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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13화 (213/605)

213화. 도적떼

213화. 도적떼

로벨 일행은 페르젠 시티에서 노스폴드 시티로 이어지는 가도를 따라 느릿느릿 이동했다. 가도(街道)라고 하지만, 누가 관리하는 포장도로가 아니라 행상인이 오가며 만들어낸 자연 그대로 길이라 바닥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여름 햇살을 한껏 빨아들인 잡초와 3일에 한 번씩 쏟아진 소나기에 움푹움푹 파인 구덩이로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덜컹! 덜컹! 덜커덩-!

수레가 상하좌우로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수더분한 짐말과 여행에 이골이 난 허풍쟁이는 수레와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였지만, 수레 뒤 칸에 걸터앉은 마녀 키르케는 멀미를 호소하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으... 으앙... 왜 이런 길로 가는 거예요?”

그럼에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는 것이 고집이라면 고집이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수레 옆에서 차갑게 대꾸했다.

“동쪽으로 가면 도적 무리를 만나니까. 그놈들도 머리가 있으면 영주님에게 덤비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이오.”

“도적떼요?”

“아군의 추격을 피해 화급히 도주한 구왕파 영주들이 쓸모없어진 용병을 챙겨갔겠소? 계약을 해지하고 길바닥에 팽개쳤겠지. 그렇게 밥줄 끊긴 용병들이 할 일이 뭐가 있겠소?”

“아하!”

겉으로는 차갑지만 꼬박꼬박 대답해주는 것이 속내는 친절했다. 그 사실을 애꾸눈 볼포스 빼고 다 아는 듯 푸짐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로벨은 모닝스타 위에서 곧은 듯 곧지 않고 굽은 듯 굽지 않은 길을 멀리 내다보았다. 저 멀리 검은 산이 희미하게 보이고, 소낙비에 불어난 개울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고, 물 너머로 잡목이 우거진 황야가 무명천처럼 펼쳐져 있었다. 여름치고 시원해서 여행하기 딱 좋았다.

모닝스타는 간만에 외출에 기분 좋은 듯 네 발을 높이 치켜들며 총총 걸었다. 간밤에 살 오른 토끼를 포식한 아야와 이야카는 눈부신 햇살이 못마땅한 듯 코를 벌렁거리다 크게 하품했다.

기수를 자처했으나 지루한 여정에 지쳐서 깃발을 어깨에 걸친 흉내쟁이가 불현듯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전방에 사람입니다!”

“나도 봤어.”

로벨은 별 말 없이 소드 벨트를 끌어내려 뽑기 좋게 준비했다. 노련한 용병들도 내색하지 않고 병장기를 준비했다. 애꾸눈 볼포스는 쿼럴을 입에 물고 아바레스트를 윈드라스로 감은 후 몸체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행색을 보아 행상인 무리 같습니다.”

“용병이 끼어 있는데?”

울프 용병단에 비하면 대단히 빈약한 하이드 아머, 클로스 아머 따위를 입고, 저렴한 스파이크 클럽과 짤막한 보우 스피어 등으로 무장한 소규모 용병 무리였다.

그간 휘황찬란한 기사들과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상대한 탓에 눈이 높아져서 그렇지, 저 정도만 되어도 제법 구색을 갖춘 용병단이었다. 욕심 많은 유랑민이나 길 잃은 고블린을 쫓아내기는 충분했다.

“저 정도 인건비를 뽑을 정도면 화물이 대단하겠는데?”

울프 용병단의 삶보다 떠돌이 용병의 삶이 훨씬 긴 흉내쟁이가 입술을 핥았다. 기회가 되면 도적도 되고 상인도 되는 것이 ‘진짜’ 용병이었다. 유리한 쪽에서 돈 되는 상품을 보니 욕심이 안 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저놈들이 아니라 기사 나리 칼에 목이 달아날 테니까.”

“아니면 내 칼에 달아나거나.”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나직이 경고했다. 흉내쟁이는 움찔해서 ‘내, 내가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하고 중얼거렸다.

로벨 일행은 경계를 풀지 않고 천천히 접근했다. 그러나 진짜 경계심이 극에 달한 것은 행상인 무리였다. 누가 봐도 전쟁을 업으로 삼는 기사와 용병들, 고깔모자를 눌러쓴 마녀와 성인 남자도 우습게 물어 죽일 거대한 회색늑대를 보고 반가울 행인은 없었다.

눈초리가 사나워지고, 흉악한 무기에 힘이 들어갔다. 거리가 스무 걸음 내외로 좁혀지자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 말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순간, 로벨이 칼자루에 손을 얹고-비명이 나올 뻔했다- 상단주를 찾았다.

“누가 책임자야?”

그냥 지나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깨졌다. 수도사처럼 정수리가 벗겨진 중년 남성이 용병 뒤에서 소리쳤다.

“저, 접니다! 제가 상단주입니다!”

“어디 가는 길이야?”

“노스폴드 시티를 지나서 부, 북쪽 마을로 갑니다. 저어, 나으리께서는...?”

로벨은 흉내쟁이 어깨에 걸쳐진 깃발을 가리켰다. 바람이 없어 깃이 축 쳐져 있었다. 흉내쟁이는 코를 훌쩍이고 깃발을 좌우로 흔들었다. 볼탄 반도에서는 왕가의 깃발보다 유명한 로드릭 가문의 깃발이 펼쳐졌다.

“히익! 로드릭 백작님! 아니아니! 로드릭 후작님! 제가 몰라 뵙습니다!”

상단주는 화급히 앞으로 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사실 로벨의 아랫사람이 아니면 부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남의 땅을 수시로 지나가는 행상인은 대영주의 심기를 살펴야 했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까우니까. 심지어 영지에서는 법과 주먹이 모두 영주 손아귀에 있었다.

로벨은 어중간한 위치에서 갈등하는 상단 용병을 둘러보고 물었다.

“무장이 과한데? 무슨 일이야?”

도끼를 쥐고 주머니칼을 가진 사람한테 무장 운운하는 격이지만, 그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이구, 시절이 시절인지라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요.”

“많이 안 좋아?”

“그야 말도 마십시오. 어제 지나온 마을만 해도 못된 놈들이 패악질을 부려서 엉망입니다. 이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화물도 잃고 목숨도 잃었을 겁니다.”

행상인이 의미심장하게 상단 용병을 내세웠다. 상단 용병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감을 뽐냈다. 물론 울프 용병단은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로벨은 허공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여긴 페르젠 백작의 땅이야. 백작이 도적떼를 방치해?”

“사실 정확히는 페르젠 가문의 봉신인 바엘 남작의 땅입지요. 그 남작이 저번 전쟁에 공을 세우겠다고 용병을 십 수 명 고용했는데, 임금을 제대로 안 주고 내치는 바람에 도적떼가 되었습니다.”

로벨 일행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용병 문제는 승리한 쪽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일을 페르젠 백작에게 전한 사람이 없어?”

“저희 같은 떠돌이와 무지렁이가 어디 백작 나리를 뵙겠습니까? 징수관 나리께 말은 전했지만, 아마 전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로벨도 이해되었다.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 성격상 전쟁과 전공 외에는 하등 관심이 없을 것이다. 설령 관심이 있어도 봉신의 일에 끼어들기 힘드니 끽해야 도적토벌을 권유하는 정도일 테고, 바엘 남작은 주군의 체면을 생각해 시늉 정도만 하고 말 것이다. 도적이 끼치는 피해보다 도적토벌에 들어가는 비용이 더 크면 무리할 리 없었다.

“그래. 잘 알았어.”

로벨은 길을 비키라고 손짓했다. 상단주는 엄한 마부에게 호통치며 길을 널찍이 열었다. 인원으로 보나 수레 숫자로 보나 로벨 일행이 비키는 쪽이 수월하겠지만, 세상은 효율이 전부가 아니었다.

울프 용병단은 고용주의 신분으로 갈린 승부에 의기양양해서 상단 용병을 비웃었다. 가진 것이 자존심뿐인 상단 용병은 욱! 했지만 끝내 참았다. 그 유명한 그랜드 챔피언과 울프 용병단에게 덤빌 만큼 자존심이 비싸지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인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로벨이 입술을 떼자 허풍쟁이 제이콥이 재빨리 선수쳤다.

“안 됩니다요.”

“...뭐가?”

“아무튼 안 됩니다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허풍쟁이가 채찍을 치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우린 고작 5명입니다요. 거, 십 수 명이란 거 보니까 못해도 10명은 넘을 텐데, 영주님은 몰라도 저희들은 위험합니다요.”

로벨은 흉갑을 쾅쾅 두드렸다.

“내가 절반 정도 감당할 수 있어.”

“예예. 기사 나리가 있으니 이기기야 하겠지요. 근데 다른 기사 나리 땅 아닙니까? 그것도 정적인 페르젠 백작의 봉신이요. 공적을 인정받기는커녕, 구설수에 오를 뿐입니다요.”

로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생각을 도로 삼켰다. 기사의 명예와 농민의 고통만 생각했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노인과 아녀자. 고통 받는 농민을 구하는 것이 기사의 본분인데...”

“기사 나으리들 말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본분입죠.”

로벨은 계속 고민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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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이 지나자 상단주가 말한 바엘 남작의 마을이 나타났다. 거주민이 100여 명으로 정밀한 군사지도가 아니면 표시조차 안 되어 있는 작디작고 흔하디흔한 시골 마을이었다. 그나마도 로드릭 시장이 활성화되고 행상인이 오가면서 발전한 것이지, 2, 3년 전만 해도 춘궁기에 풀뿌리 캐 먹던 그야말로 깡촌 중에 깡촌이었다.

“이런 시골 영주가 용병을 두 자릿수나 고용했다고?”

“이것도 기사님의 영향이죠.”

로드릭 시장을 찾아가는 행상인에게 통행세를 걷어 배를 채웠을 리라. 그렇다고 죄의식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용병을 고용하지 않았으면 영지민을 징집했을 테니까.

“조용히 지나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애꾸눈 볼포스가 제안했다.

타인의 영지를 지날 때는 영주를 만나 적당하게 진상품을 바치고 적절하게 대접을 받는 것이 예의고 관례지만, 여정 중에 방문하는 영지가 한둘이 아닌데 매번 예의 차리기가 곤란했다. 가문의 위세나 이해관계에 따라 조용히 지나가기도 했다. 그편이 주인이나 객이나 편할 때가 많았다. 오랫동안 귀족 밑에서 일한 애꾸눈은 그런 일을 잘 알았다.

“그래도 보급은 해야지.”

로벨이 수레를 돌아보았다. 마녀 키르케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딱딱한 비스킷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 맛은 표정으로 일러주고 있었다.

“도적떼가 휩쓸고 지나갔으면 어차피 남은 것이...”

“어어억! 기사 나리! 불입니다요!”

그때, 마을 울타리 너머로 불길이 치솟았다. 짚과 나무로 만든 집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에서 화재는 아주 큰 일이었다. 로벨 일행은 잡담을 멈추고 마을을 주시했다.

“사고일까?”

그건 아니 듯했다. 비명 사이로 걸쭉한 웃음과 흉포한 욕설이 들려왔다. 불을 보고 웃는 자는 불을 지른 사람뿐이리라.

“그 도적떼가 찾아온 모양입니다.”

로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이거 참! 이거 어쩔 수 없네. 바엘 남작한테 미안하지만, 도적이 습격했으니 싸워야지. 암. 암.”

“...입술에 침을 바르고 말씀하시지요.”

로벨은 침보다 좋은 것이 있었다. 말안장에서 파나케아 투구를 풀어 눌러쓰고 바이저를 내렸다. 차가운 가면 속에서 뜨거운 안광이 번쩍였다.

“과묵한 몬트, 흉내쟁이 퍼시발, 내 뒤를 따라와. 애꾸눈 볼포스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좌우로 이동해서 엄호 사격해. 적의 숫자를 모르니까 위치를 노출하지 마.”

“컹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우린 왜 무시하냐는 듯 소리 높여 짖었다. 로벨은 머뭇거리다가 추가로 명령했다.

“음... 아야와 이야카는 수레를 지켜.”

그러자 마녀 키르케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저는요? 저요! 저!”

“키르케는 아야와 이야카를 지키고.”

조용히 빠지라는 뜻이지만 당사자들은 좋다고 ‘히히힛!’ 웃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들에게 외쳤다.

“Char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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