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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07화 (207/605)

207화. 거짓

207화. 거짓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벗고 머리를 흔들었다.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에서 땀방울이 휘날렸다.

‘...더워.’

여름이 한창이라 철판이 뜨거웠다. 갑옷을 벗으면 땀이 한 바가지 쏟아질 것이다. 땀도 땀이지만 냄새도 장난 아니었다.

그러나 더위나 냄새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무리도 있었다. 무기를 빼앗기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린 포로들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한 바퀴 돌려서 포로들에게 다가갔다. 기사들은 무기만 압류하고 포박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잘난 명예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값을 지불하면 알아서 풀어줄 텐데 위험하고 고생스러운 짓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다.

“기사 종자도 풀어줘.”

“엥? 왜요?”

“몸값을 가져와야 하잖아.”

어린 집사는 포로들의 가문을 하나하나 확인해서 작위와 봉토에 맞게 몸값을 청부했다. 일부는 지나치다고 반발했지만, 대다수는 군말 없이 수긍했다. 잠시 뒤 기사 종자들이 깃발과 인장 반지를 챙겨서 각자의 성으로 달려갔다. 사나흘 뒤에 금화주머니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이히힛! 히힛!”

어린 집사는 승리의 열매를 맛보고 기사들이 왜 그리 열심히 싸우는지 알았다.

“기사 나으리와 종자 나으리는 그렇다 치고, 저 잡것들은 어쩝니까요? 그냥 풀어줄깝쇼?”

외팔이 더치가 피 묻는 손도끼로 가난한 포로들을 가리켰다. 몸값을 못 내는 말단 병사는 잡고 있어 봐야 군량만 축난다. 그렇다고 무작정 죽일 수도 없었다. 노예로 팔거나 다시는 덤비지 못하게 손가락을 자른 뒤 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안 돼.”

“왜요?”

“병사가 필요하니까.”

어린 집사는 꾀죄죄한 포로들을 둘러보았다. 20대에서 40대 사이로 한창때 장정이지만, 못 먹고 못 입어서 마녀 키르케보다 부실해 보였다. 기사들은 거론할 것도 없고, 울프 용병단에서 열 명만 뽑아도 모조리 때려눕힐 수 있을 듯했다.

“도움이 될까요?”

로벨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싸우진 못해도 수레는 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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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포로 55명을 회유해서 각 영지군에 배치했다. 그날 밤 12명이 도주했지만, 43명은 적응한 건지 체념한 건지 새로운 영주를 모시며 자리 잡았다.

이후 덩굴성은 쉽게 함락했다.

볼프 후작이 남기고 간 기사와 용병들은 허둥거리며 본대를 쫓아 도망쳤고, 성 안에 남은 덩굴성 토박이 병사들은 과거 정통성 전쟁을 떠올려 저항하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로벨 로드릭은 자비로운 기사라 항복하면 벌하지 않았다.

로벨은 호른 경과 펄프 대장에게 성 안의 보급품을 챙기도록 명령하고 본인은 덩굴성에서 오랫동안 일한 토박이 병사의 안내를 받아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배수로로 빠지지 않은 빗물이 돌 틈으로 스며들어 뚝- 뚝- 떨어졌다. 계절이 무색하게 서늘하고 눅눅했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 조명을 최소한으로 줄였고, 어둠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쪽입니다요.”

덩굴성의 병사가 횃불을 옮겨 밝히며 나아갔다. 로벨이 지나간 자리에 환한 빛이 남아 주위를 밝혔다. 죄수들이 엉금엉금 나와 로벨을 영접했다.

로벨은 살인자와 말도둑 따위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로벨이 찾는 죄수는 좀 더 고귀한 자였다.

“에디즈 자작.”

“...로벨 로드릭 경?”

덩굴성의 정당한 주인인 하롤드 에디즈 자작이었다. 수감생활로 초췌해지긴 했지만 영주의 위엄이 어디 가지는 않았다.

‘기사를 이리 대하다니... 볼프 사트로 후작, 이 자가 제정신인가?’

에디즈 자작은 쇠창살을 붙잡고 환하게 웃었다.

“역시 로벨 경이오! 본인을 구하러 온 것이오? 아, 잠깐! 혹시 ‘나도 잡혀왔소’ 소리를 할 거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 잠시 시간을 주시오. 후우. 후우. 좋소. 말하시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덩달아 웃었다.

“구하러 온 것 맞소.”

“역시!”

“그러니 경 또한 구해주시오.”

로벨은 덩굴성 병사에게 에디즈 자작을 풀어주라 명령했다. 소탈한 에디즈 자작은 볼프 후작에게 가담한 옛 병사의 송구함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질문했다.

“누구를 말이오? 누가 또 위험하오?”

횃불을 가진 병사가 멀어지자 로벨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뚝한 코와 새빨간 입술만 남았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볼탄 반도의 선량한 주민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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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의 병사가 크게 늘어났다. 주드 맥켈런 남작군과 사트로 가문의 포로에 이어서 하롤드 에디즈 자작군까지 합류해 총 450명이 되었다.

사기가 한껏 오른 켈트 경 이하 여러 봉신들은 ‘배신자’ 호수성을 징벌하고 버팅거 시티를 되찾자고 주장했다. 버팅거 시티의 식품 공장이 걱정되는 어린 집사도 적극 동조했다. 그러나 두 명의 전술가가 반대했다.

“호수성의 배신은 물증이 없소.”

한 명은 당대 최고의 기사 주드 맥켈런 남작이었다. 로벨 앞에서도 틱틱 거리는 켈트 경도 백전노장 앞에서는 조심스러웠다.

“볼프 사트로 후작, 그자가 앞마당을 지나가도 수수방관하지 않았소이까?”

“그렇다고 협력하지도 않았죠!”

또 한 명은 로벨 로드릭의 마스코트(Mascot:작은 마녀) 키르케였다. 이쪽은 펄프 대장 이하 전공 많은 용병들을 닥치게 했다.

“호수성은 견고하고, 호수성의 병사는 강해요. 외지에 나온 지난번 적과 달라요.”

마녀가 진지하게 설명하자 어린 집사를 비롯한 늑대성 식구들이 깜짝 놀랐다.

‘저 마녀가 웬일로 제정신이지?’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날이야. 잘 봐 둬.’

마녀 키르케는 경이로운 시선을 오해한 채 에헴! 에헴! 거리며 설명했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검은 성 후작님이에요. 호수성에서 병사가 다치면 안 돼요.”

마녀에게 묘한 시기심을 가진 호른 경이 반박했다.

“우리가 지나간 뒤에 배후에서 치면?”

“호수성 백작님은 겁이 많고 조심스러워서 그러지 않을 거예요. 바다사자 남작님이 말했듯이 아주 배신한 것이 아니잖아요?”

“바다사자...”

주드 맥켈런 남작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기는 쪽에 붙으려고 몸을 사리는 거예요. 아니었으면 볼프 후작님이 내려올 때 싸우든가 합세하든가 했겠지요.”

“어...? 그런가?”

“일리 있네. 있어.”

여러 기사와 용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사자 남작님이 이어서 말했다.

“저 소녀의 말이 맞소.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치면 호수성은 자연히 아군이 될 것이오.”

외팔이, 허풍쟁이, 겁쟁이 등이 못마땅한지 툴툴거렸다.

“그건 그거대로 얄미운뎁쇼?”

“그 집안은 옛날부터 마음에 안 들어.”

최종결정권은 로벨에게 있었다. 로벨은 덩굴성 메인 홀에 모인 기사와 용병들을 쭉 훑어보고 비장하게 말했다.

“그래도 별수 없어.”

@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버팅거 호수를 끼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늪지성의 메튜 경이 호수 주위의 지리를 잘 알고 있어 헤매지 않았다. 하루에 20마일을 행군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흘을 꼬박 이동해 마침내 스톤헤드 요새 앞 파도 평야에 이르렀다.

“후작님! 후작님! 볼프 사트로 후작의 깃발입니다!”

선두를 맡은 메튜 경의 기사 종자가 달려왔다. 어린 집사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만났군요.”

“가 보자.”

로벨은 어린 집사, 주드 맥켈런 남작과 함께 중진을 지나 부대 앞으로 나갔다. 펄프 대장이 울프 용병단을 정지시키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스피어맨 앞으로! 스피어맨 말이다! 니 손에 있는 게 스피어냐? 애꾸눈! 신병 좀 챙겨라!” 유능한 용병대장 덕분에 로벨은 아무 걱정 없이 적진을 살필 수 있었다.

스톤헤드 요새 주변은 ‘파도 평야’라 불리지만, 진짜 평야는 아니었다. 작은 언덕이 물결처럼 늘어서 있어서 구릉지역이라 해야 옳았다. 물론, 볼탄 반도 기준에서는 이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평야였다.

스톤헤드 요새를 바라보는 언덕 세 곳에 대규모 부대가 자리해 있었다.

“진짜가 나타났군.”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전쟁에서 한 번도 정면에 나온 적 없는 구왕파의 주력군이었다.

로벨은 눈살을 찌푸린 채 깃발들을 살폈다. 볼프 후작을 따르는 볼탄 반도 북부 가문의 깃발이 모여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볼프 후작 본인의 깃발과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의 깃발이었다.

‘그렇다면 늑대의 왕도 여기 있겠지.’

셈은 느리지만 감이 좋은 주드 맥켈런 남작이 적의 병력을 진단했다.

“1,500명에서 1,600명 정도 되겠소. 저만한 군대를 준비하다니, 역시 만만히 볼 자가 아니오.”

“아군도 비슷할 거요.”

로벨은 스톤실드 언덕에 짐승 머리처럼 뻗은 요새를 보았다. 선대와 달리 충성스러운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버티고 있었다. 로벨이 이끌고 온 병력과 합치면 충분히 해볼 만 했다.

어린 집사가 불안한 듯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이제 어쩌죠? 선전포고해야 하나요?”

“이미 싸울 만큼 싸우고 왔는데, 우습잖아.”

주드 맥켈런 남작은 수염을 긁적이다가 조언했다.

“그래도 전장에서 마주친 것은 처음이니 일단 이야기해봐야지 않겠소?”

“그것도 그렇군.”

로벨은 볼프 후작의 깃발을 가만히 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가장 경력이 짧은 가시나무 성의 브릭 경을 전령으로 보냈다. 30분쯤 지났을까, 볼프 후작의 진영이 소란스러워졌다.

“앗! 저기 나와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갑옷들이 우람한 전투마를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그 위용만으로 볼프 후작과 측근 기사들임을 알 수 있었다.

“마로드?”

“...갑시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로벨을 따라 호른 경, 브릭 경, 바이란 경, 그리고 주드 맥켈런 남작이 앞으로 나왔다. 켈트 경과 펄프 대장은 만약을 대비해 크로스보우를 준비했다.

언덕과 언덕 사이에서 기사와 기사가 마주 섰다. 로드릭 가문의 깃발과 사트로 가문의 깃발이 남해의 뜨거운 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수천의 군사가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벗고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볼프 후작도 마주 헬름을 벗었다.

“이렇게 또 만나는군.”

“볼프 사트로 후작.”

로벨 로드릭과 볼프 사트로. 직위도, 나이도, 성별도 다르지만, 실로 오랜 인연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시오? 포클랜드 시티의 마상시합장이었지. 그때도 오늘처럼 무더웠소.”

볼프 후작이 추억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로벨은 첫 만남이 아니라 마지막 만남을 회상했다.

“볼프 후작, 지난날 블랙우드 시티에서 본인에게 말하지 않았소. 경의 행동은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그리 말했소.”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나직이 물었다.

“이것이 답이오?”

로벨의 목소리는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볼프 후작은 그 분위기에 휘말려 침묵했다. 말 울음소리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소리만 가득했다.

볼프 후작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침묵 후에 입술을 떼었다.

“본인을 못 믿소?”

“...믿고 싶소.”

“그럼 믿으시오. 거짓은 아닐지니.”

로벨은 혼란에 빠졌다. 그림 리퍼의 경고와 볼프 후작의 장담이 교차했다. 어느 쪽이 진실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로벨의 눈에 볼프 후작을 수행하는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풀 플레이트 아머와 평범한 블랑크 산 전투마인데, 이상하게 낯에 익었다.

‘어디서 봤지?’

로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 깃발이 휘날리고, 말갈기가 흔들리고, 언덕의 잡초가 물결쳤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높고 낮은 언덕, 무장한 기사들... 기억이 떠올랐다.

‘...암살자?’

헬름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확신했다. 왕위계승전쟁을 앞두고 프란시스 시티에서 귀향할 때 로벨 일행을 기습한 일곱 명의 기사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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