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운명
208화. 운명
로벨 로드릭 후작은 울프 용병단을 정면에 내세우고, 주드 맥켈런 남작군을 좌익으로, 하롤드 에디즈 자작군을 우익으로 삼아 스톤헤드 요새에서 800야드 떨어진 작은 언덕에 포진했다.
풋맨과 스피어맨을 언덕 중간에, 크로스보우와 대포를 정상에 배치하고, 휘하 랜스와 기사들을 예비대로 편성했다. 꽤 정석적인 배치였다. 그 말은 검증된 전술이란 뜻이기도 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은 로벨 로드릭 연합군에 맞서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사트로 가문의 직속 부대는 스톤헤드 요새를 공략하고, 도반 도트넘 백작을 비롯한 봉신 부대를 로벨 로드릭 군대와 대치시켰다. 이로써 파도 평야에 모인 병사가 총 3,000명이 넘었다. 아이언베어 요새 이후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정렬! 정렬!”
로벨은 울프 용병단의 전투상태를 확인한 후 선두로 나섰다. 새하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새까만 전투마를 모는 모습이 위풍당당했다. 그러나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적군의 숫자가 훨씬 많은데, 무기, 지형, 전술적으로 이점이 없었다. 더욱이 늑대의 왕, 뱀파이어 군주 등 상식 밖의 괴물까지 존재했다.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된 이래 가장 위험한 전투였다.
‘늑대의 왕이 말한 전쟁이 오늘이야.’
로벨은 건틀렛을 쥐락펴락하며 볼프 사트로 후작군의 빈틈을 찾았다.
한편, 로벨의 적수는 로벨보다 용감하고 과감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여름 햇살이 거슬리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툭 던지듯이 말했다.
“어디 무적무패의 기사 실력 좀 볼까?”
첫 공격은 볼프 후작군이 ‘항마병’이라 부르는 고블린 부대였다. 고블린은 키가 작고 완력도 약하지만, 몸이 재빠르고 성격이 호전적이라 싸움이 일어나면 들개떼처럼 달려들었다. 고블린에게 익숙지 않은 병사들은 ‘어어? 어?’ 하다가 살해당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울프 용병단은 어느 군대보다 고블린과 싸운 경험이 풍부했다.
“스피어-월-!”
길고 짧고 뾰족하고 두꺼운 창이 일제히 언덕 아래로 향했다. 찌르기에 쓸모가 없는 글레이브나 부주도 일부 있지만 문제없었다. 이름 그대로 벽이 되었기 때문이다.
“뀌에에에엑!”
“꾸엑-!”
주물로 찍어낸 싸구려 스몰 소드에 조잡하게 기운 가죽 흉갑을 걸친 고블린이 괴성을 지르며 언덕을 달렸다. 언덕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갔다가, 또 다시 내려가며 덮쳐오는 광경이 흡사...
“과연, ‘파도’ 평야로군.”
“대, 대장? 쏠까? 쏴?”
울프 용병단의 쇠뇌병과 대포병, 바위성의 장궁병이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펄프 대장과 켈트 경을 훔쳐보았다. 별 소용없었다. 두 지휘관도 자신의 지휘관을 훔쳐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벨은 겁먹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차분하다 못해 차가웠다. 가장 완벽한 순간까지 기다렸다.
“저들은 화살받이야. 낭비하면 안 돼.”
어린 집사가 감격했다. 그러나 어린 집사의 재정 관리를 위한 판단은 아니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판단이었다.
로벨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오른손을 들었다. 그 신호에 맞춰 일제히 활시위가 당겨지고 쇠뇌가 올라갔다. 그러나 로벨은 다시 기다렸다.
고블린 부대가 로벨이 차지한 언덕을 기어 올라왔다. 생식을 하는 몬스터 특유의 악취가 전해졌다. 팔 힘이 약한 롱보우맨이 어깨를 파르르 떨 때, 로벨의 오른손이 떨어졌다.
“발사.”
로벨의 명령은 켈트 경과 펄프 대장을 통해 수십 배로 증폭되었다.
“쏴라!”
“발사앗!”
언덕 아래로 강철의 비가 쏟아졌다.
@
고블린의 숫자가 5, 600마리에 이르렀다. 일제사격에 2, 30마리가 우르르 쓰러졌으나, 뒤따라오는 무리에 빈자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울프 용병단이 차지한 작은 언덕쯤은 뒤덮고 남을 숫자였다.
“물러서지 마! 버티란 말이다!”
새까맣게, 아니, 새파랗게 밀려온 고블린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창벽에 몸을 던졌다. 무모하고 끔찍하지만 효과적인 파해법이었다. 한 마리를 꿰뚫고 나면 시체의 무게 때문에 창날이 아래로 떨어졌다. 요령 좋게 창날을 회수해도 살을 찢고 뼈를 갈라 창날이 상했다. 세 마리째부터는 쇠뭉치와 나무둔기에 불과했다. 고블린은 동족의 시체를 밟고 창대를 넘어 울프 용병단 머리 위로 뛰어들었다. 짤막한 단병기가 엇갈리고,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호른 경! 브릭 경! 바이란 경!”
로벨이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이제부터 기사들의 시간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건네는 라이트 랜스와 파나케아 투구를 차례로 챙겨서 휘하 기사들과 함께 달려갔다. 창벽을 빙 돌아 고블린의 측면으로 돌격했다.
“뀌익! 뀍!”
“꾸이잇!”
사람과 갑옷과 전투마가 합쳐진 무게는 평균 1,600파운드였다. 그 숫자가 7필이니 단순한 질량만 1만 1천 파운드에 이르렀다. 체격도, 무장도 변변찮은 고블린은 말 그대로 깔려죽었다. 그 광경은 흡사 잘 여문 보리밭 위로 큰 바위가 굴러가는 듯했다.
로벨은 랜스를 아꼈다. 대(對)보병용으로 제작된 라이트 랜스는 이름처럼 가벼웠다. 작고 날랜 적을 치기는 좋지만 내구성이 약해서 쉽게 부러졌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무게와 속도로 적을 밟으며 결정적인 한 방을 노렸다.
“인간! 냄새나는 인간! 인간을 죽여라!”
고블린 중에 유난히 덩치가 좋은, 심지어 두꺼운 팔치온과 사슬 갑옷으로 무장한 고블린이 해골 장식을 흔들며 고함쳤다. 크기를 봐서 어린아이들의 해골이었다.
“저 녀석이!”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살짝 틀며 무게방향을 바꿨다. 영리한 하프 유니콘은 주인의 뜻을 120% 반영했다. 꼬챙이를 내미는 고블린을 훌쩍 뛰어넘고, 머리통을 감싸며 웅크리는 고블린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후 고블린 대장에게 돌격했다.
“죽어!”
고블린의 흉측한 얼굴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인간이 만든 것이 분명한 체인 메일은 견고하고, 오크를 연상시키는 근육 또한 단단하다. 그러나 전력질주하는 전투마에서 완벽한 타이밍으로 뻗어오는 버드나무 잎 모양 창날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로벨의 랜스는 잠시잠깐의 여유조차 주지 않고 고블린 대장을 꿰뚫었다. 로벨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충격을 정수리에서 흐트러트리며 허벅지와 등에 힘을 실었다. 모닝스타의 속도를 빌어 창날이 서서히 위로 들렸다. 그리고 무게 균형이 중심에 완벽히 잡히는 순간, 고삐를 당겨 모닝스타를 정지시켰다. 모닝스타는 앞발로 투레질하며 우렁차게 울었다. 히히이이이잉-!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기사 나리 만세! 기사 나리 만세!”
로벨은 고블린의 시체를 깃발처럼 세우고 남은 고블린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여기서 매섭다는 것은 주관적인 평가다. 실제로는 굳게 닫힌 바이저로 표정을 알 수 없었다.
‘무, 무거워...’
로벨은 균형을 잃고 서서히 기울어지는 고블린 시체 때문에 끙끙거렸다. 오래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블린의 피가 창대를 타고 컨틀렛을 적실 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옆으로 팽개쳤다. 그러나 각막에 각인된 이미지는 선명했다. 울프 용병단을 필두로 인간은 환호했고, 고블린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댐이 터질 때처럼, 혹은 산불이 번져갈 때처럼 시작은 작은 하나면 충분했다. 한 마리가 도망치자 열 마리, 스무 마리, 백 마리가 무기를 팽개치고 도주했다.
로벨은 뒤쫓지 않았다. 고블린은 인간과 달라 한번 무너지면 단시간에 재편성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을 볼 때 고블린 부대, 항마병은 끝났다.
그러나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둥-! 둥-! 둥-! 둥-!
볼프 후작군 본대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벨은 파나케아의 힘을 빌려 먼 곳을 보았다.
고블린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나가는 자리에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듯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니, ‘슬금슬금’이 아니다. 워낙 많은 인파-고블린파?- 탓에 느려 보일 뿐, 굉장한 속도로 다가왔다. 그리고 ‘사람’도 아니었다.
로벨은 잃어버린 랜스 대신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먹고 오른쪽의 흐룬팅을 힘겹게 뽑았다. 흐룬팅은 길이가 짧아 말 위에서 휘두르기 좋은 무기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상대에게는 이만한 무기가 없었다.
‘그것’은 겉보기에 평범했다. 6피트 길이의 츠바이핸더나 오베리아산 거마가 망아지처럼 보이는 체구에도 최소한 ‘사람’으로 보였다.
로벨은 흐룬팅을 꽉 쥔 채로 손을 털었다. 고블린의 핏물은 유난히 끈적끈적했다. 기분은 나쁘지만 무기를 쥐기에 나쁘지 않았다. 모닝스타도 주인을 따라 갈기를 털었다.
한여름 열기에 유난히 빨리 썩어가는 시체와 시체가 될 예정인 예비 시체 사이에 피범벅이 된 기사만 남았다.
“저, 저 자식... 저 자식 맞지?”
“마, 맞아! 그놈이야! 그 괴물놈!”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명령이 없어서, 그리고 주축이 되는 기사와 울프 용병단의 기묘한 분위기에 휘말려서 어정쩡하게 대기했다. 특히 울프 용병단의 최고참 반응이 볼만했다.
기사 나리만 아니면 무서울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하는 외팔이, 허풍쟁이, 겁쟁이 등등이 새하얗게 질려서 말까지 더듬었다. 평소 고참들의 텃새에 불만이 많던 신참 용병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비웃었다.
“왜 그렇슈? 어디 오우거라도 봤슈?”
“이 자식아! 오우거 따위가 아니야!”
“오우거 따위라고?”
“오우거 그 까짓 거는 나도 잡아봤다! 그렇지만 저 자식은...!”
허풍쟁이는 어느 상황에서도 허풍쟁이였다. 피에 물들고 겁에 질려서도 은근슬쩍 자기자랑 했다. 그래도 신참 용병은 비웃지 않았다. 허풍쟁이가 허풍을 떨어도 저 정도면 진짜 위험한 적이었다. 심지어 무식한 외팔이와 침착한 애꾸눈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무시무시한 존재가 언덕 바로 아래까지 왔다. 화살에 맞아 굴러 떨어진 시체 몇 구만 남은 황량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한 손을 들어 까닥였다.
‘내려와라.’
그것은 도전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배를 가볍게 찼다. 모닝스타도 상대의 정체를 아는 듯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뎠다.
“주군!”
호른 경이 걱정을 외쳤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호른 경, 브릭 경, 바이란 경 등을 돌아보았다. 그 뒤로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도 보였다.
“본인이 쓰러지면...”
로벨의 입에서 패배와 관련된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호른 경은 깜짝 놀라 전투마에서 내렸다. 로벨 로드릭을, 사랑하는 주군을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사의 명예가, 주군의 명예가 실행을 방해했다.
“...호른 경이 최고 지휘관이오. 주드 맥켈런 남작과 협력해서 늑대성으로 철수하시오. 늑대성의 영지경영은 어린 집사가 도맡아 하고 있으니 당분간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오.”
“주, 주군...”
“그리고 울프 용병단을 유지하도록 하시오. 지금은 혼란한 시절이니 훈련된 군대가 필요하오.”
로벨은 그렇게 명령하고 바이저를 내렸다. 누구를 사랑했다느니, 함께해 영광이었다느니, 자질구레한 말은 하지 않았다. 로벨답지 않은 태도지만 로벨은 로벨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내 영혼의 주인, 그 명을 따르겠습니다.’
로벨은 호른 경의 다짐을 듣지 못했다. 미적거리는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거세게 때렸다. 모닝스타는 ‘알았어! 알았다고!’ 소리치듯 머리를 크게 휘젓고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켈트 경이 주군을 도와야 한다고 소리치고, 펄프 대장이 크로스보우를 장전하라고 명령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후계자 전쟁 이후 6년이 지났다. 못다 한 승부를 가릴 때가 되었다.
“늑대왕! 리카온!”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두 마리의 늑대가 포비아 왕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