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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17화 (217/605)

217화. 뱃길

217화. 뱃길

로벨은 평소처럼 눈 뜨자마자 머리맡을 더듬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부드럽고 푹신한 것이 잡혔다. 로벨은 촉감이 좋아서 한참 주무르다가 부스스 일어났다. 부드럽고 푹신한 것, 아야의 꼬리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새벽 내 싸돌아다니다 이제 막 잠든 듯 꼬리 정도로 깨지 않았다.

“흐으음... 날씨가 좋아.”

로벨은 기지개를 켜고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아야와 이야카 사이에서 웅크리고 잠든 마녀 키르케, 아바레스트를 끌어안고 죽은 듯이 미동도 않는 애꾸눈 볼포스, 큰 대자로 뻗어서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허풍쟁이 제이콥, 바위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조는 과묵한 몬트, 재만 남은 모닥불 앞에 쭈그리고 앉은 흉내쟁이 퍼시발 등등.

로벨은 양동이에서 물을 떠 한 모금 마시고 남은 물로 고양이 세수했다. 그 소리에 귀가 밝은 용병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기, 기사 나으리?”

로벨은 젖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울프 용병단을 향해 활짝 웃었다.

“좋은 아침이야.”

“아... 좋은 아침입니다요.”

우당탕-! 쿵-!

흉내쟁이가 옆으로 쓰러졌다가 벌떡 일어났다.

“우오옷! 깜박 졸았군!”

“저런? 잠꼬대가 이상한데? ‘아주 잘 잤군!’이나 ‘상쾌한 기상이군!’ 이라고 해야지.”

흉내쟁이는 할 말이 없어 머쓱하게 웃었다. 용병들이 소란을 피우자 어지간해서 깨지 않는 마녀 키르케와 아침잠이 많은 늑대 남매까지 눈을 떴다.

아침 해가 지평선 위로 오르며 눈부신 광선을 비추고, 보랏빛 하늘이 서쪽으로 걷히며 새파랗게 물들어갔다. 로벨 일행은 모닥불을 발로 밟아 끄고, 담요를 둘둘 말아 수레에 실었다. 말들도 단잠에서 깨어나 콧김으로 인사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정리하다가 간밤에 못 본 것을 발견했다. 별것 아니지만, 충격적이었다.

“...저게 뭐지?”

로벨을 시선을 따라간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도 사고가 정지했다.

“도시... 같은데요?”

“무슨 도시?”

“아마도 페르젠 시티...”

로벨과 서로를 안쓰럽게 보았다. 푹신한 침대와 따뜻한 음식을 고작 1마일 앞에 두고 허허벌판에서 야영한 것이다.

“이런 멍청한 짓을...”

“어, 어두웠잖습니까요!”

“그걸 변명이라고...!”

다시 생각하니까 그리 좋은 아침이 아니었다.

@

페르젠 시티는 볼탄 반도 중부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비록 포클랜드 시티나 프란시스 시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볼탄 반도 북부에서 남해-인어의 바다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항구라 수많은 행상인이 찾아왔다. 북부 특산품은 양모, 모피, 유리 등이 남부 특산품인 향신료, 비단, 곡물 등과 거래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로 아야와 이야카를 골리며 물었다.

“양은 남쪽에서도 키우잖아요?”

“그렇긴 한데 질이 안 좋소. 추운 지방에서 자란 양이 질기면서 고운 털을 생산하지. 철과 나무도 비슷하오. 북쪽에서 나는 것이 훨씬 단단하오.”

“아, 그렇군요?”

일찍이 전쟁보다 교역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페르젠 가문 사람은 항구를 건설하고 교역로를 개척해 막대한 이문을 쌓았다. 그 재력으로 볼탄 반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제후가 되었다.

그러나 최근 무적무패의 기사를 앞세운 로드릭 가문에게 큰 위협을 받고 있었다. 로드릭 항이 열리면서 로드릭 시장과 노스폴드 시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교역로가 등장한 것이다.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 올라온 교역상들은 페르젠 시티의 시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배를 타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로드릭 항을 찾아갔다.

새로운 판매경로가 생긴 상인들은 쾌재를 불렀지만, 돈줄을 빼앗긴 페르젠 가문 사람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그리 말했어.”

“그런 말을 한 이유도 아십니까?”

“응. 조심해야지.”

어린 집사가 옆에 있었으면 ‘조심’이 아니라 ‘조용’이라고 정정해주었을 것이다. 소리 소문내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내일은 고사하고 2시간 뒤 일에도 무관심한 기사와 용병을 얕잡아 보았다. 허풍쟁이가 번쩍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기사 나리, 배를 타고 프란시스 시티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요?”

“배?”

“아까 저쪽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프란시스 시티로 출항하는 상선이 있다고 합니다요.”

북해에서 죽다 살아난 기억이 있는 로벨은 질색했다. 하지만 허풍쟁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요즘 치안도 안 좋고, 예정에 없는 여자와 아이까지 생겼는데, 육로로 가는 것은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 시기는 바다가 잠잠하니까 괜찮을 겁니다요.”

이안 선장이 들으면 상처투성이 얼굴을 꾸기며 이 시기가 1년 중 가장 위험한 시기라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벨, 애꾸눈, 키르케 등은 바다 일을 하나도 몰랐다. 허풍쟁이가 허풍을 떨며 우기자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로벨은 고개를 푹 숙인 시골 아낙과 그 손을 꼭 쥔 채 멀뚱멀뚱 쳐다보는 꼬마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한 번 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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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명성은 유라피아 대륙 전체에 알려졌고, 로드릭 가문의 영향력은 볼탄 반도 구석구석에 닿았으니, 거기에 약간의 금화만 추가하면 페르젠 시티에서 프란시스 시티로 가는 갤리선 한 척 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저희 율리아 유리우스 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로벨 로드릭 영주님. 짧은 시간이지만, 불편함이 없이 모시겠습니다.”

로벨은 수염이 풍성한 아이란드 왕국 선장과 간단히 통성명한 후 신세 지게 된 중형 갤리선을 둘러보았다. 크기만 보면 푸른 고래 호보다 1.5배 정도 더 컸다. 노잡이 노예만 120명이라 하니, 선원과 승객을 합치면 어지간한 마을 규모였다. 로벨은 지극히 기사다운 의문을 표시했다.

“입이 저렇게 많은데 남는 게 있어?”

나이가 많은 선장은 자급자족 장원 생활에 익숙한 기사의 생각을 잘 알았다. 그와 더불어 기사의 거친 사고와 끔찍한 자존심도 알고 있었다. 최대한 정중하고 가능한 완곡한 표현으로 ‘너희 귀족이 농사짓는 것보다 남는 것이 많다’는 의미를 전달했다. 사실 로드릭 영지의 경제 기반도 농사보다는 광업과 가공과 교역이었으니 그렇게 배려할 필요는 없었다.

“출발은?”

“1시간 뒤입니다.”

그 정도면 선원소집과 화물적재가 전부 끝난 시간이다. 로벨 일행이 출항 직전에 찾아온 것이다.

“에엥? 쉬지도 않고 바로 가요?”

“모처럼 ‘자유의 공기’인데, 쳇!”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이 투덜거렸다. 로드릭 시장도 커졌지만, 아직은 역사가 있는 페르젠 시장만 못했다. 도박과 매춘 등의 음성적인 부분에서 더욱 그러했다. 외지인 입장에서 아쉬울 만했다. 하지만 로벨은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한 성에서 나고 자란 탓에 시끄럽고 북적이는 곳이 불편할뿐더러, 자유와 함께 악취가 묻어나는 도시의 공기가 싫었다.

배수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골목골목마다 오물과 배설물이 가득하고, 범죄가 끊이지 않아 곳곳에 목 매달린 도둑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계절이 계절이라 눈구멍과 목구멍에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더욱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이러한 풍경을 당연하게 여기는 도시 사람들이었다.

‘도시 사람만이 아닌가?’

유라피아 대륙인에게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도시의 풍경은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 살면 절대 성벽 안에 살지 않을 텐데. 교외로 나가고 말지.’

로벨의 생각은 로벨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머지않은 미래에 그리될 것이다.

로벨은 멀리서 보면 화려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추접스러운 도시에 진저리치고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을 마련해줘. 말과 수레를 실을 장소도.”

선장은 소금이 묻어나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부선장실을 내드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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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실 다음으로 좋은 곳은 분명하지만, 선장실과 비교하면 전투마와 노새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침대에 책 두 권 펼쳐놓기도 좁은 책상이 자리하자 꽉 찼다. 개인실이란 것이 특권일 뿐, 면적으로 보면 일반 선실보다 좋을 것이 없었다.

“으아앙! 기사님! 기사님! 여기 너무 더러워요!”

마녀 키르케가 우는 소리하며 찾아왔다. 발목을 훤히 드러내고 다닐 정도로 털털해도 젊은 여자였다. 거친 선원과 사나운 용병 사이에서 지내기 힘들었다. 사실 선원과 용병 입장도 들어봐야 할 걱정이었다. 통속적인 미신을 신봉하는 선원들은 늑대를 부리는 마녀의 꼬뜨 속에는 악마의 꼬리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이 방을 써.”

마녀 키르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기사님은요?”

“난...”

로벨도 선원과 용병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녀 키르케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배시시- 웃었다.

“이 방은 좁아서 둘이 자기 힘든데... 히히힛! 그래도 꼭 붙어서 자면 될 것 같아요! 아야랑 이야카를 내보내고 저희 둘만...”

“그래. 아야와 이야카까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로벨은 소드 벨트 챙겨서 일어났다. 마녀가 당황해서 앞을 가로막았다.

“어, 어디 가시려고요?”

로벨은 누가 뭐래도 명예로운 기사였다. 자고로 명예란 베푸는 것만큼이나 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대접을 소홀히 받는 것도 명예에 흠이 되는 일이다.

“선장실을 빌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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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챔피언이 무시무시한 칼과 무지막지한 갑옷을 갖추고 ‘이 방을 써야겠는데, 넌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으면 사실상 협박이었다. 선장은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풍이나 포격거리에서 졸리 로저를 올리는 해적선을 보았을 때처럼 식은땀을 흘렸다. 늑대 두 마리가 ‘이 사람 말을 듣는 게 좋을걸?’ 이란 듯 으르릉거려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끝내 선장실을 빌리지는 못했다. 선장의 자존심이 대단하거나 그랜드 챔피언에 맞설 만큼 용감해서가 아니라, 항해 업무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타협책으로 일등 선원 6명이 묵는 선실을 통째로 내주었다. 당연히 반발이 나왔지만, 로벨이 한 손에 칼, 다른 한 손에 금화를 보이자 순순히 배려해주었다. 어느 쪽이 효과적이었는지는 선원 본인들만 알 것이다.

로벨은 널찍한 선실이 마음에 들었고, 선장은 선장실을 지켜 안도했고, 선원은 부수입을 올려 만족했다. 이번 일에 불만이 있는 것은 마녀 때문에 헛된 돈이 나간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본인뿐일 것이다.

“왜! 왜 나랑 같은 방 쓰는 게 싫은 건데! 대체 왜!”

그 대답은 당장 해줄 수 없었다.

로벨이 2층 선실에서 갑옷을 벗고 묵은 땀을 씻는 동안 머리 위와 발아래에서 여러 사람이 출항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닻을 올려라! 닻을 올려라!”

“신참! 돛 줄 단단히 매어놔!”

“노예장! 미속 전진!”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잡놈들아! 일할 시간이닷!”

선원들의 출항노래, 노예장의 지저분한 욕설과 채찍질 소리, 노잡이 노예의 애처로운 비명이 어지럽게 울려 퍼졌다. 로벨은 해먹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았다. 뱃길을 선택한 것을 잘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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