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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09화 (209/605)

209화. 샛별

209화. 샛별

1초를 12개로 쪼개 세는 듯한 찰나의 순간, 로벨은 에르나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그렉 페럿 경을 떠올렸다. 로벨이 지금껏 상대한 기사 중 가장 강인한 기사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늑대의 왕이라 불리는 상식 밖의 괴물에게 끝내 패배했다.

‘정면으로 붙으면 안 돼.’

늑대의 왕의 괴력은 인간이 대적할 수준이 아니었다. 거병(巨兵) 츠바이핸더를 갈댓잎처럼 휘두르는데, 제대로 맞으면 최고급 필드 아머라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크하하하핫!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

늑대의 왕이 온몸을 뒤틀며 츠바이핸더를 휘둘렀다. 공기마찰로 쇠가 달궈지고, 풍압으로 옷자락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로벨은 모닝스타 목에 바짝 엎드려 참격을 피했다. 시야를 좁히는 위험천만한 자세지만 파나케아 투구 덕에 주위를 생생히 볼 수 있었다. 로벨과 늑대의 왕은 질주하는 말 위에서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약속한 듯 속도를 줄였다.

늑대의 왕은 전투마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 비틀었다. 기사들이 갈고 닦은 승마술이 무안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 힘으로 풀 스윙한 츠바이핸더를 수직으로 치켜들었다. 평범한 인간이면 근육이 찢겨져나갈 행동이었다.

“옆으로!”

반면, 로벨과 모닝스타는 우아할 정도로 세련된 승마술을 보였다. 사람과 말이 하나 되어서 서로의 체중으로 유연하게 선회했다. 로벨의 단단한 허벅지와 모닝스타의 튼튼한 뒷다리가 이뤄낸 성과였다.

“와라!”

로벨과 늑대의 왕은 한결 여유로운 속도로 재차 충돌했다.

늑대의 왕은 피할 공간을 주지 않기 위해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수천 년 동안 사냥꾼을 골탕먹여온 유니콘 혈통을 얕잡아 본 행위였다. 모닝스타는 제자리에서 껑충 뛰어 옆으로 피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기사들을 어이없게 하는 동작이었다.

“무슨 말이 옆으로 움직여?”

“주인이 인간 같지 않으니 말도 말 같지 않네.”

로벨은 텅 빈 늑대의 왕 옆구리에 흐룬팅을 찔러 넣었다. 쇠도 자르는 명검이었다. 늑대의 왕의 털가죽을 찢고 살가죽에 2인치가량 파고들었다. 그러나 늑대의 왕 체구를 생각하면 대단치 않은 상처였다.

“크하하! 보통 말이 아니로군!”

“너도 보통 괴물이 아니잖아?”

로벨은 흐룬팅을 돌려서 상처를 벌렸다. 그러나 늑대의 왕은 상상 이상으로 터프했다. 흐룬팅의 칼날을 잡고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로벨은 하마터면 모닝스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이익-!”

로벨은 흐룬팅을 놓고 자세를 바로 했다. 어이없게도 최고의 무기를 빼앗겼다.

“요정왕의 선물인가?”

늑대의 왕은 갈비뼈 사이에 걸린 흐룬팅을 도로 뽑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 아무렇지 않게 칼날을 살폈다.

“좋은 칼이군. 하지만 가볍다. 이런 무기로 나를 어쩌지 못한다.”

로벨은 어금니를 갈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계속하자!”

늑대의 왕은 흐룬팅을 뒤로 던지고 재차 달려들었다. 로벨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아론다이트의 칼몸을 팔뚝에 붙이고 비스듬히 세워 쇄도하는 츠바이핸더를 흘려보냈다.

“큭-!”

최대한 빗겨냈는데도 충격이 대단했다. 모닝스타가 휘청거리며 울부짖었다. 보통 칼이었으면 칼날이 부러졌고, 보통 말이었으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기사도, 무기도, 전투마도 보통이 아니었다.

“히야앗!”

로벨은 늑대의 왕의 공격을 버텨내고 역공을 가했다. 아론다이트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올려친 후, 칼의 무게를 실어 다시 내려쳤다. 늑대의 왕은 땅을 향한 츠바이핸더를 들어올리는 대신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리카소로 아론다이트의 올려치기를 쳐내고, 가드로 내려치기를 엇갈려 막았다. 까강-! 깡-! 숫돌로 갈듯 불똥이 튀고, 금속조각이 깨져 흩날렸다.

로벨과 늑대의 왕은 몸을 기울여 1피트 남짓한 거리에서 서로를 보았다. 차가운 가면을 쓴 로벨과 해초처럼 지저분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늑대의 왕은 얼음과 불처럼 사뭇 달랐다.

“호수의 검과 겔몬 족의 투구인가?”

로벨은 바이저 뒤에서 잇소리를 내었다. 늑대의 왕의 괴력에 밀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반면, 늑대의 왕은 미소를 띨 만큼 여유로웠다.

“그사이 재미난 장난감을 많이도 모았군.”

“장난감에 맞아도... 아플걸?”

로벨은 힘 싸움을 피했다. 늑대의 왕이 밀어붙이는 대로 아론다이트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어깨와 허리의 반동을 이용해 재차 내리찍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검술이 아니라 도끼질, 혹은 쟁기질에 가까웠다. 포클랜드의 고명한 검술 마스터들이 보면 한탄할 일이었다. 단순무식한 공격이지만, 효과가 있었다. 일반적인 롱소드는 충격을 못 이겨 부러지거나, 하다못해 칼날이 망가지겠지만, 아론다이트는 특유의 강도로 츠바이핸더의 가드를 깨부수기 시작했다.

늑대의 왕은 지금껏 보지 못한 로벨의 마구잡이 공격에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로벨은 흉갑으로 주먹을 받아냈다. 쾅-!

흡사 대포에 맞은 것 같았다. 과장도 아니고 관용적인 표현도 아니다. 흉갑 앞부분이 찌그러지고, 모닝스타 안장에서 튕겨 나갔다. 로벨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가슴에 이어서 허리와 등에 충격이 전해졌다. 땅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쿨럭-”

눈앞이 깜깜해졌다. 역시 관용구가 아니었다. 충격이 상당했다. 어린 집사의 땀과 눈물로 맞춘 필드 아머가 아니었으면 흉골이 함몰되고 심장이 터졌을 것이다.

“주군!”

“기사 나리!”

로벨이 위기에 처하자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명예고 나발이고 돕기 위해 달려왔다.

“결투에 끼어들다니!”

“서 리카온을 도와라!”

볼프 후작군도 흥분해서 몰려왔다. 그러나 양쪽 모두 늑대 싸움에 끼어들 시간이 부족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새까만 갈기를 날리는 새하얀 말 한 마리만 빼고 말이다.

“히히히잉-!”

주인을 잃을 뻔한 모닝스타가 광분해서 늑대의 왕의 전투마를 들이박았다. 오베리아 지방에서 알아주는 덩치의 거마지만, 차돌 같은 모닝스타의 박치기를 당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주인이 인간 같지 않은 인간과 싸우는 통에 지칠 때로 지친 오베리아 전투마는 모닝스타의 용맹무쌍한 박치기에 대번 꼬꾸라졌다. 천하의 늑대왕도 중력을 거스를 수 없어 땅으로 떨어졌다. 역시나 타격은 없지만, 로벨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날 시간은 되었다.

“크핫! 역시 네 녀석과 싸움은 재미있다!”

“난 재미없어...”

로벨과 늑대의 왕은 두 다리로 마주 서서 각자의 무기를 끄집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양측의 주력군이 두 사람을 스치듯이 지나 격돌했다. 쇠와 쇠, 피와 피, 뼈와 뼈가 부딪치며 비명을 자아냈다. 기사들은 말 위에서 사방으로 칼날을 뿌리고, 용병들은 양손으로 쇠뭉치를 휘둘렀다. 여름의 열기에 전쟁의 열기가 더해져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광기와 폭력으로 얼룩진 현장이지만, 놀랍게도 로벨과 늑대의 왕 사이에는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로벨의 명예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이 대적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전장에서 고고한 기사와 외로운 괴물이 승부를 이어갔다.

@

늑대의 왕이 옳았다. 이곳은 무대였다. 어느 도시, 어떤 극장도 흉내 낼 수 없는 거대하고 웅장한 무대였다. 피와 쇠와 비명과 공포로 무대를 장식하고, 수백, 수천 명의 배우가 죽음으로 배역을 수행했다.

“하아앗!”

“크핫!”

무대의 중심에 자리한 주연배우 또한 다르지 않았다.

로벨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몇 번째인지, 몇십 번째인지 모를 공격을 피했다. 위기가 수차례 지나갔다. 오른쪽 폴드런이 찢겨지고, 왼쪽 스커트가 박살났다. 정통으로 맞은 것은 없는데, 스치고 흘리는 와중에 야금야금 망가졌다.

“제발! 좀!”

로벨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늑대의 왕은 비웃는 기색 없이 소리쳤다.

“으하하! 벌써 지친 것이냐!”

사람인 이상 지치는 것은 당연하다. 체력이 소진되고 집중력이 바닥났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자는 달랐다. 옷인지 장식인지 모를 털가죽은 너덜너덜해졌지만, 강철 같은 몸뚱이는 처음과 똑같았다. 애써 입힌 상처도 눈 깜짝할 사이 회복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결국 이 정도였나?”

늑대의 왕은 한껏 느려진 아론다이트를 맨손으로 붙잡고 반대 손으로 츠바이핸더를 휘둘렀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놓고 물러났다. 늑대의 왕 역시 한 손으로 대검을 휘둘러 느리고 둔했다. 지친 몸으로도 어찌어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 힘이 풀리는 것까지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비틀거리다가 엉덩방아를 찍었다.

늑대의 왕은 어느새 서쪽으로 넘어간 태양을 등지고 주저앉은 로벨을 굽어보았다. 어둠 속에서 이글거리는 두 눈과 실룩거리는 송곳니가 위압적이었다.

“인간치고 제법이었다. 이토록 많은 상처를 입은 것은 근 100년 만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듣기 싫어.”

“너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역사가 바뀐다. 그리하면 우리의 이름이 현세에 새겨질 터! 비로소 오롯한 존재가 될 것이다!”

늑대의 왕이 츠바이핸더를 치켜들었다. 로벨은 노을빛으로 붉게 타오르는 칼날을 보았다. 화로에서 막 꺼낸 쇠토막 같았다.

“아직이야. 아직... 한 자루 남았어.”

로벨은 땅바닥을 박차고 일어나며 허리춤에서 대거를 뽑았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다용도 보조무기였다. 앞서 사용한 전설적인 무기들에 비하면 조잡하고 초라했다. 그러나 기적은 예상치 못하기에 기적인 법이다. 이름 없는 싸구려 단검이 거병 츠바이핸더를 부수고 늑대의 왕의 목을 찔렀다.

엄밀히 말하면 기적도 뭣도 아니었다. 흐룬팅으로 찌르고, 아론다이트로 두드려서 늑대의 왕과 늑대의 왕의 애병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길고 위험한 싸움의 대가는 로벨만 치른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승리를 확신한 늑대의 왕은 자신의 몸을 지키지 않았다.

푹-!

석양에 감싸인 기사와 괴물의 모습은 얼핏 연인의 포옹처럼 보였다. 키 차이 탓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사내의 목이 서서히 꺾이더니 아래로 푹 꺼졌다. 이어서 두 팔이 힘없이 떨어지고, 두 다리가 맥없이 구부려졌다. 이윽고 로벨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무릎 꿇은 자세가 되었다.

“하아... 하아...”

로벨 역시 오래 서 있지 못했다. 마지막 무기조차 내버려 두고 비틀비틀 물러났다. 쓰러질 듯 말듯 조마조마했다. 깨진 갑옷 탓에 더욱 균형 잡기가 힘들었다.

“기, 기사 나리가 이겼다!”

“맙소사! 리카온 경이 졌어!”

승리를 알릴 필요 없었다. 로벨이 있는 곳은 무대의 중앙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만인의 주목을 받았다.

“로벨 경이 늑대 기사를 물리쳤다!”

“그랜드 챔피언이 승리했다!”

“아, 안 돼... 도망가자...!”

전쟁의 저울이 마침내 한쪽으로 기울었다. 로벨을 따르는 병사들이 로벨을 지나쳐 볼프 후작군을 쫓아 달리고 또 달려갔다. 어느덧 로벨 주위에는 창칼에 찔린 채 나뒹구는 시체와 부러진 사트로 가문 깃발만 남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펄프 대장의 고함과 볼프 후작의 호통이 들려왔다.

로벨은 늑대의 왕과 달리 고개를 위로 들었다. 석양이 붉게 물든 하늘에 대지의 그림자를 수놓았다. 호기심 많은 샛별이 어느 기사의 위대한 승리를 축복했다.

“드디어... 끝났어...”

“히이이잉-! 히히힝-!”

또 다른 샛별이 쓰러지는 주인을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지치고 고단한 기사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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