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신빙성
219화. 신빙성
로벨이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하자 초 단위로 생명이 꺼져갔다.
해적들은 육지의 형제들이 왜 ‘기사’ 앞에서 기를 못 펴는지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늦은 깨우침이었다. 해적은 해적선에서 쫓겨나 율리아 유리우스 호로 도망쳤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가 몽둥이와 손도끼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다.
“하아... 하아... 후우... 흡...!”
로벨은 두 자루 칼뿐만 아니라 컨틀렛과 카우터까지 피를 묻혔다. 칼질이 여의치 않으면 주먹으로 때리고 팔꿈치로 찍었기 때문이다.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무쇠 갑옷은 충분히 흉기라 할 만했다. 주먹질에 얼굴이 뭉개지고 팔꿈치에 정수리가 깨진 해적이 몸소 증명해주었다.
‘남은 적은...?’
로벨은 고개를 숙인 채 파나케아의 힘으로 도망치는 해적을 확인했다.
바다에 빠진 해적은 애꾸눈과 허풍쟁이의 과녁이 되었고, 율리아 유리우스 호 선창에 숨어든 해적은 아야와 이야카에게 물어 뜯겼다. 마녀 키르케도 떡갈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며 해적을 쫓아냈는데, 굳이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바닷바람에 잔뼈가 굵은 선장이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소리쳤다. 해적은 본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형이었다. 그 때문에 패색이 짙어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련한 선장은 해적의 생각을 읽고 살려주겠다는 말로 전의를 꺾었다. 수세에 밀린 해적들은 선장의 회유에 쉽게 넘어갔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무기를 버렸다.
로벨은 피범벅이 된 해적선 갑판에서 모든 광경을 보았다.
“ 해적이 항복했다! 우리가 이겼다!”
“이 자식들아! 무릎 꿇어! 무릎 꿇으라고!”
“기사 나으리 만세! 기사 나으리 만세!”
율리아 유리우스 호의 피해도 작지 않았다. 9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그중 최소 3명은 중상이라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내 탓이야.’
로벨은 선원과 용병의 환호 속에서도 침울했다. 파나케아 투구는 놀라운 힘만큼이나 커다란 죄책감을 주었다. 죽어가는 사람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하나하나 지켜보는 것이 편할 리 없었다. 이번 전투는 더욱 그러했다.
‘나를 노리고 쫓아온 거야.’
로벨은 일반 해적과 달리 고급스러운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기사를 쳐다보았다. 로벨처럼 파츠를 여럿 떼어냈는데, 남은 부분으로도 명망 높은 가문의 기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페르젠 백작의 지시일까?’
로벨은 철부지 같은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을 떠올렸다. 성질이 급하고 시기심이 많지만 이런 지저분한 음모를 꾸몄을 것 같지 않았다. 페르젠 백작의 봉신 중 누군가가 꾸민 짓 같았다.
“어린 집사의 말이 맞아. 의심과 질투를 조심해야 해.”
@
해적선을 나포했지만 슬프게도 소득이 없었다. 해적선 선창에는 최소한의 식량과 간단한 무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선장실에서도 은화 약간과 금화 부스러기를 찾았을 뿐 값어치 나가는 것은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코를 훌쩍이며 발을 굴렸다.
“가장 돈 되는 것은 해적선 자체군요.”
청동대포 2문. 노잡이 노예 46명. 연식이 오래되긴 했지만 아직 쓸 만한 전함이었다.
그러나 사소한 문제가 있었으니, 해적선의 소유권이 율리아 유리우스 호 선주‘들’에게 있었다. 이만한 상선의 투자자가 한 사람일 리 없으니 전리품을 쪼개고 쪼개서 나누면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받을 것은 돛대 반 개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어디까지 법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죠?”
예로부터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다. 로벨이 닥치고 내놓으라 하면 힘없는 선장은 얌전히 내줄 수밖에 없다. 인어의 바다 남쪽의 얼굴도 모르는 선주들이 볼탄 반도의 대영주에게 따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 짓은 못 해.”
“역시 그렇겠죠?”
로벨을 잘 아는 울프 용병단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래도 피 튀기며 싸운 몫은 챙겨야지 않습니까요. 그래서 말인뎁쇼...”
포기를 모르는 허풍쟁이가 은밀히 제안했다. 로벨이 유일하게 욕심내는 분야이기도 했다.
@
아이란드 왕국의 무역선 율리아 유리우스 호는 우여곡절 끝에 프란시스 시티 항구에 도착했다.
출항할 때는 한 척이었지만, 입항할 때는 두 척이 되었다. 그러나 선원은 오히려 줄어서 멀리서 보면 유령선처럼 보였다.
“세일 호-! 세일 호-!”
소리 없이 미끄러져 오는 율리아 유리우스 호와 해적선을 본 외항 선원들이 소란을 피웠다. 선장과 항해사까지 뛰쳐나와 고블린 같은 얼굴로 경계했다.
그때 율리아 유리우스 호 갑판 위로 반짝반짝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망망대해에서 망상을 키워 온 몇몇 선원이 ‘귀신이다!’, ‘유령이다!’ 외치며 성물을 꺼냈다. 하지만 세월을 지혜로 가꿔온 고참 선원은 품위 있게 소란을 잠재웠다.
“이 멍청아! 갑옷이잖아!”
타이밍 좋게 율리아 유리우스 호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력이 부족해서 굼뜰 뿐 평범한 상선이었다. 별일 아님을 깨달은 고참 선원은 괜히 소란을 피운 신참 선원을 한대씩 쥐어박고 투덜거리며 선실로 내려갔다. 그러나 안목이 좋은 노(老)선원은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 기사와 해골기 대신 백기가 걸린 해적선을 유심히 보았다.
“해적선을 나포했나?”
변변한 무장이 없는 상선이 대포까지 탑재한 해적선을 상대로 이길 리 없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십중팔구 뱃머리에서 무게 잡는 저 쇳덩이의 업적일 것이다.
“굉장한 기사 양반이 찾아온 모양이군.”
세월과 바꿔 먹은 지혜는 깊이가 있었다. 지혜로운 선원은 육지에 불어닥칠 풍파를 직감했다.
@
이름보다 보이(boy)란 호칭에 익숙한 견습선원이 쭈뼛쭈뼛하며 하선하라 전해왔다.
“내 부하들은?”
“짐을 내리고 있어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울프 용병단을 찾아갔다. 과묵한 몬트가 전투마와 짐말을 달래며 갑판 아래로 내려보냈다. 좁고 미끄러운 갱 웨이로 유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성질 더러운 모닝스타가 자꾸 발길질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흉내쟁이 퍼시발도 수레를 내리고 짐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골치 썩는 것은 애꾸눈 볼포스였다.
“이걸 가져가신다고?”
“그렇소.”
“허허,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진심이오.”
애꾸눈 볼포스는 부두관리인을 잡아와 힘 좋은 인부와 기중기를 준비시켰다.
부두관리인은 프란시스 가문의 사람이었으니,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제일가는 기사 로벨 로드릭 백작 명령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 점에서 아이란드 왕국 출신 선장보다 다루기가 편했다. 율리아 유리우스 호 선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가져가면 난 고용주에게 뭐라고 합니까?”
“내 고용주가 아니었으면 애당초 아무 말도 못 전했을 거요.”
“그거야 그렇지만...”
“정 못마땅하면 늑대성으로 와서 항의하라 하시오. 그럴 배짱이 있다면 말이오.”
로벨은 선장과 입씨름하면서도 꿋꿋하게 팔코넷 2문을 끄집어내는 애꾸눈을 대견하게 보았다. 마녀 키르케가 슬그머니 다가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히힛! 어린 집사가 좋아하겠죠?”
“음... 싫어할지도 몰라.”
대포가 늘어나며 포탄과 화약이 많이 필요하니 싫어할 가능성이 높았다.
로벨은 컨틀렛을 벗고 허리에 찬 금화주머니를 풀었다. 대포를 옮기려면 사람과 우마가 많이 필요했다. 생각보다 지출이 많았다.
‘갑옷 수리할 돈은 남겨야 하는데...’
어린 집사의 걱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돈 들어오는 곳은 거의 없는데 나가는 곳은 참 많았다.
“기사 나리! 준비가 끝났습니다!”
로벨은 뱃전에서 부두를 보았다. 아야와 이야카, 모닝스타와 ‘조랑말’, 울프 용병단, 시골 미망인과 어린아이, 노잡이가 될 포로, 대포 2문과 대포를 옮길 수레와 짐말까지 부쩍 늘어났다. 이번 여정은 참으로 다사다난하다.
“그럼 난 갈게.”
“예, 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천만에. 내가 고맙지.”
항복한 해적들을 심문한 결과 로벨을 노린 것이 확실해졌다. 호크 경이라 불리는 기사가 사주한 것이라 입을 모아 자백하였다. 그 호크 경은 아쉽게도 전투가 끝나고 출혈로 사망했다.
로벨은 일행을 이끌고 장미성으로 향했다. 늑대성 식구뿐이면 속 편하게 여관에 머물겠지만, 여자와 아이와 포로가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우아와! 우와앗!”
‘마구간’ 짐이 장미성의 장미정원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엘 남작의 초라한 시골 성이나 먼발치에서 훔쳐 본 파도성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계절이 계절이라 꽃잎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시골 소년의 눈에는 별천지였다.
“에헤헴! 한 달만 일찍 왔으면 장미성의 진면목을 봤을 텐데요. 아쉽네요.”
마녀 키르케가 꼬마 앞에서 아는 척, 잘난 척을 늘어놓았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가 처음 장미성에 왔을 때 모습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올챙이 적 생각은...”
“앗! 저쪽이 공작님이 머무는 아성이죠! 지금은 수도에 가셔서 없어요! 아, 수도에 가보셨어요? 난 가봤는데! 이히히힛!”
마구간에서 태어나 ‘마구간’ 짐이라 불려온 시골 꼬마는 신비로운 마녀 키르케를 존경스럽게 우러러보았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어린 집사의 예상대로면 이번 달이 차기 전이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이곳에 머물자.”
어린 집사가 여기 있었으면 남의 성, 그것도 로벨의 주군인 에릭 공작의 성이니까 사고 치지 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아무 곳에서나 볼일 보지 말고! 여자한테 집적거리지 말고! 술 먹고 시비 걸지 말고! 으아아! 그냥 숨을 쉬지 마아앗!’
오랫동안 반복된 학습효과인지, 이상하게 어린 집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대로 해.”
“어이구, 조심하겠습니다요.”
로벨만 환청을 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점잖은 애꾸눈부터 촐랑거리는 허풍쟁이까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도적과 미망인은 어리둥절해서 늑대성 식구들을 쳐다보았다.
한편, 늑대성의 백작 겸 포클랜드의 후작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장미성의 집사장이 헐레벌떡 마중 나왔다. 애꾸눈 볼포스는 새삼 로벨의 직위가 달라졌음을 실감했다. 보잘것없는 세습 기사 시절과 취급이 달랐다.
“로벨 로드릭 백작님? 기별도 없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로벨은 뱃멀미가 남아있는 모닝스타에서 내려 집사장을 상대했다.
“주군을 찾아뵙는데 이유가 필요하오?”
“공작님께서는 아직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돌아오시겠지. 아니오?”
집사장은 머뭇거리다가 긍정했다. 사흘 전 에릭 공작이 편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이자는 어찌 알고?’
에릭 공작의 충복은 로벨의 정보망을 얕잡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나흘 내로 도착하실 겁니다.”
“그때까지 신세 좀 져도 되겠소?”
“그야 어렵지 않지만, 저 사람들 모두 말입니까?”
집사장은 로벨의 수행원을 떨떠름하게 보았다. 용병과 하녀는 이해하겠는데, 거지꼴의 시골 아낙과 코흘리개 꼬마와 배를 뒤집고 구르는 늑대와 수레에 실린 대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상상력이 필요했다. 로벨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내 친구들이오.”
집사장의 표정이 괴기해졌다. 허풍쟁이가 세간에서 떠들고 다니는 ‘괴팍한 성격’이 점점 신빙성을 얻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