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민망
206화. 민망
붉은 산은 볼탄 반도 최고의 철광석 생산지였다. 강철산의 철광도 규모가 크지만 붉은 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지난날 볼탄 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쟁 뒤에는 붉은 산의 주인과 광부들이 있었다.
“그 주인이 하인즈 가문이죠.”
“응. 늙다리 하인즈.”
샘 포클 시대부터 지금까지 붉은 산의 주인은 ‘하인즈’였다. 비록 12기사 가문은 아니지만, 정통성과 영향력이 어느 제후 못지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하인즈 당주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일흔이 넘도록 여자를 밝혀서 옛 신의 교리를 어기고 이혼과 재혼을 일곱 번 했으며, 정실소생만 아홉 명을 두었다. 붉은 마을의 아비 없는 아이 중 절반은 하인즈 자작의 사생아란 것이 거짓말 같은 진실이었다. 식탐이 강하고, 의심이 많았다. 늙다리 하인즈, 욕심 많은 하인즈, 썩은 냄새 하인즈라 불렸다.
로벨은 붉은 산 아래의 광산촌을 보았다.
산비탈을 따라 자그마한 가정집이 늘어서 있고, 산그늘에는 철광석을 녹이는 용광로와 철괴를 찍어내는 제련소가 줄지어 있었다. 망치질 소리가 먼 곳까지 들려왔다. 하인즈 마을, 혹은 붉은 마을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사트로 가문하고 가깝게 지내지만 봉토를 하사받은 봉신은 아니라, 지금껏 전쟁에 직접 나선 적은 없어요. 영주님도 알다시피 음흉해서 세력이 강한 곳에는 전부 발을 담그고 있죠.”
로벨이 무적무패의 기사로 위명을 떨치자 딸아이를 앞세워 정략결혼을 요구한 바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녀석이 있었잖아?”
“아...? 조이 모몬트 경이요?”
“응. 하인즈 가문의 기사였지?”
로벨은 빨간 머리의 천방지축 기사를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경박하긴 해도 재미있는 기사였다. 하지만 추억은 추억일 때 아름다운 법이다. 어린 집사가 냉큼 현실로 끄집어냈다.
“그리고 무트 모몬트 남작의 차남이죠.”
“...그렇지.”
모몬트 가문의 장남 지프 모몬트 경은 검은 숲 전투에서 생포해 지금 까마귀 성 지하감옥에 갇혀 있고, 모몬트 가문의 당주 무트 모몬트 남작은 까마귀 성 계곡에서 패퇴해 생사불명이었다. 로벨 손에 일가가 풍비박산 났다.
“영주님을 보면 화를 낼걸요?”
“화만 낼까?”
로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지프 모몬트와 조이 모몬트 이외에도 한 명 더 있었다. 로벨이 아니라 주드 맥켈런 남작과 안면이 있는 세 번째 모몬트 형제였다.
“길리언 모몬트가 남아 있소.”
“3년 전 본인의 영지를 공격할 때 남작을 지원해 준 자가 맞소?”
“그렇소.”
과거 로벨과 맥켈런 남작을 이간질해서 싸우게 한 배후 중 하나였다. 정황상 볼프 후작의 최측근이자 악마추종자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그쪽 가문하고는 악연이군.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소.”
그러나 세상일은 항상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최대한 조용히 이동했으나, 인원이 인원이고 장비가 장비다 보니 완전히 숨길 수 없었다. 산능선에 사는 목동에게 발각되어 붉은 성의 하인즈 자작에게까지 알려졌다.
하인즈 자작의 반응은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안마당이라 하나 무적무패-비록 검은 성을 함락시키진 못했지만-의 기사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못 본척하고 붉은 산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말썽이 일어났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걱정한 ‘그 기사’ 때문이다.
“로벨 로드릭! 이 사악한 기사! 복수의 창을 받아라!”
조이 모몬트 경은 마녀 키르케가 좋아하는 말투로 등장했다.
“뭐, 저런...”
“이랴앗!”
조이 모몬트 경이 하늘 높이 치켜든 랜스를 앞으로 기울여서 랜스 레스트에 걸었다. 표정, 몸짓, 속도까지 설명이 필요 없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손을 뻗었다. 어린 집사는 당나귀 옆구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무기 중 해비 랜스를 찾아 앞쪽으로 뽑았다. 그러나 랜스는 길고 어린 집사의 팔은 짧았다. 미리 준비했으면 모를까, 갑작스럽게 크고 무거운 랜스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로벨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다.
단신으로 300명이 넘는 군대에 기마 돌격하는 것은 용기를 넘어 미친 짓이었다. 로벨조차도 지원해줄 기사나 궁수가 있을 때만 시도했다.
‘정말 바보잖아?’
로벨을 대신해서 호른 경과 켈트 경, 그리고 맥켈런 가문의 젊은 기사 두 명이 달려 나갔다. 로벨만큼은 아니어도 명성이 자자한 기사들이었다. 용맹하긴 하나 실전경험이 부족한 조이 모몬트 경이 대적할 기사들이 아니었다. 숫자가 부족하면 더욱 그러하다.
첫 공격에서 호른 경의 오른팔을 쳐내 랜스를 빗겨냈다. 그러나 이어지는 켈트 경의 랜스에 가슴을 두들겨 맞고 낙마할 듯 휘청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맥켈런 가문의 기사들이 달라붙어 워 해머로 신명 나게 두드렸다. 쿵! 쿵! 딱! 콰당! 최고의 장인이 심열을 기울여 만든 갑옷이라도 저리 두드리면 버틸 재간이 없다.
“꺼어...억...!”
조이 모몬트 경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로벨을 위해, 그리고 어린 집사의 포상금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던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은 아쉬워하면서 안도했다. 병장기를 치우고 털레털레 걸어가 패전기사 조이 모몬트 경을 로벨 앞으로 끌고 왔다.
“이 자식이! 감히 우리 기사 나리를 노려?”
“그래도 기사인데... 이 자식은 좀...”
“이 나으리가! 감히 우리 기사 나리를 공격해?”
기사와 용병이 둘러싸고 창, 칼, 도끼 따위를 겨냥했다. 로벨이 명령하면 1분 내로 꾸겨진 철판과 잘 다져진 고깃덩이가 될 것이다.
로벨은 뒤늦게 손에 쥔 해비 랜스를 꼿꼿이 세우고 땅바닥에 쓰러진 모몬트 가문의 차남을 굽어보았다.
“우리 구면 아니오?”
“그리고 가문의 원수지!”
그럴 줄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조이 모몬트 경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분개해서 외쳤다.
“아버지와 형님을 해치고! 여동생을 살해했지! 우리 모몬트 가문의 철천지원수다!”
로벨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부친과 형님의 일은 전쟁의 결과요. 그리고 경의 누이는 내가 살해하지 않았소. 사악한 마녀의 짓이었지. 그쪽도 잘 알지 않소?”
“시끄럽다! 이리된 거 나도 죽여라!”
착한 사람이 화내면 무섭고, 바보가 화내면 답답하다. 구릉성의 마튼 경이 헬름을 벗고 땀에 젖은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조이 경이랬지? 경이 한 짓을 경의 주군도 아시오?”
“나, 나의 주군은...”
조이 모몬트 경이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늙다리 영주와 철부지 기사라도 주종관계는 분명했다.
호른 경이 해비 랜스를 종자에게 넘기고 말머리를 가까이했다. 모닝스타가 불쾌한 듯 콧김을 뿜었다.
“주군을 위협한 것은 괘씸하나 하인즈 자작의 사람입니다. 이 시기에 하인즈 가문과 척을 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로벨도 동의했다. 요즘 같을 때 적을 늘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무기만 뺏고 풀어줘.”
“뭣? 뭐를 뺏어?”
펄프 대장이 턱짓하자 외팔이 더치 패거리가 달려들어 롱소드, 망고슈, 대거 등등 개인무장을 해제했다. 기사의 고급 무기를 손에 넣은 용병들은 시시덕거리며 좋아했다.
“이놈들이? 감히! 저리 꺼져! 꺼지라고!”
조이 모몬트 경은 용광로의 쇳물처럼 빨개져 악을 썼다. 외팔이 더치는 기사에게 당한 것이 많아 찔끔했지만, 로벨의 위세를 믿고 어깨를 당당히 폈다.
“이 일로 사트로 가문의 봉신들이 눈치 챌 겁니다.”
“우리가 남하하고 있다고?”
“가십만큼 빨리 퍼지는 것은 없지요.”
호른 경의 귀족적, 정치적 감각은 어린 집사나 펄프 대장 이상이었다. 그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자신의 영지가 안전함을 확인한 사트로 가문 기사들은 회군을 멈추고 하나둘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이 엉뚱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간이란 혼자일 때 가진 것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지만, 뭉치면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무명기사 조이 모몬트의 명예가 이용되었다. 북방을 수호하는 명예로운 모몬트 가문의 차남 조이 모몬트 경이 가족의 복수를 위해 로벨 로드릭의 300명의 기사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놀라운 무용으로 12명의 기사를 차례로 쓰러뜨렸으나, 간악한 늑대의 간교한 함정으로 사로잡히고, 끝내 처형될 위기에 처하는데, 옛 신의 천사가 도와 무사히 탈출했다는, 조금 길고 매우 터무니없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조이 모몬트 경을 본받아야 한다!”
“로벨 로드릭을 처단하자!”
로벨 등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일이었다. 웃음 밖에 안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지만 덩굴성 앞을 틀어막고 포진한 22명의 기사와 300여 명의 병사를 보면 웃을 수 없었다.
“숫자는 비슷하군.”
“실력은 다르지요.”
로벨 로드릭 군은 산전수전야전공성전 다 겪은 베테랑 울프 용병단과 해적을 때려잡으러 다니는 청옥성의 정예병이지만, 사트로 가문의 영지병은 멧돼지도 잡아본 적이 없는 평범한 농민병이었다. 기사의 실력 또한 남달랐다. 전, 현직 그랜드 챔피언은 말할 것도 없고,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마튼 경 등도 지역 내에서 당해낼 자가 없는 기사들이었다. 아직 젊은 브릭 경과 이름이 안 알려진 메튜 경 등도 주인을 잘못(?) 섬긴 탓에 비슷한 시기 서임 받은 기사와 비교할 수 없을 실전경험을 쌓았다. 따라서 양측의 전력을 길게 설명하는 것도 무의미했다.
“맥켈런 경, 좌익을 맡아주시겠소?”
로벨의 명령 아닌 명령에 주드 맥켈런 남작은 휘하 기사를 소집해 좌측으로 이동했다. 로벨은 병력 배치를 확인하지 않고 재차 명령했다.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우익을 맡으시오. 펄프 대장, 외팔이, 정면을 막아. 과묵한 몬트, 외팔이를 지원해. 애꾸눈, 허풍쟁이, 겁쟁이, 오늘은 날씨가 좋지?”
어린 집사와 어린 기사 종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잘 나가다 뜬금없는 소리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숙련된 활잡이들은 미소 지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산비탈을 타고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싸우기에는 딱 좋았다. 애꾸눈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높이 들었다. 사람 키보다 높은 곳에 바람을 읽었다.
“최소 20보는 앞섭니다.”
“좋아. 그 정도면 됐어.”
로벨은 말안장에서 파나케아 투구를 꺼내 눌러썼다. 양익으로 흩어진 아군 기사들이 능수능란하게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로벨은 아군의 준비가 끝나기 바로 직전, 애꾸눈에게 신호했다.
“따끔하게 해줘.”
“크로스보우 전 소대! 사격 준비!”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크로스보우맨이 앞으로 나섰다. 1소대가 쇠뇌 등자를 밟고 시위를 당기는 사이, 2, 3소대가 2인 1조로 파비스를 풀어 설치했다. 과장 좀 해서 맥주 한 잔 들이켤 사이 사격준비가 끝났다. 적진에서 동요가 일어날 때 애꾸눈이 재차 명령했다.
“발사!”
@
울프 용병단의 기습사격에 사트로 가문의 영지병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크로스보우의 일반적인 사거리만 생각하다가 선공을 빼앗긴 것이다. 뒤늦게 응사했으나 역풍에 걸려 절반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때 경험 많은 지휘관이라면 기사들을 돌격시켜 쇠뇌병의 흐름을 끊고, 사거리의 이점이 없는 곳까지 전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트로 가문의 군대는 지휘관의 능력에 앞서 지휘관의 존재조차 불투명했다. 10명에서 30명의 휘하 병사를 이끌고 되는대로 모인 기사들이라 막싸움이면 모를까 ‘전쟁’을 수행할 능력은 없었다.
‘그럼 더욱 돌격해야지. 바보들아.’
만약에 미친 척 돌격했으면 20여 명의 중장갑 기사들로 울프 용병단 역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세에 눌린 사트로 가문 기사들은 최악의 수를 두었다. 크로스보우 사거리 밖으로 부대를 물린 것이다. 여기서 정예병과 오합지졸의 차이가 나타났다.
사실 정예병이라 함은 별 것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을 맞춰 움직일 수 있으면 정예병이고,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는 잡병이었다. 사트로 가문의 영지병은 누가 봐도 오합지졸 잡병이었다. 전진할 때도 발을 못 맞추는 병사들이 후진할 때 맞출 리 없었다. 방진이 일그러지더니 삽시간에 서너 조각으로 쪼개졌다. 로벨 로드릭의 노련한 양날개가 그 틈을 놓칠 리 없었다.
“돌진! 옆구리를 긁어주자!”
“북해 섬 촌놈들에게 뒤처지지 마라!”
주드 맥켈런 남작이 노년에 서술하길, 이날의 전투는 전투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