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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12화 (212/605)

212화. 모함

212화. 모함

로벨은 오른쪽 폴드런을 앞뒤로 둘러본 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늑대의 왕이 6피트짜리 송곳니로 깨문 자국이 선명했다. 철판 한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모퉁이가 5인치 정도 찢어졌다. 그것만 봐도 무시무시한 괴력이 떠올랐다.

로벨은 진저리치고 멀쩡한 파츠만 모아 더블릿에 부착했다. 폴드런 뿐만 아니라 스커트도 심하게 망가져서 잠기지 않았다. 결국 플레이트, 컨틀렛, 퀴스, 그리브만 남았다. 어깨와 사타구니가 조금 허전했다.

“역시 수리해야겠어.”

로벨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뭔가 부족한 듯 한마디 덧붙였다.

“가능한 빨리.”

로벨은 소드 벨트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에서 나와 메인 홀로 내려왔는데, 성 안이 이상하게 조용함을 깨달았다. 어린 집사도, 마녀 키르케도, 펄프 대장도, 아야와 이야카도 없었다. 성문을 지키는 용병 두 사람이 무어라 잡담하긴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역시 조용했다.

‘다들 어디 갔지?’

로벨은 한가로운 심정으로 메인 홀을 나와 성문으로 향했다. 시답잖은 농담하던 울프 용병단이 고용주를 보고 창을 바로 잡았다.

“기사 나리!”

로벨은 근엄하게-그러나 용병들이 볼 때 자상하게- ‘수고해’ 한 마디하고 늑대성을 빠져나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의 전성기는 전쟁과 함께 지나갔다. 하늘은 덧없이 높고 태양은 한없이 깨끗했다. 뜨거운 공기 속에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섞여 불었다.

“푸르릉- 푸르릉-”

모닝스타가 게으른 사자처럼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엉덩이 하나 겨우 붙일 작은 승마용 안장을 얹고, 그 아래로 가벼운 나무등자를 달았다. 날씨가 좋고 몸이 가벼워 한바탕 달리기 좋았지만, 로벨은 달리지 않았다. 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느긋하게 걸었다. 사람도 말도 가끔은 휴식이 필요했다.

늑대성 언덕 아래로 몰라보게 번화한 로드릭 마을이 보였다. 기존 영지민, 새로 정착한 자유민, 이웃 영지의 방문자와 행상인 등의 유동인구까지 더해 족히 1,500명은 될 것이다. 3층짜리 고층건물도 들어서고, 지미와 루시의 여관을 위협하는 새로운 여관이 새겨나 빈 방 없이 꽉꽉 들어찼다.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는 종종 개울과 숲을 경계로 성벽을 세워 도시화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하면 매년 홍역처럼 치르는 늑대와 몬스터 습격 문제도 사라지고, 전쟁이 일어나도 삼중방어로 수월히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꿈같은 일이었다. 마을 전체를 감싸는 성곽을 세우는 것은 늑대성 증축과 비교가 안 되는 공사기에 지금의 자금력으로 힘들었다.

‘얘네가 어디 갔을까?’

로벨은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내려와 로드릭 마을에 들어섰다. 로벨을 알아본 영지민과 행상인이 걸음을 멈추고 꾸벅 인사했다. 조금 망가지긴 했어도 값을 속이지 못할 필드 아머와 가장 까다로운 말상인도 감탄하지 않고 못 배길 모닝스타가 있다 보니 못 알아보기가 더 힘들었다.

“마로드.”

로벨은 모자를 벗고 반짝이는 민머리를 드러낸 방앗간 관리인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우리 집사 못 봤어?”

“어린 집사요? 어린 집사라면 아마도... 그러니까...”

경제의 기반이 농지에서 시장으로 넘어간 탓에 방앗간 관리인의 위세가 예전만 못했다. 그럴 때 ‘무려’ 영주가 아는 척해주자 표정이 밝아졌다. 로벨과 친분을 과시해 건방진 젊은 것들과 무례한 외지인들의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지만, 로벨의 얼굴에 짜증 비슷한 것이 보이자 즉시 계획을 수정했다.

“방금 전 공용창고로 갔습니다. 새 촌장이 일을 못해서 답답해하더군요.”

자신을 높일 수 없으면 경쟁자를 깎는다! 나름대로 정치력을 발휘했으나 수준이 너무 낮았다. 자신과 상대방 모두 말이다. 로벨은 ‘공용창고’란 단어만 새기고 나머지는 2초도 지나지 않아 잊어버렸다.

“고마워.”

로벨은 방앗간 관리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시장 구석진 곳에 자리한 창고로 향했다.

그 사이 방앗간 관리인은 ‘봤지? 봤지? 난 영주님과 이렇게 친한 사이야!’ 얼굴로 주변 사람을 둘러보았고, 거기에 탄복한 이주민과 행상인은 시급히 친해질 토착민 목록에 방앗간 관리인을 추가했다. 어느 곳에나 있는 정치와 파벌이었고, 거시적으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로벨은 십 년이 지나 낡고 부실해진 공용창고를 올려다보았다. 새로 지은 로드릭 상회 창고와 비교하면 이름 그대로 헛간 수준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지은 곳이야.’

로벨은 창고 앞에서 잠깐 멈춰 섰다. 잠시 감성에 젖고 싶었지만, 머리 위의 햇살과 시장 상인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그러지 못했다.

모닝스타의 고삐를 풀어주고 털레털레 추억 속 창고로 다가갔다.

“컹! 컹!”

창고 안에서 익숙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개보다 사납고 늑대보다 정겨운 기묘한 울음소리였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로벨은 창고문을 활짝 열고 반가운 기분에 성큼성큼 들어갔다.

“여기서 뭐해?”

키와 덩치가 비슷해서 얼굴까지 비슷해 보이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로벨을 반겨주었다.

“영주님! 이 마녀가 자꾸 이상한 소리해요!”

“기사님! 이 꼬맹이가 자꾸 마녀라고 놀려요!”

심지어 말하는 것까지 비슷했다. 쌍둥이라 소개해도 믿지 않을까?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기 좋아.”

쌍둥이가 동시에 악을 썼다.

“뭐가 좋아요! 뭐가!”

화내는 모습도 꼭 닮아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로벨은 토라진 어린 집사를 달래며 장부정리를 도와주었다.

로벨이 숫자에 약해서 그렇지, 바보는 아니었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만으로 평범한 농부와 용병이 할 수 없는 행정능력을 갖춘 셈이다.

“그런데 왜 갑옷이에요?”

“그냥... 그냥 입어 봤어. 그냥.”

로벨은 어깨와 허벅지를 가리키며 ‘그냥’을 반복했다. 아야와 이야카도 안 믿을 ‘그냥’ 이었다. 어린 집사는 입술을 삐쭉이고 말했다.

“안 그래도 갑옷장인을 찾았어요.”

“그래?”

“프란시스 시티의 공방장인이잖아요.”

“언제 올 수 있어?”

“영주님이 직접 오셔야 한데요.”

로벨은 장부를 치우고 불편한 기색을 띠었다. 아무리 대단한 장인이라도 평민이었다. 자비로운 로벨이라도 오라 가라 소리를 들으면 불쾌했다. 어린 집사가 재빨리 오해를 풀어주었다.

“아니면 갑옷만 보내도 되고요. 장비가 그쪽에 있어서 출장이 어렵데요.”

“그건... 그렇겠네.”

로벨은 망가진 필드 아머를 쓸어 만졌다.

“그럼 허풍쟁이를 보낼까?”

저 멀리 울프 용병단 숙영지에서 신병들을 모아놓고 거들먹거리던 허풍쟁이가 재채기했다. 그러나 어린 집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영주님만 괜찮으시면 영주님이 직접 가는 게 좋아요.”

“그래? 왜?”

“겸사겸사 할 일이 있거든요.”

어린 집사가 서류 몇 장을 빼서 보여주었다. 사트로 시티의 향신료 가격 폭락, 버팅거 시티의 곡물 가격 안정 등의 내용이 복잡한 설명과 어려운 용어로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로드릭 상회로 올라온 보고서에요. 큰돈 들여서 지부를 세운 보람이 있어요.”

페리 피터 행정관의 소개로 고용한 고급 인력이 이제야 빛을 발했다. 어린 집사가 눈에 띄는 내용을 설명했다.

“북쪽에서 향신료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아마도 영주님 때문일 거예요.”

“나?”

“그쪽 영주들을 포로로 잡았잖아요. 그 몸값을 마련해야하니 당분간 허리띠를 졸라매겠죠. 후추, 계피, 설탕뿐만 아니라 귀금속도 한동안 하락세일거예요.”

로벨은 조그맣게 감탄했다. 전쟁의 여파가 이런 사소한(?) 곳까지 구석구석 미치는 것이 신기했다.

“버팅거 시티의 곡물가격은?”

“전쟁 중에 보리를 사재기한 상인이 뒤늦게 푸는 거겠죠. 볼프 후작이 이렇게 빨리 철수할 줄 몰랐을 테니까요. 그쪽 상인들은 속이 많이 쓰릴 걸요?”

로벨은 처음과 다른 이유로 재차 감탄했다. 어린 집사가 똑똑한 것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볼탄 반도 전역을 아우르는 상재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어린 집사는 로벨이 보고서를 꼼꼼히 읽을 리 없음을 깨닫고 로벨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주었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보내온 이번 달 보고서에요. 앞부분은 교역량 부분이니까 건너뛰시고, 여기부터 읽어보세요.”

로벨은 나이 지긋한 노인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고 보고서를 읽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돌아온다고?”

“아직은 소문이에요. 하지만 가능성이 높아요. 아무리 정통성이 증명된 공작님이라도 본거지를 오래 비울 수 없으니까요. 주인이 신경 쓰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도둑이 되는 법! 자비에 후작 파벌과 반목도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니 돌아올 때가 됐어요.”

이것도 로벨과 무관하지 않았다. 로벨은 프란시스 지부장의 보고서를 좀 더 읽어보았다. 큰 연회가 열리고 본격적인 논공행상이 있을 테니 고급 식자재와 귀중품을 확보하자는 내용이었다. 어느 도시에서 교육받았는지 문장이 간결하고 필체가 시원시원해서 읽기 편했다.

“에릭 공작님이 오시면 제일 먼저 영주님을 소환, 아니, 초대할 거예요.”

“그럴까?”

“이제 로드릭 가문은 옛날의 비루한 세습기사 가문이 아니에요. 볼탄 반도의 4분의 1을 지배하는 당당한 제후 가문이죠!”

“그, 그렇지.”

볼탄 반도의 백작이 되고 포클랜드의 후작이 되었지만, 그 속은 농민 300명의 작은 농촌을 다스리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보리빵을 즐겨 먹고 맥주로 배를 채웠다. 사치 비슷한 것도 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외부의 시선에 적응 못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미리 가서 마중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혹여나 있을 의심과 모함을 사전 차단하고, 프란시스 가문을 향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거죠.”

로벨은 무엇을 의심하고 왜 모함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어린 집사는 기사의 명예밖에 모르는 착한 영주를 사랑하면서 답답해했다.

“공작님이랑 친하게 지내라구요! 기왕 간 김에 먹지도 못하는 갑옷 수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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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등 떠밀려서 여행준비를 끝냈다. 로벨이 늑대성에서 처리해야 할 일은 굵직한 소송이나 예산 관련 승인뿐이라, 그것만 해결하면 나머지는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처리할 수 있었다.

“추수제 전에 돌아오려면 서둘러 가야 해요.”

유능한 행정관이 있어 편한 듯 편하지 않았다.

“언제는 성에 가만히 있으라고 혼내더니...”

“그때랑 사정이 다르잖아요? 그리고 에릭 공작님만 보고 바로 오세요. 괜히 다른 영주가 초대한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요. 영주님은... 아시잖아요?”

“응.”

로벨은 모닝스타의 안장끈을 쪼이고 훌쩍 올랐다.

로벨의 신임을 받는 울프 용병단에서도 특별히 더 받는 고참 용병, 허풍쟁이 제이콥이 수레를 끌고 오며 구시렁거렸다.

“이 정도로 끌고 다니면 기사 종자를 시켜주시던가...”

“그 나이에 기사 종자가 가당키나 하냐?”

허풍쟁이 제이콥 외에도 애꾸눈 볼포스, 과묵한 몬트, 흉내쟁이 퍼시발, 마녀 키르케가 수행원으로 뽑혔다. 늑대성의 위엄을 과시할 아야와 이야카는 덤이었다.

“영지일은 걱정 말고 조심히 다녀와요.”

“응. 걱정 안 해.”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손을 흔들고, 혹시나 서운해할지도 모를 펄프 대장, 리암 수사, 외팔이 더치 등에게도 손을 흔들어준 후 기수 뒤에 붙었다.

영주님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마을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꾸벅 인사했다. 근심걱정은 보이지 않았다. 로벨이 없어도 어린 집사가 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린 집사가 영지의 실권을 장악한 것에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로벨과 어린 집사의 관계를 잘 아는 로드릭 마을 토박이와 어린 집사가 무슨 짓을 꾸미든 로벨의 군대 장악력 앞에서 무의미함을 아는 노회한 용병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올 때 맛난 거 사 와요! 너무 비싼 거 말고요!”

“응!”

저런 모습을 보면 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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