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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10화 (210/605)

210화. 고향

210화. 고향

로벨은 강렬한 불빛에 눈을 뜨자마자 감았다.

정신이 돌아와서 빛을 본 건지, 빛 때문에 정신이 돌아온 건지 헷갈렸다. 그리 중요한 고민거리는 아니었다. 그보다 심각한 십 수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긴 어디지? 전쟁은 어떻게 됐어? 옆구리가 아파. 발목도 아프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어린 집사는? 키르케? 펄프 대장? 누가 물 좀 가져와!’

어린 집사가 그 대부분을 해소해주었다.

“우와아악! 영주님! 깨어나셨군요!”

로벨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햇빛이라 생각한 조명은 작은 호롱불이었다. 어둠 속에 오래 있다 보니 동공이 확장된 모양이다.

“...여기 어디야?”

“구릉성 객실이에요! 스톤헤드 요새에서 이기고 사트로 가문 잔당을 추격하기 위해 올라왔어요. 아참! 호른 경과 맥켈런 남작이 지휘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목마르죠? 여기 물이요! 앗! 움직이지 마세요. 갈비뼈가 두 개 나갔어요. 발목도 상했고요. 멍든 곳은 너무 많아서 생략할게요. 여기 물잔이 있어요. 고개만 살짝 드세요.”

로벨은 주석잔에 담긴 차가운 지하수를 한 모금 마시고 가느다란 한숨을 쉬었다.

“펄프 대장이랑 다른 사람들은?”

“자꾸 들락거려서 못 오게 성 밖으로 보냈어요.”

“왜? 아... 잘 했어.”

로벨은 허전한 앞가슴을 내려다보고 수줍게 이불을 끌어올렸다. 어릴 때부터 볼꼴 못 볼꼴 다 보고 자란 어린 집사인데, 오랜만이라 그런지 조금 부끄러웠다. 어린 집사도 비슷한지 어색한 헛기침 후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앗! 물론 영주님이 이길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래도 사지 멀쩡하니까 안심되네요!”

“...멀쩡해?”

로벨은 붕대 감긴 오른쪽 다리를 들어 보였다. 어린 집사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그만해서 다행이라고요!”

로벨은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누웠다.

“구릉성이면 마튼 경의 성이겠네. 다른 기사들은?”

“지금 성에 없어요.”

“호른 경하고?”

“예. 북진 중이에요.”

로벨은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도 가야지. 내 갑옷은?”

어린 집사가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가요. 게다가 늑대의 왕이 사라졌으니까 남은 기사들이야 바다사자... 아니! 북해의 사자 맥켈런 남작이 상대할 수 있어요. 영주님은 그냥 쉬세요.”

로벨은 바람도 없이 흔들리는 호롱불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우선 늑대의 왕은 죽지 않았어.”

“목을 쳤잖아요?”

“회색 산에서도 목을 찔렀지만 살아났어. 이번에도 그럴 거야.”

어린 집사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 그럼 어떡해요? 또 싸워야 해요? 언제까지요?”

“싸울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어째서요?”

“2대 1이니까. 승부가 났잖아? 여기서 또 덤빌 만큼 자존심이 없진 않을 거야.”

“치!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냥 알 거 같아.”

역사에 길이 남을 전장에서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을 쓰러트려 무명(武名), 그들 말로 영성(靈性)을 획득한다는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또 다른 기회를 노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죠?”

“...아니.”

로벨은 승리에 취하지 않았다.

“늑대의 왕은 마도의 수호자 중 한 명... 한 마리? 한 종류? 아무튼 하나일 뿐이야.”

볼프 후작, 류트 공자, 뱀파이어 군주, 악마추종자 등등 아직도 위협이 되는 존재가 남아 있었다. 사납지만 단순한 늑대의 왕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로벨은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당겼다가 곧 집어치웠다. 한가로이 누워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옷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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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성실함은 칭찬해 마땅하나, 그냥 좀 더 누워있어도 되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린 지 사흘이 지났지만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어이구, 나으리, 무슨 이런 일을 하십니까요.”

“기사님은 그냥 쉬세요.”

“영주님. 저희가 하겠습니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행정적인 일은 어린 집사가 깔끔히 처리해놓았다. 실무적인 일은 펄프 대장이 도맡아 해결했고, 전술적인 부분도 주드 맥켈런 남작이 세워놔서 로벨이 손대봐야 부대배치, 진군로 등에 혼란만 생길 뿐이었다. 로벨은 하다못해 모닝스타나 씻길까 하고 마구간을 찾아갔는데, 마녀 키르케와 구릉성 하인들이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깨끗이 씻기고 빗겨 놓았다.

“...이럴 땐 고분고분해.”

모닝스타는 묵은 땀과 마른 먼지를 벗어 상쾌한 듯 입술을 뒤집고 푸르릉- 거렸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매끈해진 갈기를 쓸어 만지며 구릉성 앞마당을 구경했다. 구릉성의 마튼 경이 충성한지 꽤 되었는데, 그동안 전쟁이다 내정이다 바쁘다 보니 찾아오지를 못했다. 이렇게 오게 되어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이렇게라도 와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로드?”

“아, 깜짝아.”

악마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는 속담처럼 마튼 경이 불쑥 나타났다. 로벨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돌아보았다.

호른 경, 브릭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등은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쫓아 북진했지만, 마튼 경은 로벨을 간호하기 위해 남쪽에 남았다. 사실 로벨의 간호는 핑계고, 나이가 나이다 보니 더 이상 종군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건강하시니 다행입니다.”

“모두 경 덕분이오.”

마튼 경은 주름진 눈으로 로벨의 흉부와 오른발을 살폈다. 어린 집사가 과도할 정도로 붕대를 감아놓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환자라 여길 것이다.

“제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오히려 주군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지요.”

로벨은 네모반듯한 건초더미에 앉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진심으로 말하길 경들 덕분이오. 의무종군기간이 지났는데도 군말 없이 따라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소.”

초여름에 시작한 까마귀 성 전투부터 얼마 전 파도 평야 전투까지 100일이 훌쩍 지났다. 마튼 경은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검은 숲에서 종군한 것은 의무복무고, 볼탄 반도에서 종군한 것은 계약복무입니다.”

“계약복무?”

“적이 침략했을 때는 적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무기한으로 종군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로벨도 그러한 맹약의 내용을 알지만, 이 경우 적용이 애매했다. 늑대성이 공격받은 것은 아니니 얼마든지 회군할 수 있었다. 농사일이 한창일 때라 전쟁터를 돌아다니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몸이 안 좋은 도너반 자작 외 6명의 봉신은 끝까지 함께해주었다.

“그리 말해주어 더욱 고맙소. 정말로... 고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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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릉성은 옛날의 로드릭 성보다는 크고 웅장하나 지금의 늑대성보다는 낡고 허름했다. 성벽은 성문 주변만 석재고, 그 외 구역은 통나무였다. 성탑은 온전히 석재였으나 유행이 지난 사각 망루 구조였다. 그야말로 시골 영지의 시골 성이었다. 그래서 로벨에게 친숙했다.

“...한가하네.”

로벨은 성을 한 바퀴 돌고 성 안 우물가에 앉아 아침에 먹고 남긴 비스킷을 꺼냈다. 맛없고 딱딱한 비스킷도 시원한 우물물과 함께 먹으면 먹을 만했다.

그때, 앤드류 마튼 경의 아내 셰리 마튼 부인을 돕는 마을 아낙들이 물통을 이고 성 밖으로 나왔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지 깔깔 웃다가 로벨을 보고 화급히 돌아섰다.

로벨은 괜히 일하는데 방해한 것 같아 일어났다. 그러나 로벨과 마주친 아낙들은 그리 화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어머나! 그 후작님이야!’

‘어쩜! 소문보다 훨씬 젊고 잘생겼네?’

‘마님 말씀이 아직 미혼이래.’

‘진짜? 진짜? 저리 미남인데?’

수군수군... 숙덕숙덕...

로벨은 무슨 흉을 보나 쳐다보다가 눈을 마주치자 까마귀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오해를 풀었다. “꺄아~ 꺄~”

켈트 경이라면 ‘건방진 계집들 같으니! 당장 물러가라!’하고 혼내고, 호른 경이라면 ‘이 몸의 인기란... 후훗!’하고 웃었을 테지만, 로벨은 그럴 성격이 못 되었다.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피했다. 그 모습이 또 매력적이라 아낙들의 숨죽인 감탄사가 연이어 나왔다. 마을처녀 중에 밤잠 못 이룰 이가 몇 명 있을 것이다.

‘오래 머물면 안 되겠어.’

충성을 맹세한 봉신의 성이라도 남의 성이었다.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더욱이 북쪽이 혼란하여 고향을 비우기가 불안했다. 로벨은 전황을 읽고 또 읽은 후 결정했다.

‘늑대성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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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붉은 산까지 진군한 페르젠-에디즈-맥켈런 연합군에게 회군을 통보했다. 이제 막 기세가 오른 하버트 페르젠 백작은 길길이 날뛰었지만, 냉정한 주드 맥켈런 남작과 소심한 하롤드 에디즈 자작은 휴전에 동의했다.

“버팅거 시티와 덩굴성을 되찾았으니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옳소.”

“그게 무슨 소리요? 최소한 받은 만큼 돌려줘야지! 여기서 꽁무니를 뺀다고?”

“우리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그리고 가을이 코앞이외다. 영지민 생각은 안 하시오?”

“생각 안 하오!”

“...제발 생각 좀 하시오.”

검은 숲에서 시작된 전쟁이 근 100일간 지속되었다. 사람도, 가축도 지쳤다. 도시경제를 기반으로 막 전쟁에 뛰어든 하버트 페르젠 백작군은 상관이 없지만, 농지가 유일한 자금줄인 휘하 기사들은 사정이 달랐다.

“각자의 땅을 지키며 공작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 옳소.”

“그렇소. 우리 땅에서 싸운 것은 정당한 자위행위지만, 붉은 산을 넘어가는 것은 사정이 다르오. 국왕 폐하와 공작님의 뜻을 물어봐야 할 것이오.”

“이이잇! 겁쟁이들! 그러고도 기사들인가!”

로벨은 한숨을 애써 삼키고 용맹하나 용맹뿐인 페르젠 백작을 설득했다.

침략할 때와 침략받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지금껏 소극적이던 사트로 가문 기사들이 어찌 나올지 모른다. 병사들을 생각해라. 프란시스 가문의 정예들은 포클랜드에 주둔 중이고, 이곳에 병사들은 어리거나 늙은 사내들이 대부분이다. 사트로 가문의 성을 함락해도 지키지 못할 것이다. 가을이 가깝다. 비록 어리고 병약한 사내들이나 저들이 없으면 가을 추수를 끝낼 수 없다. 이 전쟁을 계속 이어가면 가을 전에 끝날 것 같은가. 등등...

그러나 로벨은 가장 중요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늑대의 왕, 경들이 늑대 기사라 경외한 작자가 끝이 아니오. 마도의 수호자가 버티고 있는 한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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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회군이 결정되었다. 의리와 맹약 때문에 억지로 참전한 기사들과 진정한 의미로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농민병이 모두 기뻐했다. 크든 작든 화려하든 초라하든 내 집, 내 고향이 최고인 것은 똑같았다. 그저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만 시무룩해졌다.

울프 용병단처럼 360일 상시 고용상태로 기본급을 꼬박꼬박 챙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름 있는 소수 용병단을 제외하면 ‘용병단’이란 조직 자체도 전시에만 창설되었다. 상설 용병단에 고용되는 것은 수많은 용병 중 상위 1%만 누리는 행운으로, 용병업계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울프 용병단에 한 자리 끼기 위해 술과 고기를 대접하며 아부하는 뜨내기 용병이 수십이었다.

몇 년 전부터 비슷한 일을 겪어온 펄프 대장 이하 원로 용병들은 그러려니 했지만, 울프 용병단의 ‘이름값’을 확인한 신입 용병들은 콧대가 붉은 산꼭대기에 닿았다.

그렇게 기뻐하고, 슬퍼하고, 의기양양해하는 사이 볼탄 반도의 진정한 강자로 떠오른 로드릭 가문 영토에 도착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을 추수제 전에 찾아뵙겠습니다, 주군.”

로드릭 가문의 봉신들은 영지민을 돌려보내기 위해 하나둘 흩어졌다. 로벨이 승전축하연회를 열면 다시 모일 것이기에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다.

언덕배기 위로 늑대성의 그림자가 보일 때쯤, 로벨의 곁에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울프 용병단 100여 명만 남았다.

“우리 집이다앗!”

“아야랑 이야카가 잘 지내나 궁금해요.”

“그리고 먼저 돌아간 녀석들도!”

늑대성의 진정한 식구들이 시시덕거렸다. 로벨은 환하게 웃는 식솔들을 보며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이 좋은 것은 무적무패의 위대한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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