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18화 (218/605)

218화. 해전

218화. 해전

“잘한 선택은 무슨...”

로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숨을 도로 삼켰다. 지금 상황에서 한숨을 쉬는 것은 겁먹은 승객과 전투경험이 부족한 선원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크로스보우 시위를 너트에 걸며 물었다.

“기사 나리, 이제 어쩝니까요?”

“글쎄... 기다려 보자.”

로벨 일행이 탑승한 율리아 유리우스 호가 위기에 처했다. 해안에서 떨어져 남방해류를 타자마자 ‘졸리 로저’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 숨 좀 돌리나 싶었던 노잡이들은 한층 거세진 채찍질에 이를 부득부득 갈며 피와 땀을 짜냈다. 그러나 사람도 화물도 많은 중형 갤리선이 최소한의 무장만 갖춘 해적선을 따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항구에서부터 노를 저어온 노잡이가 지쳐갔다. 노예장이 퍼붓는 채찍질과 물벼락도 한계가 있었다.

콰과쾅-!

해적선에서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불꽃이 반짝이고, 수초 뒤 물줄기가 솟구쳤다. 대포를 처음 본 승객과 견습선원이 비명을 지르며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싸움에 익숙한 기사, 용병, 고급선원은 벌레 씹은 표정을 지을 뿐 몸을 숨기지 않았다. 쏘는 쪽도 명중을 기대하지 않는 공격이었다. 공포감을 조성하고 진로를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로벨은 근엄함을 유지하며 선장에게 물었다.

“이 배에는 대포 없어?”

“그런 거 실을 수 있으면 화물을 더 싣지요!”

“...훌륭한 상인이야.”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큼직한 폼멜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에 울프 용병단 일동은 불안을 느꼈다.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돼?”

“어느 정도 수준을 원하시는지 모르지만, 뱃놈들이라 어느 정도 합니다.”

로벨은 푸른고래 호에서 싸운 경험과 청새치 호를 점거한 경험이 있었다. 해적선의 병력과 무장수준을 얼추 알 것 같았다.

“그럼 전부 무장시켜.”

“해적과 싸울 생각입니까?”

“다른 방법이 있어?”

“화물을 버리고 도망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게를 줄이면 속도를 올릴 수 있고, 저놈들도 값나가는 것을 건지려고 추격을 포기하겠지요.”

로벨은 그럴듯하다 생각하다가 기각했다.

“가장 값나가는 화물은 사람이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내 느낌이지만, 저 해적이 노리는 것은 양털 따위가 아니야.”

“그럼 무엇을 노리...”

콰과광-!

해적이 2차 포격을 가했다. 초탄보다 상당히 가깝게 날아왔다. 선원들이 외설적인 욕을 퍼붓고, 여자와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선원을 무장시키고 속도를 줄여. 전투에 응하면 더 이상 대포를 쏘지 않을 거야.”

소구경 대포 1~2문으로 중형 갤리선을 침몰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설령 침몰시킬 수 있어도 사람과 상품을 바다에 양보할 리 없었다. 대포의 용도는 돛을 찢고 키와 노를 망가트려 속도를 줄이는 것인데, 알아서 속도를 줄이면 비싼 화약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저쪽은 잔인무도한 해적이고, 우리 쪽은 평범한 선원들인데...”

선장이 선뜻 응하지 않았다. 로벨이 포비아 왕국의 제후라 해도 율리아 유리우스 호의 책임자는 선장이었다. 선장이 명령하지 않으면 선원은 따르지 않았다. 로벨이 곤란해 하자 허풍쟁이 제이콥이 대신 설득했다.

“거 참! 이분이 누군지 모르소? 암만 무식한 뱃놈이라도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 후작을 모른다고? 우리 기사 나리가 성격은 괴팍해도 싸움실력만큼은 포비아 왕국, 아니! 유라피아 대륙 제일이오! 해적 30명을 혼자 도륙한 일도 있었소! 그러니 걱정 말고 따르시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를 장전하고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숏 스피어와 워 해머를 꺼냈다. 선장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무명이 자자한 기사와 중무장한 전문 용병이 있으니 잘하면, 정말 잘하면 이길 것도 같았다. 화물을 버리면 목숨을 건질 수는 있으나 선주에게 해고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럴 바에 도박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 그러면 기사님을 믿겠습니다.”

“응. 믿어봐.”

@

전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검술과 창술을 열심히 훈련한 군대가 승리할 것이라 생각한다.

분명 1대 1로 싸운다면 검술과 창술을 익힌 사람이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두 자릿수 이상이 싸우면 개인의 무용은 큰 의미가 없었다. 수십 명, 수백 명의 싸움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개개인의 무술 실력이 아니라 무기, 사기, 지형 그리고 타이밍이었다. 그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전술’이라 할 수 있었다.

“옛말에 양이 지휘하는 사자무리보다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강하다지.”

“에이, 그게 말이 되냐?”

“충분히 말이 된다.”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사방으로 수평선이 펼쳐진 ‘까마귀 둥지’에 걸터앉아 잡담했다. 저격수에게 최고의 장소였다.

로벨은 애꾸눈과 허풍쟁이를 망루로 보내 지원사격하게 하고,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발을 선수와 선미에서 수비케 했다.

“수성전하고 다를 것이 없어.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거리를 두고 막을 뿐이야.”

“어... 어떻게요?”

“성벽을 넘어오는 적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는 방법이 뭐지?”

“사다리를 절반쯤 올라왔을 때 밀어내는 거죠.”

“그거랑 같아. 널빤지를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해.”

배의 크기와 해적의 숫자를 가늠할 때 나무판자는 많아야 7~8개일 것이다. 그곳만 집중적으로 막으면 거진 성공이다.

로벨은 식수와 맥주가 담긴 오크통을 모두 모아 화살을 막는 엄폐물로 삼고, 그 뒤에 장대로 무장한 선원을 배치했다. 창과 방패 대신 몽둥이와 술통으로 펼치는 스피어-월이었다.

“한 번만 막아. 한 번이면 충분해.”

“하, 한 번이요?”

“응. 한 번이야.”

이어서 체구가 작은 선원들을 골라 손도끼를 쥐여 주고 난간 아래 숨겼다.

“너희들은 싸울 필요 없어. 머리 숙이고 있다가 뱃전에 갈고리가 걸리면 즉시 끊어. 쿼럴이 날아올 테니까 머리 내밀지 말고.”

“예, 예예.”

로벨은 전투준비를 끝내고 120야드 앞까지 다가온 해적선을 보았다. 커틀러스와 크로스보우를 휘두르며 원숭이처럼 날뛰는 해적들이 선명히 보였다.

“진짜 성벽은 아니니까. 승부를 빨리 내야 해.”

연습할 시간이 없어 못내 아쉬우나 노련한 울프 용병단이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쓰고 아론다이트를 천천히 뽑았다. 새하얀 칼날에 태양과 구름과 바다가 밝게 비쳤다.

@

이날의 해전은 해적들의 일제사격으로 시작되었다.

거리가 50야드로 좁혀지자 해적이 일제히 크로스보우를 당겼다. 그러나 해적은 해적이었다. 표적을 정해놓고 쏘는 것이 아니라 중구난방이었다. 사람을 노린 놈, 돛줄을 노린 놈, 그냥 눈 감고 쏘는 놈까지 다양했다. 술통과 난간 뒤에 숨은 선원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전신갑옷... 아니, 한때 전신갑옷이었던 갑옷을 입은 로벨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직! 아직이야!”

쿼럴 다음은 갈고리가 날아들었다.

역동감 넘치는 해적소설과 달리 돛줄을 잡고 날아오는 해적은 없었다. 로벨은 한 번 한 적 있지만, 정상적인 상황에서 할 짓이 아니었다. 해적은 해전의 정석대로 갈고리를 걸어 거리를 좁히고 가시 박힌 나무판자를 걸었다.

“지금이야!”

선측에 숨어있던 선원이 재빨리 일어나 손도끼를 휘둘렀다. 힘이 좋은 선원은 단번에 밧줄을 끊었지만 요령이 부족한 선원은 뱃전이 너덜너덜해질만큼 여러 번 찍었다. 그 과정에서 몇 명이 2차 사격에 당해 쓰러졌다.

해적이 쿼럴을 쏘는 동안 애꾸눈과 허풍쟁이도 열심히 반격했다. 크로스보우를 견착한 해적과 갈고리 달린 밧줄을 붕붕 돌리는 해적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해적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게 분투했지만, 결국 나무판자가 하나둘 걸렸다. 로벨은 나무판자가 걸린 위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대로 스피어월을 피해 뱃머리와 배꼬리 쪽에 많이 붙었다. 술통으로 만든 바리게이트를 피해 난전을 벌일 의도였다. 난전이 되면 쇠붙이와 전투경험이 많은 해적이 유리하다. 그러나 로벨 또한 바란 일이었다. 쇠와 경험은 로벨이 가장 많았다.

‘속전속결로!’

로벨은 필드 아머를 믿고 난간에 한 발 올렸다. 쿼럴 하나가 귓가를 스쳐 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해적의 조악한 솜씨와 필드 아머의 단단한 방호력을 믿었다.

남은 한 발을 마저 올리고, 누가 ‘앗!’ 소리를 낼 때 훌쩍 뛰었다. 로벨의 송곳 같은 오감에 파나케아 투구의 힘이 더해지자 주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정지했다.

그것은 평범한 그림이 아니었다. 사방 360도로 감상할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었다. 흉내쟁이의 숏 스피어에 찔려 나무판자 아래로 떨어지는 흉터 해적, 코앞에 도달한 쿼럴에 동공이 확장된 고참선원, 술통 위로 뛰어오르는 날렵한 해적, 겁먹은 얼굴로 주저앉아 장대를 휘젓는 어린 선원, 아바레스트를 견착한 애꾸눈 볼포스, 시위를 잡아당기는 허풍쟁이 제이콥, 해적답지 않게 롱소드와 하프 아머를 갖춘 기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너구나?’

로벨은 해적선 갑판에 자리한 ‘기사’에게 집중했다. 이름과 가문은 모르지만, 의도와 주인은 알 것 같았다.

‘너희가 먼저 시작한 거야.’

멈춰진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거친 삶을 살아온 바닷사람은 욕도 거칠었다. 로벨은 율리아 유리우스 호 난간에서 해적선 난간으로 단번에 건너뛰었다. 쇳덩이를 두른 몸을 생각하면 놀라운 탄력이었다. 로벨의 기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로벨은 해적선 난간을 포대 삼아 스스로 포탄이 되었다. 해적과 결탁한 명예롭지 못한 기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유치하지만 유서 깊은 대사를 날렸다.

“내 칼을 받아라!”

아론다이트가 아래에서 위로 가르며 이름 모를 기사의 겨드랑이를 베었다. 로벨은 비명과 핏물이 흐를 틈을 주지 않았다. 질주해온 속도를 줄이지 못해 어깨로 기사와 부딪쳤다. 한쪽 팔이 반쯤 잘린 기사는 지혈하거나 반격할 틈 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우당탕!

로벨은 넘어진 기사의 몸 위로 한 바퀴 굴러 벌떡 일어났다. 기사의 비명이 뒤늦게 울려 퍼졌다. 로벨은 뾰족한 서배튼으로 걷어차서 편안하게 기절시켰다.

“저놈은 뭐야!”

“이쪽으로 넘어왔다!”

기사를 제압했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주위가 온통 해적이었다. 절반은 율리아 유리우스 호로 넘어갔지만, 아직도 절반이 해적선에 남아있었다. 대충 보아도 20명이 넘었다. 적지는 않지만...

‘많지도 않아.’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한손으로 쥐고 흐룬팅을 뽑았다. 갑옷 비슷한 것도 입지 않은 해적을 상대로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상황이 우습지만, 해적들은 갤리선 한 척과 기사 한 명에게 포위당했다. 전술적으로 위기였으나 전술을 몰라서인지, 상황이 정말 우스워서인지 해적들은 긴장하지 않았다.

“이 자식이 미쳤나? 혼자서 뭘 어쩌겠다고?”

“야! 저 깡통 새끼부터 조져! 이쪽으로 와!”

로벨은 평소 들을 수 없는 호칭에 충격먹었다.

“까, 깡통...”

쇠와 말이 아니라 바람을 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그런 모양이다. 로벨은 육지사람들이 왜 ‘기사’를 무서워하는지 친절히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와라.”

그 가르침은 두 번 다시 받지 못할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물리적으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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