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징발
203화. 징발
로벨은 푸른달 성을 점령한 후 성 아랫마을의 주민을 모았다.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어린 집사와 공포감을 주는 외팔이 더치를 보내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병자를 제외하고 한 명도 빠짐없이 성문 앞에 오도록 지시했다. 한평생 기사의 보호를 받아온 검은 숲 영지민은 기사 나리가 시키는 일에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남자가 151명, 여자가 326명, 어린아이가 21명으로 총 498명이에요.”
몇 년째 계속된 전쟁으로 성인남자의 숫자가 현저히 줄었다. 그나마 남은 사내도 갓 성인이 된 10대와 머리가 하얗게 물든 50대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저래서 봄 작물이 얼마나 될지...’
어린 집사가 로벨을 소개하기 위해 “에험! 에험!” 거리며 목청을 다듬었다. 그때 로벨이 저지했다. 큰 신세를 질 텐데 인사 정도는 직접 해야 할 것 같았다.
“난 볼탄 반도의 늑대성 주인 로벨 로드릭이야. 포클랜드의 국왕 폐하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모시고 있으며, 검은 숲의 적법한 주인 알버트 제임스 공작의 벗이야.”
어린 집사가 이마를 짚었다. 고귀한 기사들과 어울리다 보니 감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역시나 푸른달 성의 영지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저번에 온 기사 나으리는 도리안 어쩌구 왕이라 하지 않았나?”
“볼탄 반도면 거시기 야만족 나라 아닌감? 거기서 뭔 일로 왔당까?”
그들은 뼛속까지 농부였다. 자기 텃밭에 두더지 숫자가 주요 관심사지, 어느 가문의 누가 어느 가문의 누구에게 충성하는지 따위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현명한 건지 무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린 집사가 눈높이를 맞춰서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왕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기사님이에요! 알겠어요?”
알기 쉬운 설명에 제대로 된 반응이 나왔다.
“아이고! 기사 나으리! 무례를 용서하세요!”
“저희가 무식해서 몰라뵙습니다요!”
그런데 영지민뿐만 아니라 로벨까지 깜짝 놀랐다.
“내가 세 번째였어?”
어린 집사가 헛기침하고 속삭였다.
“뭐, 대충 그런 걸로 하세요. 여섯 번째나 아홉 번째라 하면 권위가 애매하잖아요?”
로벨은 애매하지 않은 권위를 등에 업고 다시 영지민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어린 집사를 본받아 쉽고 간결했다.
“먹을 것이 필요해.”
그러나 내용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높으신 분이 와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요구하는 일은 흔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고단했다. 푸른달 마을 촌장이 조심스럽게 협상을 시도했다.
“저, 여기 계신 분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면...”
“우리가 전부가 아니야. 그리고 한 끼 먹을 것도 아니고.”
촌장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떠올랐다.
“저기, 저, 그러면 몇 명이나...”
“한 천 명 정도?”
촌장이 놀라서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네 자릿수는 부담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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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인구와 물자를 조사한 후 딱 가을 추수 때까지 버틸 식량만 남기고 징발했다. 푸른달 성 영지민은 울고, 빌고, 화를 내었다. 가을 농사가 잘 될지 어떨지 모르는 마당에 봄 작물을 징발하는 것은 살얼음판에 내던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로벨도 어쩔 수 없었다. 몽땅 빼앗아가지 않은 것만도 자비로운 일이었다. 로벨과 푸른달 성 사람은 모르지만, 검은 숲 각지로 흩어진 기사들 중 상당수가 인정사정 없이 징발 중이었다. 올겨울이 지나면 검은 숲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아이고! 이 녀석은 안 됩니다요!”
“왜요? 수소는 두 마리나 있잖아요?”
“한 놈은 너무 어리고, 한 놈은 너무 늙어서 안 됩니다요.”
“그럼 늙은 놈으로 가져갈게요.”
“아이고! 아이고!”
어린 집사는 얄짤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을 시켜서 늙은 소를 끌고 오게 했다. 식량을 운반할 수단이자 식량 자체였다. 늙은 소는 엉엉 우는 늙은 주인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천성이 순해서 저항하지 않았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며 보고했다.
“영주님, 징발이 끝났습니다.”
“...전부 빼앗진 않았지?”
“예. 심려하지 마십시오. 여름이 한창이고 숲이 가까우니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부지런 떠는 휘하 병사들을 보았다. 수레에 곡물이 가득가득 실려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쇠스랑을 움켜쥔 노인과 갓난아기를 안은 여인네와 코를 훌쩍이며 두리번거리는 꼬마들이 있었다.
‘미안해.’
눈초리가 살벌하지만 차마 덤비지는 못할 것이다. 울프 용병단을 상대하기에는 무기도, 숫자도 부족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용병들이 기분 나쁜 듯 으르렁거렸지만, 이런 일이 익숙한 펄프 대장 이하 고참 용병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조금만 참아.’
로벨은 모닝스타를 몰아 영지민 무리에게 다가갔다. 고귀한 기사 나리가 접근하자 싸울까 말까 고민하던 사내들이 깜짝 놀라 땅바닥에 엎드렸다. 헛된 고민이었다. 값을 짐작할 수 없는 고급 필드 아머와 윤기가 흐르는 하프 유니콘 모닝스타의 위압감이 대단해서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작성하고 자신이 서명한 차용증을 촌장에게 내밀었다.
“이곳에서 빌린 물자 목록이야. 전쟁이 끝나면 갚을 테니까 잘 가지고 있어.”
어린 집사가 코웃음 쳤다. 로벨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전부 요식행위였다. 영지민은 까막눈이라 차용증을 읽지 못한다. 설령 읽을 수 있어도 고향땅에서 30마일을 벗어난 적 없는 농부들이 머나먼 볼탄 반도까지 어찌 올 수 있을까. 애당초 하늘 같은 기사 나리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할 용기도 없을 것이다.
로벨은 차용증을 소중히 챙기는 촌장을 보며 외로이 다짐했다.
‘내가 전쟁을 끝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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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징발한 식량이 적지 않지만, 많지도 않았다. 아니,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적은 편이었다. 신왕파 연합군. 혹은 포비아 왕국 해방군의 영주들은 좋게 말하면 수완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인정사정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검은 숲에서 어떻게 하면 밀 200자루와 보리 300자루와 양 50마리를 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로벨 경! 이제 오시오? 늦었소이다!”
“후작의 말이 맞았소! 이거 보시오! 먹을 것이 산더미잖소!”
기사들이 자랑스럽게 ‘전리품’을 보였다. 어린 집사가 입술 모양으로 ‘약탈품’이라 정정했다. 무례한 말투지만 다행히 일개 기사 종자에게 신경 쓰는 기사는 없었다. 로벨은 정도가 지나치자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털어온... 모아온 것이오?”
“어허! 로드릭 후작! 우리를 어찌 보고? 제임스 공작의 아랫사람들인데 설마 굶어 죽게 했겠소?”
로벨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역시 그렇지?”
“그야 물론이오! 내일 먹을 것은 남겨뒀지! 아, 오늘인가?”
로벨은 대책 없고 배려 없는 기사들의 태도에 욱! 했다가 자아성찰로 넘어갔다. 로벨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 말대로 가을이 멀지 않고 숲이 무성하니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위안 삼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검은 숲의 영주들이 전사하거나 도망친 뒤라 사슴을 잡고 과일과 버섯을 채집해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 가지고 수백, 수천의 영지민이 버티지는 못하겠지만...
로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성이 기사인 여러 기사들은 태평하게 말했다.
“자자, 떡갈나무 성으로 가서 한잔합시다. 델 포니 와인처럼 고급술은 구하지 못했지만, 썩 괜찮은 것이 있으니...”
“그만두시오!”
로벨이 짜증을 내자 기사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로벨은 심호흡했다. ‘누구의 잘못이 아니야’ 저들은 기사이자 정복자였다. 점령지에서의 징발은 당연한 것이며, 로벨 또한 자주 실행했다. 포비아 왕국에서, 유라피아 대륙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저 오늘따라 신경이 날카로울 뿐이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그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로벨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둘러댔다.
“그 술은 승리 후에 마시겠소.”
“승리 후에?”
“전열을 정비해서 블랙우드 시티로 출발할 것이오.”
제임스 공작이 등자를 내리밟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공작의 말이 깜짝 놀라 투레질했지만, 공작은 마법의 단어에 흥분해서 애마를 배려하지 못했다.
“블랙우드 시티! 참말이오?”
로벨은 여러 기사들을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쟁을 언제까지 끌 수 없으니 가을이 오기 전에 볼프 후작군과 옛 왕을 몰아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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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로벨에게 고무된 기사들은 위풍당당하게 떡갈나무 성에 입성했다.
예상 밖으로 전투가 격렬했는지 성 밖의 몰골이 엉망이었다. 성벽 위와 해자 아래에 시체가 널려있고, 부러진 창, 꺾인 화살, 망가진 쇠뇌 따위가 굴러다녔다.
성문을 지나자 전화의 흔적이 더욱 뚜렷했다. 전투 중에 흥분한 병사가 불을 질러서 창고와 마구간이 잿더미가 되었다. 건초창고는 불씨가 꺼지지 않아 접근이 불가능했다. 연기와 피냄새가 매캐했다.
전쟁에 지친 병사들은 각양각색 투구와 각종 무기를 풀어놓고 그늘진 곳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기운이 남아 시체를 치우는 병사들이 쥐 죽은 듯이 자는 병사를 시체로 알고 끌어당겨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연기, 시체, 창칼, 핏자국 위에 우뚝 솟은 자비에 가문의 깃발이 생경했다.
“경들, 어서 오시오.”
성문이 사라진 아성에서 자비에 후작이 마중 나왔다.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한 듯 아성도 엉망이었다. 떡갈나무 재질의 두꺼운 성문은 물론, 식탁과 옷장으로 쌓은 바리게이트까지 깨지고 부러져서 흩어져 있었다. 기둥마다 시체가 서너 구씩 쌓여 있고, 핏물이 시냇물처럼 흘러 성 밖 배수로에 이르렀다.
제임스 공작은 자신의 성이 처참히 밟힌 것을 보고 괜한 심통을 부렸다.
“제법 고전한 모양이오?”
그러나 투박한 지방 제후인 제임스 공작은 포클랜드 시티에서 세도가로 군림해 온 자비에 후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검은 숲의 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잘 보았소이다.”
제임스 공작은 칭찬으로 알고 껄껄 웃었다. 그러나 주인이 인정한 ‘견고한 성’을 자신이 함락시켰으니 사실 자화자찬이었다. 눈치가 좋은 기사들은 조롱임을 알았지만, 눈치가 좋기 때문에 바보처럼 웃는 제임스 공작을 내버려두었다.
‘이런 작자들을 믿고 블랙우드 시티를 공격해야 하나?’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기사들은 볼탄 반도에서 온 세 번째 제후를 힐끔거렸다. 단순한 검은 숲의 공작이나 음험한 포클랜드의 후작보다 믿을 만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뭇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모두가 로벨이 명령하기를 기다렸다. 누구도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로벨 로드릭을 포비아 왕국 해방군의 총사령관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부대를 정비하시오.”
“허면...”
“내일 아침 우리군은 굽은 바위 요새를 지나 블랙우드 시티로 진격할 것이오. 볼프 사트로 후작을, 그리고 과오가 많은 옛 왕을 이 땅에서 쫓아낼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