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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11화 (211/605)

211화. 창고

211화. 창고

약 100일 만에 돌아온 로드릭 영지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우선 로드릭 항에서 노스폴드 시티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완공되었다. 늑대성을 중심으로 볼탄 반도 북서부를 아우르는 교통망이 생긴 것이다. 자연히 로드릭 마을과 시장도 빠르게 번창했다.

“으으으... 오셨군요... 으으으으...”

리암 수사가 30년 묵은 구울 같은 몰골로 나타났다. 어린 집사가 자리를 비운 통에 홀로 막대한 업무량을 소화해야 했다.

“이쪽은 춘경지 토지세랑 시장 관세랑 도로 통행세랑 기타 세금 항목이고, 저쪽은 로드릭 상회장이랑 뉴 로드릭 마을 행정관의 보고서고, 위쪽은 상반기 예산집행 보고서고, 아래쪽은 소송 관련 탄원서랑 포로 몸값 협상안이랑 기타 영주님이 확인하셔야 할 편지고, 반대쪽은 회색산의 소금 생산량이랑 이안 선장님이 보내온 정기교역 보고서고, 아, 버팅거 시티의 보고서는 아직 안 올라왔어요. 그리고 또...”

“그만! 그만해!”

로벨은 진저리치고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리암 수사는 보고할 것이 남은 듯 움찔했지만, 어째서인지 붙잡지 않았다.

로벨은 메인 홀로 내려가 꼬리 흔드는 아야와 이야카를 쓰다듬고 성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어둑어둑한 것이 소낙비가 내릴 것 같았다. 이 시기에 내리는 비는 고마운 비였다.

로벨은 마구간으로 향했다. 한나절 정도 숨어있으면 유능한 어린 집사가 말끔히 처리해 놓을 것이다. 그러나 마냥 좋은 일만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마구간에 들려서 모닝스타의 편자를 확인하는데, 검은 숲에서 귀환한 부상병이 로벨을 찾아와 침울하게 보고했다.

“코골이 바디가 죽었습니다요.”

“...아.”

한껏 올라간 기분이 단숨에 곤두박질쳤다. 울프 용병단의 소대장이자 후계자 전쟁 때부터 함께한 원로 용병이 전사했다. 끝내 열독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시신은?”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했습니다요. 리암 수사님이 직접 장례를 치러주었으니까 좋은 곳에 갔을 겁니다요.”

리암 수사의 불안한 모습은 코골이 바디의 죽음과 관련 있었던 모양이다.

“너희는 괜찮아?”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야. 펄프 대장과 만나서 이야기해봐.”

용병들은 모자를 벗어 꾸벅 인사한 후 떠났다. 로벨은 마구간 기둥을 짚고 상체를 숙였다. 전쟁의 피로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다리에 힘이 빠졌다. 모닝스타가 걱정되는지 주둥이로 주인을 툭툭 두드렸다. 그 바람에 왈칵 눈물이 나왔다.

“코골이가... 코골이 바디가...”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은 몇 번을 되풀이해도 익숙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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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준비할 때도 바쁘지만, 뒷정리할 때도 만만치 않게 분주했다. 전쟁수당을 지급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소모된 무기와 물자를 보충하고, 전공을 검토해 공명정대하게 논공행사를 치러야했다.

“내 칼... 내 갑옷...”

로벨은 두 동각 난 대거와 깨지고 찌그러진 필드 아머를 부둥켜안았다. 무구(武具)는 기사의 상징이자 보물이자 자존심이었다. 무기와 갑옷을 갖추지 않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기사라 주장할 수 없었다.

“그때 그 장인을 불러서 수리해요. 안 되면 새로 만들죠. 까짓 용병 20명만 자르면 되는데 어려울 거 있나요.”

로벨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화급히 가로저었다. 암만 그래도 최정예로 단련된 울프 용병단을 해고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 녀석들은 멀쩡하니까...”

로벨은 길고 짧은 두 자루 롱소드를 끌어당겼다. 호수의 검 아론다이트와 요정의 검 흐룬팅이었다.

“새 갑옷을 구해줘. 부탁할게.”

“아니, 뭐, 그런 얼굴로 부탁하면 거절을 못 하잖아요. 에라이! 포로로 잡은 기사들 몸값이 있으니까 어떻게 되겠죠!”

“그, 그렇지? 그럴 거야!”

로벨과 어린 집사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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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갑옷 문제까지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자 간신히 영지가 안정되었다.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고 곡물 가격이 평소 수준으로 낮아졌다.

북쪽에서 내려온 행상인을 만나 이야기하니까 볼프 후작과 구왕파 군대도 해산했다고 한다. 이유는 로벨 쪽과 비슷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군대를 계속 유지하기란 부담스러웠다. 그 덕분에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도 한 시름 놓았다.

“결국 흐지부지 끝났네요.”

“높으신 놈들이 하는 짓이 대체로 그렇잖아?”

펄프 대장은 로드릭 시장을 방문한 행상인에게 상납 받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고 시니컬하게 말했다.

전쟁의 7할은 시답지 않은 이유로 시작되고, 그중 다시 7할은 아무 성과 없이 피만 흘리고 끝난다. 그것이 영주들의 이권다툼이었다.

“우리 용병들이야 돈만 받음 되지.”

“그것도 옛말이잖아?”

허풍쟁이 제이콥이 주석잔에 고인 이슬과 지푸라기를 비우고 숨겨둔 와인을 따랐다.

울프 용병단은 적당한 호칭이 없어 용병단이지, 흔히 생각하는 용병단과 달랐다. 로드릭 가문의 호위병이자 수비병, 즉, 사설 용병단이었다. 로드릭 가문이 잘 되어야 울프 용병단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궁극적인 목적이요?”

이번 전쟁으로 제법 다부져진 신입 용병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몸이 단련되고 정신이 날카로워져도 마음은 아직 어렸다. 외팔이 더치와 애꾸눈 볼포스가 음험하게 속삭였다.

“목적? 당연히 있지!”

“그것도 아주 큰 목적이다.”

그 외에도 경력 좋은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진짜 심각했다. 신입 용병은 괜한 곳에 발을 담근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끝내 호기심을 떨치지 못했다.

“그, 그게, 그게 뭔데요?”

펄프 대장은 씨앗만 남은 사과를 건초 위로 던지고 벌러덩 누웠다.

“오래오래 살아서 집 짓고 밭 일굴 땅을 안고 은퇴하는 거. 참고로 내가 가장 가깝다.”

“...그게 다에요?”

진지하게 반란까지 생각한 신입 용병은 그만 맥이 빠졌다. 허탈해서 소심하게 항의했다.

“기사가 된다거나, 영주가 되는 게 아니고요?”

“이놈의 자슥 보쇼? 기사? 영주? 지금이 샘 포클 시대냐? 동방원정 시절인 줄 알아?”

“카하핫! 이 꼬맹이 누가 가르쳤냐?”

“코골이 바디야.”

“...제길. 자식 교육 잘 시키라고 혼내지도 못하겠군.”

조롱이 끝나자 씁쓸함이 남는 기이한 분위기였다. 허풍쟁이가 와인잔을 옆으로 돌리고 친절히 말했다.

“코골이를 봤잖아? 남 일이 아니야. 우리도 언제 어느 곳에서 화살에 맞아 쓰러질지 몰라.”

“전쟁터에서 죽으면 그래도 다행이지. 열독이 올라 죽을 수도 있고, 내장이 꼬여 죽을 수도 있다. 팔다리 하나 내줘서라도 살아남으면 억세게 운이 좋은 거야.”

겁쟁이 데비가 훈계하자 외팔이 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이 아주 높았다.

“그러니까 펄프 대장이랑 기사 나리랑 잘 따라다녀. 안 죽고 살아남은 늙은 용병이랑 깃발 날리는 기사 나으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하다못해 옛 신의 가호라도 받는 거지. 덜 여문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닥치고 따르는 게 좋아.”

신입 용병이 굵은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동의하는 눈치였다. 한 사람만 빼고 말이다.

“오래 따라 다니고 싶으면 여기서 노닥거리면 안 될 텐데요?”

마을 공용창고가 활짝 열리고 아침 햇살을 등진 기다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림자의 머리가 막 술잔을 기울이던 겁쟁이 발끝에 정확히 닿았다. 겁쟁이는 별명답게 화들짝 놀라 귀한 술을 내뿜었다.

“마을 밖을 순찰하라고 내보냈더니 여기 짱 박혀서 술이나 홀짝거려요?”

그림자가 허리에 손을 얹고 한겨울의 폭풍처럼 질책했다. 변성기가 찾아와 굵고 거칠지만, 그럼에도 왕년의 까칠함이 남아있는 목소리였다.

“이크!”

“도망가자!”

세간의 명성 그대로 ‘날고 기는’ 울프 용병단은 어린 집사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크고 무거운 병장기와 육중한 갑옷이 무색하게 재빨랐다.

어린 집사는 체념에 가까운 한숨을 짧게 내쉬고 벽에 걸린 랜턴을 뽑았다. 급료 도둑들이 그래도 상식은 있어서 불을 피우지는 않았다. 창고에 불을 내며 최고 사형이고, 최소도 사형이었다. 아무튼 죽는다.

이곳 로드릭 마을 공용 창고는 올해 수확한 봄 작물로 가득 차 있었다.

“와아-!”

어린 집사 뒤로 새로운 식충이들이 따라 들어왔다. 먼저 와 있던 식충이들보다 덩치는 작지만 훨씬 사납고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이 정도면 겨울까지 먹겠는데요? 그치? 그치?”

“컹! 컹컹!”

마녀 키르케는 손뼉 한번 치고 도로 나갈 자세를 취했다. 어린 집사가 마녀의 꼬뜨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렇게 일하면 누가 못해요! 시끄럽고! 이거 받아요!”

어린 집사는 랜턴에 불을 밝힌 후 마녀에게 들려주었다. 마녀는 입술을 삐죽이고 집사의 집사 노릇을 수행했다.

“가만있자... 저쪽은 작년 가을 수확물이고, 이쪽이 올봄 수확물이죠.”

어린 집사는 장부를 꺼내서 저장된 곡물의 수량을 맞췄다. 어린 집사가 직접 할 일이 아니지만, 장부가 틀어지자 못 참고 마을로 내려왔다.

“찰드 씨가 성실하긴 한데 셈을 못해서 큰일이에요. 작년에도 자루 숫자를 잘못 올려서 도둑맞은 줄 알았다니까요.”

어린 집사가 콩 자루를 아래로 내리려고 손을 뻗자 마녀 키르케가 랜턴을 높이 들어주었다. 어린 집사보다 높이 비추려니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가만, 키가 또 컸어요?”

“어?”

어린 집사는 자신의 정수리를 만졌다. 키라는 것은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체감이 되지 않는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마녀 키르케의 정수리로 손을 뻗었다. 마녀는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뭐에요? 뭐? 왜요?”

어린 집사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제가 뭘요? 누가 보면 때리기라도 한 줄 알겠네.”

“이이잇! 정숙한 처녀를 함부로 만지려고 했으면서! 그런 말이 나와요?”

“정숙? 하! 정숙한 처녀가 전쟁통에 다 죽었나?”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며 다시 장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까지 돌릴 수 없었다.

“여기 확인하고 사, 상회 창고도 둘러봐야 해요! 빨리 좀 따라와요!”

“이, 이만하면 가깝죠! 뭐라는 거야요?”

“...거야요?”

“에이잇! 꼬맹이 주제 자꾸 꼬투리를 잡아!”

고기 한 조각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따라온 아야와 이야카는 송아지 같은 소년과 망아지 같은 소녀의 싸움에 실망했다. 크게 하품하고 창고 바깥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누웠다.

눈부신 햇살 사이로 고운 먼지가 나풀거리고, 시장을 오가는 행상인의 발소리와 낡은 수레의 바퀴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킁킁. 킁.”

수많은 소리 중 익숙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야가 고개를 번쩍 들자 이야카가 코를 벌렁거렸다. 기분 좋은 것이 점점 가까워졌다.

“컹! 컹!”

늑대 남매의 반응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부질없는 말싸움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여기서 뭐해?”

햇살의 장막 사이로 기다란 칼자루가 먼저 보이고, 이어서 펑퍼짐한 우플랑드의 소매와 바짝 쪼인 쇼오스의 정강이가 차례로 들어왔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동시에 외쳤다.

“영주님! 이 마녀가 자꾸 이상한 소리해요!”

“기사님! 이 꼬맹이가 자꾸 마녀라고 놀려요!”

세 번째 창고 방문자는 칼자루에 손을 얹고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응. 보기 좋아.”

집사와 마녀가 동시에 빼액- 소리쳤다.

“뭐가 좋아요!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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