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20화 (220/605)

220화. 공방

220화. 공방

장미성의 집사장은 사나흘 뒤에 오신다고 했지만, 포클랜드의 정세와 바다의 날씨를 알 수 없으니 그저 예상이었다. 어쩌면 오늘밤에 올 수도 있고, 어쩌면 추수제가 끝난 뒤에 올 수도 있었다.

로벨은 기약 없는 기다림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첫날 바로 필드 아머를 만든 갑옷 장인을 찾아갔다.

“와아! 여기가 공방인가요?”

“호오? 쓸 만한 게 많구만!”

로벨의 신변보호를 핑계로 재미를 찾아 나온 마녀 키르케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연신 감탄했다. 100여 개의 대장간이 체스판처럼 늘어서서 투탕투탕! 쇳소리를 내었다. 100명의 대장장이와 100명의 도제가 화로를 달구고 망치를 휘두르니 그 열기가 굉장했다.

“그냥 대장간하고 뭐가 달라요?”

“글쎄? 자세히 봐봐.”

마녀 키르케는 뒷짐 지고 대장간을 기웃거렸다. 까칠한 대장장이는 인상을 찌푸리고, 여드름이 막 자란 어린 도제는 얼굴을 붉혔으나, 고급 필드 아머를 두른 기사와 험상궂은 용병이 일행임을 알아채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는 남부끄럽지 않은 관찰력으로 갑옷 공방의 정체를 알아냈다.

“앗! 전부 다른 것을 만드는군요?”

“응. 잘 봤어.”

한 사람이 하나의 물건만 제작했다. 대머리 대장장이는 브레스트 플레이트만 두드리고, 염소수염 대장장이는 뱀브레이스만 구부렸다. 세부적으로 보면 컨틀렛의 엄지손가락만 만드는 대장장이, 사타구니에 덧댈 사슬만 만드는 대장장이, 헬름의 구멍만 뚫는 대장장이 등등 다양했다. 그들 모두가 작업을 마치면 갑옷 한 벌이 나오는 구조였다.

“이러니 기사의 갑옷이 비쌀 수밖에...”

로벨이 만날 사람은 갑옷의 크기와 모양을 정해 세부적인 지시를 내리는 대장장이의 대장, 하이 마스터였다.

“어어엇! 로벨 로드릭 후작님?”

로벨이 찾아오자 안면이 익은 갑옷 장인이 당황했다. 로벨은 왜 저리 놀라나 의아해하다가 책상에 펼쳐진 광고지를 보고 납득했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후작이 공인한 왕국 최고의 갑옷 공방?”

“으하하... 하하... 일단 앉으시지요. 이봐! 밖에 아무나 차를 가져와! 뭐? 당연히 동방차지! 귀하신 분이 안 보이냐!”

로벨은 품위 있는 젠틀맨이 아니라 교양을 뽐내는 티타임을 가지지 않았다. 허풍쟁이에게 눈짓해서 가져온 것을 보이도록 했다.

“수리해줘.”

주 고객인 기사와 용병대장인 갑옷 장인도 젠틀맨은 아니었다. 꾸겨지고 찢어진 폴드런을 살피고 대뜸 혀를 찼다.

“이건 뭐, 어디서 대포라도 맞으셨습니까? 이게 이렇게 망가질 물건이 아닌데...”

로벨은 늑대의 왕이 휘두르는 츠바이핸더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포 비슷한 거.”

“아, 진짜였습니까? 그래도 후작님이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갑옷의 목적은 주인을 지키는 것이니 제 역할을 다 한 것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갑옷 장인은 폴드런에 이어서 스커트까지 살핀 후 말했다.

“이거 수리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냥 새로 만드시죠.”

로벨이 곤란해 하자 허풍쟁이가 대뜸 따졌다.

“이보쇼! 괜히 수작 부리는 거 아니오? 그냥 땜질 좀 하면 되겠구만!”

“땜질? 이게 무슨 양철냄비인 줄 아시오? 땜질이라고? 에라이! 사람 잡은 일 있나! 그런 누더기를 어디다 쓰나!”

로벨도 갑옷 장인 생각에 동의했다.

“후작님, 제게 갑옷 설계도가 있으니 사흘만 시간을 주시면 새것을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제작 비용이 걱정일 뿐이었다.

“그럼, 그 뭐야, 얼마를 줘야 해...?”

갑옷 장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허영심 많은 기사가, 그것도 볼탄 반도에서 손꼽히는 기사가 갑옷 대금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곧 어린 집사를 떠올리고 이해했다.

“녹여서 쓰면 재료비가 거의 나가지 않으니, 300페닝만 주십시오.”

로벨은 생각보다 값싼 비용에 활짝 웃었다. 허나 공방을 이끄는 대장인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었다. 책상 가득히 쌓인 광고지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그 대신에, 송구스럽지만 이 광고지에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의심 많은 촌동네 기사 양반들이 통 믿어주지를 않아서... 스무 장만, 아니, 바쁘시면 열 장만 해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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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기분이 무척 좋았다. 프란시스 시티에 무사히 도착해서 갑옷을 값싸게 수리했다. 여유 자금이 남아 청동대포와 미망인 모자를 늑대성으로 보낼 수 있다. 어린 집사가 알면 함박웃음을 지을 것이다.

로벨이 기분 좋으니 마녀 키르케도 기분이 좋았다.

“이제 뭐 하면 되나요?”

로벨은 웃음을 웃음으로 회답했다.

“로드릭 상회 프란시스 지부로 갈 거야.”

“거긴 왜요?”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돌아오면 큰 연회가 열릴 거야. 그때 사용할 식자재를 살펴야 해.”

로벨은 어린 집사가 시킨 일을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허풍쟁이가 무심코 속마음을 꺼냈다.

“기사 나리가 가봐야 아무...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로벨이 도끼눈을 뜨자 허풍쟁이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마녀 키르케가 까르륵- 웃었다.

“어디에 있나요?”

“시장 외곽에 있어.”

시장이란 단어에 마녀와 용병이 좋아했다. 로벨과 달리 두 사람은 북적이고 반짝이고 냄새나는 시장을 좋아했다. 로벨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마녀 키르케 모습에 그리 내키지 않는 제안을 꺼냈다.

“뭐 좀 먹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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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는 온갖 물건과 온갖 사람이 다 있었다.

로벨의 팔뚝만한 빵을 자랑하며 저쪽 빵집보다 크고 맛있다고 외치는 제빵사, 오크통에 앉아 다리 사이로 맥주를 따라주는 술장수, 시큰둥한 얼굴로 가죽뭉치에 못질하는 구두장수, 커다란 개로 우유 수레를 끌며 호객행위 하는 목장 아가씨, 저울과 돋보기로 금화와 은화를 감별하는 감별사까지 정말 다양했다.

“페닝을 감별해요?”

“금과 은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니까. 테두리를 교묘하게 깎아 내거나 불순물을 섞어서 다시 만드는 경우가 있나 봐.”

“그런 못된 사람이 있군요!”

마녀 키르케가 엄지손톱만한 10페닝 금화를 꺼내서 유심히 관찰했다. 저 금화가 마녀의 전 재산일 것이다.

‘급료를 너무 적게 주나?’

로벨은 늑대성에 돌아가면 진지하게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로벨은 여유자금으로 이것저것 사들였다. 코끼리 상아로 만든 빗을 마녀 머리에 꽂아 주고, 세공이 멋진 다용도 단검을 허풍쟁이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꿀에 절인 사과를 하나씩 나눠 먹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모이고, 돈이 모인 곳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 가게 앞에서 장사하지 말라고 삿대질하는 주인장과 가격을 흥정하다 뜻대로 안 되자 멱살잡이를 벌이는 용병은 흔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소란도 로벨을 괴롭히지 못했다.

장갑 한 짝만 팔아도 1년 치 가게 수익이 나올 필드 아머와 오우거도 발골할 것 같은 3피트짜리 롱소드를 보고 시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도 로벨이 지나가면 아무 일 없는 양 딴청을 피우기도 했다. 그리고 로벨이 사라지면 분노에 수치심을 더해서 멱살을 틀어쥐었다.

“왜 저럴까요?

“프란시스 가문의 기사 나리니까. 밉보이면 장사 못 하지.”

에릭 공작의 봉신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로벨 일행이 찾아가는 곳은 소상인과 행상인이 장사하는 시장거리가 아니라 외곽에 치우친 상회거리였다.

어느 도시에나 물자를 조달하고 가격을 책정하는 상인조합이 있었다. 프란시스 시티처럼 큰 도시에는 여러 지방과 여러 분야의 상인조합이 존재했다. 아이란드 왕국 상인들로 이루어진 남해 상회, 포클랜드 지방의 곡물을 운송하는 동부 상회, 고기와 가죽을 취급하는 목축 상회 등등이었다. 로드릭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인 조합, 로드릭 상회도 그중 하나였다.

마녀 키르케는 로드릭 상회의 프란시스 지부를 보고 진심으로 감탄했다.

“애걔?”

로벨 로드릭과 헨리 피터 상회장의 이름이 걸린 사무소는 실로 아담했다. 포목점과 정육점 사이에 여백 같은 장소였다. 실제로도 책상 2개와 의자 4개를 배치하니 꽉 차서 허풍쟁이 제이콥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지부장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라 그렇지요. 로드릭 시장에서 보내온 상품은 부두창고에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로벨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지부장을 유심히 보았다. 페리 피터 행정관이 소개한 포클랜드 대학 출신 회계사로 나이에 비해 수완이 좋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동안 보내온 보고서만 봐도 어설픈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에릭 공작이 귀향할 거란 네 예상이 맞았어.”

지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왕국의 정세를 읽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죠.”

“어린 집사가 칭찬을 많이 했어.”

“오! 그거 영광이군요! 늑대성의 귀재가 칭찬까지 해주다니요? 하하!”

“귀재?”

로벨 이하 늑대성 식구들은 어린 집사의 평판에 생소함을 느꼈다. 시골 영지를 몇 년 만에 볼탄 반도에서 손꼽히는 번화가로 만들었으니 객관적으로 귀재라 불릴 만했다.

무식한 기사와 무지한 농민은 로벨 로드릭의 업적으로 알지만, 세상 보는 눈이 트인 장사꾼은 말 위에서 꼬챙이나 휘두르는 기사가 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았다.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그리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준비 중이야?”

“상반기 예산이 넘지 않게 준비 중입니다. 송아지 2마리, 새끼 돼지 9마리, 거위 15마리, 계란 220개, 하이랜드 치즈 66파운드, 로드릭 마을 맥주 180갤런, 델 포니 산 포도주 30병하고 추가로...”

로벨은 늑대성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수량에 깜짝 놀랐다.

“장미성에서 안 받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럴 일은 없습니다.”

지부장이 진지한 얼굴로 확신했다.

“왜?”

“우리 로드릭 상회는 로벨 로드릭 후작님의 후원을 받으니까요. 장미성의 집사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다른 곳과 거래하지 못합니다.”

“...그래?”

“그리고 가격과 품질을 잘 맞췄습니다. 최고급 재료를 미리 선점했으니 다른 상회에서는 이만한 재료를 구하지 못할 겁니다.”

로벨은 지부장이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지부장에게 부족한 것은 자금과 연줄뿐, 재능만 보면 홀로 상단을 운영할 만했다. 지부장은 넓은 이마를 한번 훔치고 말했다.

“여기 장부가 있으니 지출 내역을 확인하실 수 있...”

“그건 됐어.”

로벨은 고대 숫자가 빼곡한 종이뭉치를 보고 진저리쳤다. 지부장은 그럴 거라 예상했는지 바로 집어넣었다.

“가축은 성문 밖 농가에 맡겨 뒀고, 가공식품과 주류는 선착장 7번 창고에 보관 중입니다. 어류와 생고기는 상할 우려가 있어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확인하시겠습니까?”

“천천히 둘러볼게.”

지부장은 구두 보고를 끝내고 한결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로벨이 치하의 말을 하기 위해 단어를 조합할 때,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기왕 말이 나와 말씀드리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철과 구리를 비축해두었으면 합니다.”

“철? 구리? 왜?”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돌아온 것은 단순히 가을 추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죠.”

“봉신을 소집할 거라고?”

“아뇨. 아닙니다. 이 계절에 소집령을 내리면 영주들의 반발이 거세지요. 그건 내년 봄에나 할 것이고...”

지부장은 내년에도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로벨은 긴 신음을 짧은 한숨으로 감추었다.

“그럼?”

“구왕파가 패배하긴 했으나, 아직 근거지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으니 전쟁은 반드시 일어납니다. 다만 시기가 문제죠.”

로벨은 지부장의 예견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광물은 왜?”

“붉은 산이 배신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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