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성자
215화. 성자
로벨 일행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바엘 남작이건 바니 남작이건 우리 기사 나리가 최고니까 걱정없다는 속 편한 부류와 자칫 로드릭 vs 페르젠 가문의 전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 많은 부류였다. 귀족 사회를 잘 아는 애꾸눈 볼포스와 ‘의외로’ 생각이 깊은 허풍쟁이 제이콥이 후자였다.
“심히 불쾌하지만, 그래도 페르젠 백작의 봉신입니다. 영주님께서 직접 손쓰는 것은 보기도 좋지 않고 괜한 오해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예. 예. 그렇습니다요. 그깟 남작 따위 상대하지 말고 페르젠 백작이나 프란시스 공작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반박했다.
“남의 가문에 끼어드는 것은 똑같은데? 그래서 효과가 있을까?”
“그럼 귀족원 회의를 소집하시지요. 여러 제후들이 심판할 겁니다.”
“이런 일로 영주들을 불러 모으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공개적으로 페르젠 백작의 기사를 처벌하려고 하면 오해란 것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애꾸눈과 허풍쟁이는 서로를 보았다. 평소에는 맹하니 아무 생각도 않는 양반이 큰일을 저지를 때만 날카롭다. 어린 집사를 잡아오기 전에는 설득이 안 될 듯했다. 결국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럼 어쩌실 생각입니까?”
“기사답게. 명예롭게.”
“...그리 말하니까 더 불안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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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럴에 맞은 도적은 마녀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을 거뒀다. 출혈은 얼마 안 되지만 장기가 손상되어서 어쩔 수 없었다. 마녀가 우울해 하자 과묵한 몬트가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이놈이 끼친 해악을 생각하면 자비롭게 간 것이오. 슬퍼하는 것은 낭비요.”
“그치만...”
마녀 키르케는 알아듣지 못할 목소리로 웅얼거리다가 억지로 웃었다.
“그래도 저 사람은 살았어요!”
아야와 이야카가 살점을 뜯어낸 도적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지 못할 뿐 멀쩡했다. 정신적으로도 멀쩡하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었다. 피 맛을 본 아야와 이야카가 주위를 맴돌며 계속 킁킁거렸다. 도적은 망부석이 되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대충 다 챙겼습니다요!”
흉내쟁이 퍼시발이 야영지의 물건을 짊어지고 외쳤다. 아흐레 동안 부지런을 떨어서 이것저것 많이도 재어놓았다. 주인에게 돌려주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가자.”
하지만 로벨이 그러기로 했으니 차마 빼돌릴 수 없었다.
로벨 일행이 약탈품을 되찾아오자 행복이 울타리를 넘어 영지 전체에 회오리쳤다. 기사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소심한 소녀들은 울프 용병단의 손을 꼭 쥐고 고마움을 표시했고, 머리가 제법 굵은 소년들은 마녀 키르케 주위에 모여 쭈뼛쭈뼛하며 수작 아닌 수작을 걸었다.
로벨은 웃음꽃이 만발한 바엘 마을을 흐뭇하게 둘러보다가 문뜩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젊은 모자를 보았다. 머리도 엉망이고 옷차림도 좋지 않은데 그나마 표정이 밝아 봐줄만한 여인이었다.
“기사님, 저희를 구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로벨은 어리둥절해 하다가 뒤늦게 도적에게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던 여인과 촌장이 보호하던 꼬마임을 깨달았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래도... 그래도 큰 은혜를 입었는데...”
로벨은 그만하라고 손사래 치다가 불현듯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결심은 빠르고, 행동은 더욱 빨랐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여인 앞에 무릎 꿇었다.
“친애하는 나의 레이디...”
“레, 레이디요?”
시골 여인은 난생처음 듣는 과분한 호칭에 화들짝 놀랐다.
“...불경하고 불의한 자의 소행으로 레이디의 소중한 명예가 훼손되었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오.”
로벨의 돌발행동에 놀란 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허풍쟁이와 흉내쟁이가 입을 쩌억- 벌리고 중얼거렸다.
“기사 나리가 왜 저래?”
“모, 몰라? 뭘 잘못 드셨나?”
로벨은 괴상망측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
“그에 로벨 로드릭이 레이디의 명예를 위해 보잘 것 없는 칼을 들고자하니 허락해주시겠소?”
“저어, 저기,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 기사님? 기사님? 왜 그러세요?”
여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동화 속에서 막 뛰쳐나온 것처럼 젊고, 잘생기고, 심지어 백마까지 탄 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상한 미소로 ‘레이디’라 불러주니 덩달아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순박함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한편, 용병치고 교양이 깊은 애꾸눈이 로벨의 의도를 알아챘다.
“성자 마르틴의 일화를 흉내 내시는군. 흐음. 가끔씩 깜짝 놀라게 하시지.”
“성자 마르틴? 그게 뭐야?”
허풍쟁이가 이해를 못 해 물었다.
“1명의 미망인을 위해 100명의 기사와 결투한 성자 마르틴의 일화를 몰라?”
“아... 아앗!”
꿈꾸는 소녀들을 제외한 여러 시선이 애꾸눈에게 집중되었다. 애꾸눈은 외눈안대를 만지며 설명했다.
“영주님이 성자 역할이고, 저 여자가 불운하게 남편을 잃은 시골 여인 역할이지. 재미있지 않아?”
“뭐야? 뭔 소리야? 왜 그런 연극을 하는 건데?”
애꾸눈은 이런 일을 이해하는 자신이 이상한 거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전우들이 이상한 건지 잠깐 고민했다.
“영주님은 성 마르틴의 일화를 흉내 내서 바엘 남작을 징벌할 생각이다. 장난 같지만 장난이 아니지. 이런 이야기는 젊은 기사와 어린 귀부인이 아주 좋아하니까. 이름 없는 미망인을 위해 고귀한 기사가 기꺼이 칼을 뽑고 결투를 벌인다. 그림이 그려지잖아? 그러한 미담에 정치색을 입히는 짓은 못하지. 그 페르젠 백작이라면 더욱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기사 나리가 성 마르틴의 환생이라 불리셨지...?”
애꾸눈은 외눈안대를 신중히 쓸어 만졌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재미있고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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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포로가 된 도적들을 앞세워서 영주의 성을 찾아갔다. 바엘 가문의 충성스러운 고용인이 소극적으로 저항했으나 정말 소극적이라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뭣 때문에 이런 짓을...!”
바엘 남작의 서기관 겸 행정관 겸 징수관이 메인 홀을 장악한 로벨 일행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야와 이야카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 거렸다. 딱히 서기관 겸 행정관 겸... 이 싫어서 보다 그냥 배고파서 짜증이 난 거지만, 그 사실을 설명해줄 만큼 친절한 늑대성 사람은 없었다.
로벨은 영주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괴고 말했다.
“바엘 남작에게 볼 일이 있어. 손님으로 대우해줬으면 좋겠어.”
서기관 기타 등등은 기사, 그것도 무명이 드높은 로벨 로드릭을 상대로 놀라울 만큼 용기를 짜냈다.
“허, 허나, 후작님, 이건 경우가 아닙니다. 영주님께서 돌아오시면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낼 테니 그때 다시 방문해 주시지요.”
로벨이 설득할 필요 없었다. 허풍쟁이와 흉내쟁이가 버럭! 하고 윽박질렀다.
“우리 기사 나리가 그리 한가한 줄 아쇼!”
“군대를 끌고 온 것도 아니고, 그냥 얼굴 좀 보겠다는 거잖수? 뭐가 문제야? 뭐가?”
기사와 용병이 아니라 깡패와 쫄다구 같았다. 거시적인 시각으로 차이가 크진 않았다. 서기관은 찔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로벨은 고생 많은 어린 집사가 떠올라 미안했다.
“배고파. 먹을 것을 가져와.”
그러나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해결할 일은 해결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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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엘 남작의 성은 외진 시골 성답게 허름했다. 제법 구색을 갖춰 석재로 성벽을 쌓고 목재로 성탑을 세웠는데, 눈이 한껏 높아진 로벨에게는 조금 높은 담장과 조금 큰 망루였다. 겁쟁이 데비의 포병대를 동원하면 반나절 만에 함락할 수 있을 듯했다.
“그때 내가 말했지! 우리 기사 나리를 해치려면 나부터 죽여야 할 것이다!”
“엥? 외팔이가 말한 것하고 좀 다른데?”
그래도 성은 성이라 갖출 것은 다 있었다. 식량창고, 마구간, 우물, 옛 신의 교회 등이 빼곡하게 자리했다. 커다란 화덕과 가마솥도 있어서 저녁 식사도 거하게 차릴 수 있었다.
“그 덩치만 큰 괴물놈이 겁을 먹은 게 보였어.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나한테 덤볐지!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오는데...!”
“도끼? 아까는 몽둥이라며?”
허풍쟁이 제이콥은 시기 어린 지적에도 두 팔을 휘두르며 장엄한 ‘오우거 슬레이어’ 전설을 이어갔다. 마구간의 짐이란 꼬마는 넋을 잃고 허풍쟁이의 허풍에 빠져들었다.
“우오오오... 우오오...”
“이노옴! 내 칼을 받아라! 이얍!”
여기에 흉내쟁이의 흉내까지 곁들이자 훌륭한 즉석 공연이 되었다. 그 내용이 심히 편파적이고 왜곡되었지만, 억울할 사람이 자리에 없어 문제없었다.
오우거 살해자 로벨 로드릭과 현장 목격자 마녀 키르케는 넋을 잃은 꼬마의 어미 되는, 그리고 이번 성 마르틴 작전에 핵심이 되는 미망인과 이야기 중이었다.
“가족이 없어?”
“네... 네. 부모님은 8년 전 전염병이 돌아 돌아가셨고, 아이 아빠는 전쟁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어요.”
마녀 키르케가 가슴 아픈 듯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저런... 어떻게...”
로벨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페르젠 백작이 군대를 일으킬 때 징집되었을 텐데, 그 책임이 로벨에게도 없지 않았다. 어쩌면 로벨이 죽인 수많은 병사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돌아갈 곳도 없고?”
“도적들이 집을 불태워서... 이제 살 곳도...”
예로부터 힘없는 농민이 다 그렇지만, 정말 처량하고 궁핍한 처지였다. 애까지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기사님, 기사님, 우리가 데려가요.”
“...그건 곤란해.”
로벨은 말 못할 사정 때문에 사용인을 잘 두지 않았다. 늑대성으로 데려가도 시킬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집도 절도 없는 미망인은 자신을 위해 무릎 꿇어준 젊고 아름다운 기사에게 단단히 꽂힌 상태였다.
“나으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조금 먹고 많이 일할게요. 빵도 굽고, 빨래도 하고, 나무도 할 수 있어요. 저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어린 집사가 있었으면 코웃음 쳤을 것이다. 이곳에 남는다고 굶어 죽거나 얼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고향 인심이 야박하진 않다. 따지고 보면 이곳 주민이 모두 사촌에서 팔촌이니 처신만 잘하면 살 곳을 마련해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시골의 과부보다 대영주의 몸종이 되는 것이 훨씬 살기 좋았다. 의도한 건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건지 모르지만 시골 아낙치고 계산적이었다. 그러나 로벨이 계산적이지 못했다.
로벨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할 때,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소란이냐! 이 잡것들이 무엇이야!”
성 밖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이 쥐꼬리만 해서 로벨이 있는 아성까지 잘 들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정녕 죽고 싶은 게냐!”
“으악! 기사 나리! 기사 나리! 바엘 남작이 왔습니다요! 기사 나리이이!”
로벨은 반가움과 난감함을 반반씩 담아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망인과 도적 포로가 불안한 눈초리로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로벨은 도적에게 일어나라 손짓하고 연극 아닌 연극을 준비했다.
“증인과 증거가 있으니 발뺌 못 할 거야. 그래도 모르니까 따라와.”
“아이고, 나으리, 저희들은...”
“잘 처신하면 교수형은 면하게 해줄게.”
이안 선장의 노잡이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구태여 말해주지는 않았다. 도적은 결심을 굳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옆구리에 끼우고 흐룬팅 손잡이에 오른손을 걸쳤다. 성자 마르틴이 100명의 기사와 결투하기 위해 성문을 나설 때 모습이 이러했으리라.
‘으음... 갑옷이 부실하잖아?’
로벨은 완벽한 연극에 부실한 소품이 불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관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작은 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