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고민
216화. 고민
바엘 남작은 영리한 자였다. 용병의 밀린 급료를 영지민에게 떠넘길 정도로 말이다. 그런 작자이기에 속된 말로 피떡이 되어 끌려 나오는 전직 용병과 낯익은 영지민을 보았을 때 대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로벨 로드릭 후작...”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아래로 누르며 위엄 있게-그러나 남이 볼 땐 까칠하게- 말했다.
“경이 바엘 남작이오?”
로벨의 좌우로 아야와 이야카가 서고, 그 뒤로 울프 용병단이 병장기를 챙겨서 자리했다. 바엘 남작의 수행원도 대거와 몽둥이를 꺼냈으나 기세에서 백전연마 용병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팽팽하지만, 실상은 로벨쪽이 압도하는 중이었다.
바엘 남작은 홧김에 빼 든 메이스를 슬그머니 내리고 평화주의자에 빙의했다
“그렇소. 본인이 조난 바엘이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로벨 로드릭이오.”
바엘 남작은 눈알을 굴려 상황을 살폈다. 로벨 로드릭의 부하는 5명이 전부였다. 잔인무도하기로 유명한 울프 용병단이라도 고작 5명이다. 그나마 1명은 자그마한 계집아이였다. 자신감이 솟아났다.
“이거 실망이오. 로벨 로드릭 경은 명예를 아는 기사라 들었는데, 경 정도 되는 자가 어찌 남의 성에 무단으로 침범해 이리 무례하게 구는 것이오. 이 일을 내 주군이신 페르젠 백작이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로벨은 미소 지었다. 어린 집사나 마녀 키르케한테 짓는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사냥감을 앞에 두고 웃는 맹수의 미소였다.
“늑대성의 주인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국왕 폐하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충직한 기사로 찾아온 것도 아니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머리에 썼다. 시야가 360도로 넓어지며 가벼운 현기증이 났다.
“그럼 무슨 자격으로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가슴에 붙였다. 새하얀 칼날이 횃불을 받아 조용히 타올랐다.
“상처 입은 여인의 수호 기사로. 명예와 정절을 소중히 여기는 옛 신의 챔피언으로.”
“...취하셨소?”
바엘 남작의 무례를 탓하기 어려웠다. 마녀 키르케를 제외한 로벨 일당 모두 오글거림을 참느라 곤욕이었다. 하지만 로벨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경이 저지른 불의한 행위를 증명할 증인이 이 자리에 있소. 또한 힘없는 자신을 책망하며 명예를 지켜줄 것을 간청한 고귀한 여인이 있소.”
“못 배운 잡것들과 더러운 창부가 말이오? 경, 정말 미치셨소?”
일찌감치 투구를 써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이마에 핏대가 서는 추한 꼴을 보였을 것이다.
“...더불어 본인을 모욕한 것도 추가하겠소.”
바엘 남작과 그 수행원은 ‘그게 가장 큰 이유잖아!’ 라고 소리칠 뻔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아래로 내리고 옆으로 한 걸음 걸었다. 간격을 재기 시작한 것이다. 바엘 경은 당황해서 제지했다.
“정녕, 정녕 싸우자는 거요?”
“농담 같으시오?”
거듭 말하지만, 바엘 남작은 영리한 자였다. 말 몇 마디로 넘어갈 상황이 아님을 알았다. 메이스를 왼손으로 옮기고 롱소드를 오른손으로 뽑았다.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모르겠으나, 자존심을 세워준 후에...’
애석하게도 명석한 두뇌에 비해 솜씨가 따르지 않았다.
로벨의 아론다이트가 채찍처럼 움직였다. 바엘 남작의 메이스와 롱소드를 좌우로 쳐내고 그 사이로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바엘 남작은 빛살 같은 속도에 놀라 두어 걸음 물러났다. 칼끝이 헬름을 스치며 불꽃을 자아냈다.
“크윽!”
바엘 남작은 메이스를 던지고 화급히 바이저를 내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로벨은 잠깐의 빈틈을 놓치지 않고 재차 찌르기를 넣었다. 쿼럴도 튕겨낼 견고한 헬름이지만, 눈구멍 앞에서 칼날이 왔다 갔다 하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이 정도로...!”
로벨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롱소드를 여유롭게 받아넘긴 후 겨드랑이를 베었다. 사슬이 촘촘히 엮여있으나 아론다이트의 예기를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새빨간 핏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롱소드를 놓지 않은 것은 칭찬할 만했다. 기사 종자 시절 제대로 교육받은 모양이다. 그러나 종자 시절 교육으로는 타고난 재능과 축적된 경험은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며, 인간과 인간이 아닌 적을 수 없이 격파해 온 역전의 용사였다.
“흠.”
아론다이트를 끌어당겨서 큼직한 폼멜로 바엘 남작의 헬름을 올려쳤다. 바이저가 위로 들리고 당황한 맨얼굴이 드러났다.
“아, 안 돼...!”
바엘 남작은 컨틀렛으로 안면을 보호했다. 하지만 로벨이 노린 것은 아래쪽이었다. 바엘 남작의 무방비한 정강이를 걷어찼다.
바엘 남작은 계속되는 변칙 공격에 대응하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로벨은 춤추듯이 옆으로 비켜서 아론다이트를 아래로 내렸다. 바엘 남작은 몸을 굴리다가 딱 굳었다. 칼끝이 정확히 미간에 닿았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정확히 급소를 접한 것이다. 파나케아 투구의 효능 덕분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바엘 남작은 신기에 가까운 칼솜씨에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보, 본인이 졌소이다!”
바엘 남작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항복했다. 실력 차이가 너무나 굴욕을 느낄 새도 없었다.
로벨은 바엘 남작을 보고 있지 않았다.
로벨이 패할까 가슴 졸이다 승리를 확인하고 안도하는 미망인을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갈등했다.
‘죽일까?’
기사의 명예도, 영주의 자격도 없는 자였다. 이런 자 때문에 변화하는 세상에서 기사의 위엄이 떨어지고 위기가 찾아온다.
그러나 정말 짧은 갈등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무릎에 앉아 즐겨듣던 기사 이야기에 기사를 살해하는 내용은 없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기사를 살해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일이었다.
기사가 될 수 없는 로벨에게 ‘기사의 명예’는 자신이 기사라 자부할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것을 허물 수 없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회수하고 승자로서 명령했다.
“옛 신의 사제를 찾아 죄를 고백하고, 도적에게 손해 입은 영지민에게 반드시 보상할 것이며, 경의 주군인 페르젠 백작의 처분을 달게 받으시오.”
냉소적인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난리를 쳐놓고 고작 재물 조금 쓸 뿐이었다. 그러나 로벨과 바엘 남작의 생각은 달랐다.
옛 신의 교단에 죄를 고백하면 그 기록이 영원토록 남게 된다. 자기자신을 넘어 가문의 불명예였다. 수백 년 뒤에도 씻기지 않을 치욕이다.
주군에게 처벌을 받는 것은 명예를 넘어 실질적인 타격이었다. 바엘 남작은 엄청난 부자도, 뿌리 깊은 가문도 아니었다. 주군의 눈에 띄어야만 출세할 수 있는 영세한 기사였다. 아무리 작은 처벌이라도 처벌은 처벌이니 낙인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결투에서 패배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행하지 않으면 더욱 큰 불명예로 죽을 때까지, 나아가 자식들까지 조롱거리가 될 테니까.
“그리... 하겠소.”
로벨은 세심하게 조건까지 걸었다.
“30일 이내에 이행하도록 하시오.”
바엘 남작의 어금니가 뿌드득- 소리를 내었다.
@
해가 저물고 땅 그늘이 하늘을 덮었다. 건실한 일꾼은 저녁 식사를 배불리 먹은 후 보람찬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지만, 로벨 일행은 도둑고양이처럼 성을 빠져나와 인적 없는 가도를 걸었다.
“죄진 것은 그 남작인데, 왜 우리가 고생하냐고요...”
“그럼 어쩌냐. 그 지ㄹ... 그 짓을 벌여놓고 하하호호 웃으며 ‘객실 좀 써도 될까요?’ 할까? 우리 기사 나으리 성격상 죽어도 못하지.”
로벨은 빨개진 얼굴을 어둠 속에 숨겼다.
“내일 온다더니 하필 오늘 와 가지고!”
“그만하자. 그만. 적당히 가서 야영할 곳을 찾아봐.”
허풍쟁이가 짐을 뒤져서 랜턴을 꺼냈다. 여닫이 덮개로 전방만 밝히는 랜턴이었다. 그 철저한 준비성에 몇몇 동료가 감탄했다.
“오오! 이제 마부가 다 됐군!”
“으으으...!”
로벨이 어디 갈 때마다 수레를 끌고 따라다니니, 용병인지 짐꾼인지 정체성을 잃기 시작했다.
로벨은 흉내쟁이를 앞질러 선두로 나갔다. 반쯤 졸던 흉내쟁이가 화들짝 놀라 깃대를 바로 잡았다. 로벨은 손으로 진정시키고 말했다.
“모닝스타가 밤눈이 좋아.”
“제가 기수인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로벨은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었다.
꼬마 천사가 한 입 베어 먹은 달이 떠오르고, 지평선 너머로 소리 없이 흐르는 은하수가 나타나고, 은하수에서 튀어 오른 수만 개의 꼬마별이 등장했다. 저물어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풀벌레가 목청 높여 노래 부르고, 태양의 폭정에 숨죽이던 바람이 슬그머니 일어나 높이높이 솟구쳤다. 아름답고, 고요하고, 시원한 한여름의 밤이었다.
“푸릉!”
모닝스타는 과연 밤눈이 좋았다. 네 다리를 치켜들며 평탄한 길로 걸어갔다. 모닝스타가 웅덩이나 진창에 빠지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이던 로벨은 이내 안심하고 모닝스타가 알아서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평화롭네.”
로벨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소곤소곤 떠들던 마녀와 울프 용병단이 로벨을 돌아보았다.
“낮에 도적 십수 명을 때려잡고 저녁에 악덕 영주를 징벌한 후 야밤에 도망치면서 할 대사인가?”
“기사 나리니까 가능할 지도... 10명 정도 때려잡는 것은 식후운동 아니겠냐?”
“아니야. 식전운동이야. 그 정도로 배가 꺼질 리 없으시지.”
로벨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퍼지는 괴상한 평판이 어이없었다. 이러니까 성문을 주먹으로 깨부수고 기사를 잡초 베듯이 벤다고 허무맹랑한 소문이 났을 것이다.
@
로벨 일행은 개울이 가깝고 바닥이 평평하며 키 작은 잡목이 주위를 감싸듯 자란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산이나 큰 강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서쪽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를 보아 페르젠 시티에 가깝구나 짐작했다.
“잠깐 쉬었다 갈 거니까 짐 풀지 마.”
기사와 용병은 전쟁 전문가인 동시에 야영 전문가였다. 전쟁의 8할은 행군과 야영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로벨이 일일이 명령하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할 일을 수행했다.
애꾸눈이 큰 돌을 주워와 화덕 비슷한 것을 만들고, 허풍쟁이가 썩은 나무와 마른풀로 불을 피우는 동안, 흉내쟁이가 큰 냄비에 다용도로 사용할 물을 담아왔다. 과묵한 몬트는 전투마와 짐말의 편자를 살핀 후 바람 불지 않는 관목 사이에 묶었다. 물을 챙겨줘야 하는 것이 번거롭지만 강바람에 감기 들게 하는 것보단 나았다.
로벨은 맨바닥에 앉아 부지런히 하룻밤을 준비하는 부하들을 보았다.
‘역시 데려오길 잘했어.’
기사의 수행원이 할 일 중 하나였으니 딱히 미안하지 않았다.
오래된 비스킷과 딱딱한 염장고기를 한 조각씩 먹고, 김빠진 리암 수사의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고, 밤이슬을 피할 모포를 한 장씩 두른 후 불침번을 정했다. 건장한 용병이 넷이다 보니 고귀한 로벨과 고귀한 로벨의 가호를 받는 여자와 아이는 제외되었다.
“헤헤, 기사 나리, 뭣 좀 여쭤봐도 될까요?”
초번이 되어 싱글벙글한 허풍쟁이가 잘 준비하는 로벨에게 다가왔다. 로벨은 소드 벨트를 둘둘 말아 곰 인형처럼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도적놈들을 언제까지 데려갈 겁니까요?”
하루 종일 시달리고 비스킷 한 조각 겨우 얻어먹은 도적이 불쌍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안 선장에게 보내서 노잡이로 쓸 거야. 해적질을 못 해서 노잡이가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던데, 좋아할 거야.”
“그럼 되겠군요! 역시 기사 나으리입니다! 그러면 저 여자와 꼬마는...”
로벨은 모포를 두르고 꼭 끌어안은 모자를 보았다. 바엘 남작 앞에 놔두면 해코지당할 것이 분명해 일단 데려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쓸 곳이 없었다.
“우리 마을에 정착시켜야지.”
“그야 그렇겠지만, 아무래도 여자 혼자 힘들 텐데요?”
“...짝까지 찾아주는 것은 어려워.”
로벨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했다.
좋은 남자를 만나 로드릭 마을에 자리 잡으면 최고지만, 거기까지 강제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