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14화 (214/605)

214화. 악당

214화. 악당

전투는 예상외로 싱겁게 끝났다.

로벨은 마을 여인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얼굴에 ‘나 악당’이라 적어놓은 듯한 도적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날렸다. 그리고 ‘어어? 어!’ 소리가 겨우 나올 때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차례로 한 명씩 찔렀다.

‘적’의 숫자를 모르는 것은 도적떼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기사와 기마 용병에 심한 혼란에 빠졌다. 적이 셋뿐인지, 아니면 그 뒤쪽에 병사가 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울프 용병단 최고의 명사수가 쏜 쿼럴이 노르만 투구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네 번째로 불운한 도적은 갑자기 찾아온 어둠에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내 눈! 내 눈!”

이쯤 되면 로벨의 군사가 몇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기마병과 궁병에 포위되어 1/3이 순식간에 당했으니 샘 포클이 환생해도 승산이 없었다. 로벨은 승기를 더욱 확실히 굳혔다.

“난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다! 용기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기, 기사닷!”

몇 군데가 부실하지만 외형상 분명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여름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판금갑옷과 초식동물의 편견을 과감히 깨부수는 사나운 전투마 앞에서 전의를 불태우기란 어려웠다.

“바엘 남작! 이 개자식이 약속을 어기고!”

“바엘이 아니라 로드릭이라니까?”

로벨은 모닝스타를 전진시키고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도적 두목은 경이롭게도 로벨의 참격을 피했다. 에르나 왕국의 위대한 챔피언도, 신화 속의 늑대왕도 피하지 못한 공격을 회피한 것은 과감한 결단력 덕분이었다. 도적 두목은 무기와 방패를 내던지고 죽을힘을 다해 도주했다. 떠돌이 용병 시절부터 두목의 본보기를 존경해 온 10여 명의 도적들도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로벨은 칼 한번 안 섞고 도망치는 도적떼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어... 음... 살려 보내면 마을 사람이 곤란하겠지?”

로벨은 과묵한 몬트와 흉내쟁이 퍼시발에게 눈짓했다. 두 사람은 전투마를 몰아 도망치는 도적 잔당을 추격했다. 두 다리는 네 다리를 이길 수 없는 법이라 하나둘 창에 찔려 쓰러졌다. 간혹 용감하게 반격을 시도한 도적도 있었지만, 용기를 다 보이기도 전에 애꾸눈과 허풍쟁이의 쿼럴에 잡아먹혔다.

“위험하다고 투덜거리더니...”

장비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실전경험으로 보나 도적 노릇을 하는 뜨내기 용병 무리는 울프 용병단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허풍쟁이가 약한 소리를 한 것도 돈 안 되는 싸움이 싫었을 뿐, 정말로 위험해서가 아니었다.

로벨은 도주하는 도적떼에게 신경 끄고 얼빠진 마을 주민을 향해 모닝스타를 몰았다. 얼마나 얼이 빠졌는지 집이 통째로 불타 사라지는데 진화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로벨은 어색함을 떨치고 환하게 인사했다.

“아까 말했듯이, 난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야.”

“로, 로드릭 영주님...?”

“늑대 후작님이다!”

로드릭 영지와 가까운 탓에, 혹은 로드릭 시장의 영향을 깊이 받은 탓에 로벨 로드릭이란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숨어 있던 50대 노인이 엉금엉금 기다시피 다가왔다.

“저희가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능하고 에, 또, 그래서 귀하신 분께 인사가 늦었습니다.”

말주변이 조금 있는 것을 보아 이곳 촌장인 듯했다.

로벨은 안장주머니에서 헝겊을 꺼내 피 묻은 아론다이트를 닦은 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스르릉- 전설의 명검답게 칼집에 들어가는 소리가 서늘했다. 발아래 놓인 목 없는 시체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겁 많은 여인들은 아버지와 남편 뒤에 더욱 꽁꽁 숨었고, 철없는 소년들은 선망 가득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로벨은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곳 영주는? 바엘 경은 성에 있어?”

“아, 아닙니다. 백작 나리를 뵈러 파도성에 가셨습니다.”

“...그래?”

그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바엘 남작이었다. 로벨의 봉신이었으면 어린 집사가 말리든 말든 한바탕 뒤집어 놓았을 것이다. 물론, 로드릭 가문의 영지에서 ‘감히’ 도적질하는 놈이 있다는 선행조건이 붙지만...

도적떼를 추격한 과묵한 몬트 이하 울프 용병단이 돌아왔다. 기사나 기사 종자라 해도 믿을 만큼 무장이 잘 된 울프 용병단에 마을 주민은 다시 감탄했다. 전쟁 중에 최고의 노획품으로 갈아치워 온 울프 용병단은 전신에 쇳덩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영주님, 세 놈 놓쳤습니다.”

“그 개자식들이 숲으로 튀는 바람에...”

과묵한 몬트의 보고에 마을 주민들이 크게 동요해서 웅성거렸다. 도적들이 돌아와 보복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흉내쟁이가 피와 살점 비슷한 것이 덕지덕지 붙은 숏 스피어를 겨냥하고 짜증냈다.

“고작 셋이잖아? 너희는 100명이고? 사지 멀쩡한 사내놈이 서른 명은 되겠네. 뭐가 그리 무서워?”

“저희들은, 저희들은 싸우는 법을 모릅니다!”

“누구는 날 때부터 싸울 줄 알았나? 여기 기사 나리 빼고 그런 사람 없어!”

“나도 아니야...”

기사와 농민은 종(種)이 다르다고 믿었다. 수백 년 동안 높은 성에서 거들먹거려 온 성과였다. 아무튼, 흉내쟁이의 질타에 마을 주민은 반박하지 못했다. 속으로는 온갖 변명을 대고 있겠으나 그것을 겉으로 표현할 만큼 용감하지 않았다. 그럴 용기가 있으면 애당초 도망간 도적 따위를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에게 시체를-전리품을- 수습하라 명령하고 고민에 잠겼다. 오랜만에 맷돌이 돌아갔다.

시간이 되는가? 에릭 공작보다 먼저 도착하기만 하면 되니 여유가 있다. 상황이 되는가? 이곳 영주가 자리에 없으니 의심하거나 방해받지 않는다. 그럼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로벨은 마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급자족하는 대부분의 시골 마을이 그러하듯 이곳도 숲과 개울과 농지를 끼고 있었다. 도적이 도망간 숲은 울창하진 않아도 규모가 꽤 있었다. 사냥할 때 말고 숲을 찾을 일이 없는 기사와 용병들이 수색하기는 어려웠다.

‘아니지?’

가만 생각하니 직접 수색할 필요가 없었다. 로벨의 식솔 중에는 숲이 삶의 터전인 친구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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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는 간만에 신이 났다. 로벨이 간곡히 부탁하고 마을 주민이 존경심 비슷한 것을 보여준 탓도 있지만, 수목이 우거진 숲에 들어온 것만으로 행복했다.

“와! 정말 깨끗한 숲이에요!”

로벨은 곧게 뻗은 참나무와 가지가 휘어진 자작나무를 번갈아 본 후 의문을 표시했다.

“어디가 깨끗한지 모르겠는데?”

“사기(邪氣)가 없어요. 우리 숲도 나쁘진 않지만, 여긴 더 좋아요! 이 숲에는 몬스터가 하나도 없을 거예요.”

사기가 무엇이고, 어떻게 감지하는지 모르지만, 앞뒤 정황으로 동의했다.

“하긴, 그러니 도적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겠지.”

마녀 키르케의 수족인 아야와 이야카도 신이 났다. 얼마나 신났는지 찾으라는 도적은 안 찾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나뭇잎을 파헤치거나 나무뿌리를 우적우적 씹었다. 마녀 외 인간 일동이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네발짐승을 노려보았다.

“저것들이 쓸모 있는 거 맞습니까요?”

“...아마도?”

로벨도 자신이 없었다. 예전에 고블린이 잡아간 마을 주민을 찾아낸 적 있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다.

늑대 남매는 꼬물꼬물하는 새끼 시절부터 먹이고 재워준 보답을 톡톡히 했다.

“크르르릉...”

“아우우-! 아우우우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늑대의 습성이 남아 있었다. 적을 발견하자 목청 높여 동족을 불렀다. 두 발로 다니지만 ‘늑대’임이 분명한 울프 용병단은 즉시 발톱을 세웠다.

“저쪽입니다요!”

허풍쟁이가 크로스보우를 견착하며 소리쳤다. 굵직한 밤나무와 밤나무 사이로 스무 명 정도 야영하기 좋은 공터가 있었다. 모닥불을 여러 번 피운 듯 재가 한 가득 쌓여있고, 마을에서 약탈해온 음식, 피복, 기타 가치가 있어 뵈는 나무 장신구나 짐승 가죽 따위가 쌓여 있었다. 도적들의 본거지였다.

“우악!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이런 시발! 그러게 빨리 뜨자니까!”

마을에서 도망친 도적이 여기 모여 있었다.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초대받은 기념으로 준비된 쿼럴을 쏘았다. 한 명씩 해치우면 좋았겠지만 아쉽게 같은 사람을 노렸다. 그 덕분에 표적이 된 도적은 가슴과 허벅지에 쿼럴을 맞고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운이 좋아 과녁에서 벗어난 두 명은 다시금 깊은 숲으로 도주했다. 울프 용병단 최고의 아바레스터라도 재장전에 시간이 걸렸다. 로벨은 쿼럴보단 느리지만 준비과정이 필요 없고 유도기능이 추가된 무기를 발사했다.

“물어!”

“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묘사 그대로 ‘쏜살’ 같이 달려 나갔다. 거듭 말하지만 두 발로 네 발을 이길 수 없었다. 아야와 이야카는 평소 취향을 적극 발휘해서 도적의 엉덩이와 발목을 꽉! 깨물었다.

“으아아! 살려줘! 개다! 개야!”

“개 아니고 늑대! 늑대에요!”

마녀 키르케가 정정해주었는데 쇼크로 거품 물고 기절해서 알아듣지 못했다. 홀로 남은 도적은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몰아 느릿느릿 다가갔다.

“사, 살려주세요! 저는, 저는 시킨 대로 한 죄 밖에 없습니다!”

“누가 시켰는데?”

“그, 그것이, 그거, 그것이...”

흐룬팅을 뽑아 아래로 쓱- 쓰윽- 그었다. 늑대의 왕의 강철피부도 찢은 칼이었다. 도적의 엉성한 생가죽 갑옷 따위는 종이장처럼 찢었다.

“히이이이-익-!”

도적은 갑옷이 뭉텅이로 떨어지고 붉은 피가 샘솟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고작해야 살가죽을 벤 수준이다. 워낙 날카로운 탓에 통증도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르륵- 흐르는 피가 더욱 무서웠다.

‘죽, 죽는다! 죽일 거야!’

기사는 철이 들기 전부터 전쟁과 살인을 교육받은 무서운 존재였다. 전쟁터에서 기사를 보면 다섯 이상이 한꺼번에 덮치거나, 다섯이 모두 도망치는 것이 장수의 지름길이다. 그런 기사가 말도 안 되는 칼솜씨로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아바레스트의 장전을 끝낸 용병이나 피 묻은 주둥이로 으르릉- 거리는 회색늑대보다 말 위에서 내려다보는 철가면이 지독히 공포스러웠다.

“바엘 남작! 바엘 남작입니다! 바엘 남작이 시켰습니다! 원하는 만큼 야, 약탈하라고! 저는, 저희들은 시킨 대로 했습니다! 진짜입니다!”

공포심을 조장하는 바이저는 황당함을 숨기는데도 요긴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 속에서 적잖이 당황했다.

“자기 마을을 습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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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시체 가슴에서 쿼럴을 뽑으며 말했다. 핏물을 털어내고 촉이 상하지 않았나 유심히 살폈다. 여름답지 않게 차갑게 식은 고깃덩이에는 관심주지 않았다. 그것은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허풍쟁이 제이콥이 은근히 순진한 고용주를 위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마을주민이 빼앗긴 것은 세금이 아니니까요. 영주가 걷어갈 세금은 벌써 걷어갔고, 남은 잉여작물이나 사유재산은 영주도 알 바 아니지요. 아니, 그런 것은 없어지면 좋지요. 농민이 자유를 찾아 떠나지 못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야?”

“최근 로드릭 마을 인구가 많이 늘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아십니까?”

다시 애꾸눈이 말했다. 질문에 질문이 돌아와 조금 당혹스러웠다.

“전쟁으로 생긴 난민이잖아?”

“그것은 작년까지 일입니다. 올해에는 늑대성 주변에 별다른 전쟁이 없었지요. 그런데도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지 않습니까?”

“설마, 도망친 농민들이야?”

“로드릭 마을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인자한 영주님 아래에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도시입니다. 자유와 성공을 찾아 오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로벨은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몰라 일단 잡아뗐다.

“난 그런 이야기 못 들었어!”

“영주님은 그 옛날 깁스 남작과 드잡이하던 시골 기사가 아닙니다. 어느 누가 영주님께 자기 농민을 돌려달라고 하소연하겠습니까. 영주님의 분노를 사서 좋을 것이 없을뿐더러, 자기 영지도 관리 못하는 무능한 영주가 될 뿐이죠.”

“그래서?”

“그런 이유도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까지 안 가도 급료를 주기 싫어 합의를 보았을 겁니다.”

흉내쟁이가 빼앗은 스파이크 클럽으로 포로의 등짝을 두드렸다. 죽으라고 때린 것은 아니지만 쇠못이 박힌 몽둥이가 호의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도적은 고문 받는 것처럼 자지러졌다.

“언제까지야? 이곳 영주가 언제까지 약속했냐!”

흉내쟁이가 연거푸 때리며 심문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어도 자기 텃밭을 무기한으로 약탈하게 방관할 리 없었다.

“여, 열흘이오! 열흘 동안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오늘이 며칠 짼데?”

“아흐레... 아흐레째요...”

“그으래? 너희도 참 운이 없다.”

하루만 일찍 떠났어도, 혹은 로벨이 하루만 늦게 출발했어도 한몫 챙겨서 새로운 물주를 찾아 떠났을 것이다.

로벨도 비로소 상황파악을 끝냈다. 그리고 한 가지 앞서 짐작했다.

“그렇다면 바엘 남작은 내일 돌아오겠네?”

애초에는 피해갈 작정이었지만,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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