붉은 산을 끌어들일 겁니다. 올가을부터 제재를 시작하면 내년 봄에 성과가 나타날 겁니다. 철과 구리는 전략물자인 만큼 피해가 막대하지요.”

“그래서 철과 구리의 가격이 오를 것이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무장을 다 갖춘 용병을 고용해서 광물의 중요성을 간과하지요. 하지만 직접 용병단을 이끄는 후작님은 아시겠지요? 철의 공급이 끊기면 고용할 용병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요.”

놀랍게도, 로벨 로드릭 후작님께서는 알지 못했다.

“그, 그런 거야?”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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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돌아왔다.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제후이자 왕국의 실권을 장악한 최고 권력자. 한때 정통성을 의심받아 몰락했지만,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작금에 이르렀다. 그 배후에는 볼탄 반도 최고의 기사, 나아가 포비아 왕국 최강의 기사 로벨 로드릭 후작이 있었다.

“흐으음- 드디어 도착했군!”

에릭 공작은 거대한 오베리아 갤리선에서 위풍당당하게 내려 고향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솔직히 말해 좋은 공기는 아니었다. 생선 썩은 냄새와 시큼한 냄새가 지독했다.

그러나 에릭 윌리엄 폰 ‘프란시스’ 공작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고향을 사랑했다. 그리고 고향 사람 또한 사랑했다.

“마로드,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릭 공작은 마중 나온 사람 중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오호? 로벨 경? 경이 이곳에 어인 일이오?”

예상치 못한 상대이나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로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갑옷을 수리하러 왔습니다.”

에릭 공작은 기분이 좋아 재미없는 진담을 재미난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그거 중요한 용무지! 아주 중요해! 하하핫! 아무튼 잘 왔소. 안 그래도 지난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경들을 불러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려고 했소.”

어린 집사와 지부장의 예상이 바로 적중했다. 로벨이 목례로 화답하자 에릭 공작은 로벨의 어깨를 두드리고 새하얀 말에 올랐다. 기사와 용병, 그리고 시민이 귀환한 공작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제 됐을까?”

로벨은 어린 집사가 시킨 일을 떠올려보았다. 아직 부족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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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에릭 공작과 친하게 지내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벨이 소심하거나 에릭 공작이 홀대해서가 아니라, 근 1년 만에 귀환한 군주는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로벨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집사장이 일을 안 하나?’

집사가 해야 할 일을 대단히 폭넓게 여기고 있었다.

그래도 에릭 공작은 신뢰할 수 있는 친구이자 제일 가는 우방을 최대한 배려했다. 아침마다 갓 구운 빵과 신선한 우유를 보내주고, 저녁식사에 초대해 사슴 고기와 포도주를 대접했다. 로벨은 옛날 옛적 어린 집사가 한 말을 떠올랐다.

‘프란시스 공작님은 일 년 내내 구운 고기만 먹는다는데...’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는 것은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에릭 공작은 사슴 뒷다리를 큼직하게 썰어서 하인을 통해 전달했다.

“왜 그리 웃나?”

추억에 젖어 웃음이 새어 나온 모양이다. 로벨은 고기와 나이프를 받으며 말했다.

“고향 친구를 생각했습니다.”

“고향 친구?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지.”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고기를 길게 찢어 입에 넣었다. 무슨 향신료를 썼는지 쌉싸름하면서 매콤한 것이 맛이 좋았다. 에릭 공작이 껄껄 웃었다.

“그렇지! 그렇게 먹어야지! 나 원 참. 포클랜드의 귀족들은 어디서 이상한 것을 배워서 귀한 음식을 삼지창으로 마구 찍어 먹더군. 정말 미개하고 야만적이라...”

“삼지창?”

“아, 진짜 창은 아니야. 가만있자, 길이가 이만한데, 칼로 썰어서 푹푹 찔러 먹네. 상상이 되는가?”

“...희한한 작자들이군요.”

로벨은 식탁에서까지 병장기를 쓰고 싶은가 생각하며 고기를 큼직하게 찢어 발아래에 놓았다. 침을 뚝뚝 흘리던 아야와 이야카가 번개같이 달려와 낚아챘다. 에릭 공작은 뭐가 재미있는지 식탁을 쾅쾅 두드리며 좋아했다.

“자네 늑대도 많이 컸군! 하핫! 처음 보았을 때는 내 팔뚝만 했는데.”

그거보단 좀 컸겠지만, 굳이 따지지 않았다.

에릭 공작의 수행기사가 뼈다귀로 이야카를 놀리다가 정수리를 물리고, 그걸 보며 깔깔 웃던 동료 기사가 아야에게 종아리를 물려서 기사 대 늑대의 레슬링이 벌어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저녁식사였다.

에릭 공작은 먹고 남은 음식을 하인들에게 내주고 느긋하게 유리잔을 기울였다.

장미성에 거주하는 여러 기사가 모였지만, 유리잔을 사용하는 것은 에릭 공작과 로벨 뿐이었다. 로벨을 자신과 동급으로 대우한다는 뜻이지만, 로벨은 약하디약한 유리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할 뿐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여하튼, 늑대성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 사치였다.

“내 집사가 승전축하연회를 준비 중일세. 시기가 늦은 만큼 성대하게 할 생각이야. 낮에는 마상시합을 열고, 밤에는 술판을 벌여서 사흘 밤낮으로 놀고 먹고 마실까 하네. 경의 생각은 어떤가?”

“마상시합이라면...?”

로벨의 눈덩이가 올라갔다. 에릭 공작이 재빨리 제지했다.

“자넨 안 되네. 자네를 위한 자리이기도 한데 자네가 시합에 나가면 기사들이 불편하지 않겠나? 그리고 젊은 기사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언제까지 챔피언 자리를 독식할 생각인가?”

‘나도 아직 젊은데...’ 로벨은 중얼거리다가 문뜩 깨달았다. 로벨은 23살이지만, ‘진짜 로벨’은 27살이었다. 기사로서 전성기지만, 이제 막 서임식을 치른 어린 기사와 꿈 많은 기사 종자에게는 까마득한 항렬이었다. 그랜드 토너먼트를 두 번이나 치렀으니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흘렀다.

에릭 공작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 그랜드 토너먼트는 검은 숲의 소동으로 흐지부지 끝났지. 안타까운 일이야. 경이 2연속 챔피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시합은 치르기 전에 알 수 없는 겁니다.”

“겸손이 지나치군. 이 왕국에서 누가 경과 겨루겠나?”

로벨은 깡통 어쩌고 떠들던 해적이 떠올라 그만 웃었다. 에릭 공작은 로벨의 청량한 웃음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럼 그리 알고 있게나. 페르젠 백작과 맥기 남작이 오면 바로 연회를 시작할 거야.

로벨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이름 하나가 빠진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에릭 공작은 헤르만 백작을 거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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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성의 잔치는 프란시스 시티의 잔치였다. 음식과 술뿐만 아니라 의상, 장식, 식기, 하다못해 메인 홀을 밝힐 양초와 요강까지 모두 새로 들이는 만큼 막대한 금과 은이 시장에 풀렸다.

호황을 누리는 것은 시장 상인만이 아니었다. 마상시합장을 정비하는 목수, 공연을 준비하는 광대, 일확천금을 꿈꾸는 젊은 기사, 편자와 갑옷을 손봐줄 대장장이, 경기자금을 융통해주는 사채업자, 술상인, 창녀, 소매치기 등등으로 도시 전체가 떠들썩했다.

로드릭 상회는 로벨 로드릭 백작이란 연줄로 연회에 쓰일 식자재를 독점 공급했다. 가격을 깎을 바에 칼을 휘두르는 기사 가문의 자존심이 독으로 작용했다. 기존 상인은 눈치껏 적정가격으로 납품했지만, 로벨의 후광을 등에 업은 로드릭 상회는 최고가를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로써 프란시스 시티 지부장은 로드릭 상회 소속 상인 중 최고 수익을 올리게 된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가 바쁜 시간, 로벨은 이상하리만큼 한가했다.

성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을 챙길 필요도 없고, 시합에 안 나가지 않아 장비를 챙길 필요도 없었다. 장미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3층 테라스에 앉아 장미수도회에서 만들었다는 와인을 홀짝이며 새하얀 발로 아야와 이야카를 골려주는 것이 오늘 일과였다.

“그냥 있어도 될까요?”

마녀 키르케가 와인 도자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직이 물었다.

로벨은 정원을 짓밟으며 몰려다니는 기사들과 울상이 되어 모자챙을 씹어 먹는 정원사를 감상하며 대꾸했다.

“주인이 있는데 객이 나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연회가 시작할 때까지 소란 피우지 않는 게 내가 할 일이야.”

“그거 말고요.”

로벨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그게 아니면 뭐야?’라고 묻기에 앞서 술잔을 내줘야 했다. 마녀 키르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조금만 마셔. 저번처럼 취해서 괴ㅅ... 노래 부르지 말고.”

“이히힛! 알았어요!”

로벨은 군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허풍쟁이 등에게도 한잔씩 하라고 허락한 후 앞으로 돌아갔다.

“무슨 뜻이야?”

“노래 가사요?

“...그냥 있어도 되냐는 거.”

마녀 키르케는 적당히 마시라는 충고를 벌써 잊어버린 듯 단숨에 잔을 비우고 조그맣게 트림했다. 로벨은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거요. 그거. 페르젠 백작님이요.”

“그자가 왜?”

“기사님을 싫어하잖아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의자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지미와 루시 부부가 결혼세 대신 진상한 의자보다 훨씬 편했다.

“페르젠 백작이 아니야. 그 아랫사람이지.”

“그렇다고 안전한 것은 아니잖아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안전할 거야. 나는 몰라도, 주군의 주군인 에릭 공작은 껄끄러울 테니까.”

페르젠 가문의 기사에게 로벨은 그냥 옆 동네 주인이지만, 에릭 공작은 달랐다. 에르나 왕국이나 네일 공국으로 망명할 생각이 아닌 이상 절대 거역해서 안 된다. 마녀 키르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나 더!”

그리고 흉내쟁이를 지나 과묵한 몬트에게 간 술병을 빼앗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과묵한 몬트는 성격 탓에 화를 내지 못하고 인상만 찌푸렸다.

마녀 키르케는 술잔을 가득 채운 후 헤프게 웃었다. ‘하나 더’가 술병을 말한 게 아닐까 의심할 때 이어서 말했다.

“호수성 백작님이 있어요.”

로벨의 고운 미간도 찌푸려졌다. 몰드 헤르만 백작은 볼프 후작이 남하했을 때 수수방관했다. 그것을 충성서약 위반이라 할 수는 없지만, 괘씸한 것은 분명했다.

“에릭 공작님은 호수성 백작님을 초대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이런 경우 연회일보다 먼저 찾아와 금화 자루를 바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비로운 주군이라면 초대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 말하고 변함없는 자신의 기사로 대할 것이다. 자비가 부족해서 냉대할 수도 있지만, 그건 다른 문제였다.

몰드 헤르만 백작은 연회가 코앞에 이를 때까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있었다.

‘그 기회주의자가 무슨 생각이지? 정말 배신할 생각이야?’

로벨은 고개를 숙이고 상념에 잠겼다. 프란시스 시티의 장인이 공들여 깎은 의자가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로벨이 무거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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