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02화 (202/605)

202화. 승전기록

202화. 승전기록

시간이 지나자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갔다.

충차에 깨진 성문을 수리하고, 불에 탄 계곡 아랫마을을 재건하고, 머리가 깨진 부상자는 붕대를 감고, 팔다리가 부러진 병사는 목발을 짚고, 악몽에서 벗어나 간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인명피해는 크지 않으나 재산피해가 막대했다. 심각한 일이었다. ‘사람이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풍족한 시절에나 가능한 것이다. 로벨 로드릭 군대와 포클랜드의 군대가 합쳐져 숫자가 1,100명에 이르렀다. 하루에 먹어치우는 식량을 자루 단위로 계산해야 했다. 귀리와 보리는 진작에 바닥나서 콩과 순무를 삶았다.

“우리가 말인 줄 알아? 하루 종일 콩만 먹이게?”

“사실 우리보다 말이 더 비싸긴 하...”

“시비냐? 시비야? 싸울까?”

본디 가난한 농민병은 금방 적응했지만, 고귀한 기사와 몸값 비싼 용병이 반발했다.

“구왕파 놈들은 대체 뭘 먹은 거지?”

“절반이 고블린이었잖아.”

“그런데?”

“...모르면 행복한 거다.”

인간은 고블린과 달리 먹을 수 있는 종(種)이 한정되어 있었다.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면 혹 모르지만, 이성의 끈이 남아있는 이상 몬스터처럼 굴 수 없었다.

로벨은 고심 끝에 해결책을 내놓았다.

“진군합시다.”

제임스 공작, 자비에 후작, 도너반 자작 등이 로벨을 돌아보았다.

“진군이라니? 어디로 말이오?”

“초승달 강을 건너면 봄 추수가 끝난 곡물이 있을 것이오. 급한 대로 빌려서 군량으로 삼읍시다.”

고명한 기사들이 서로를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농부가 문제가 아니잖소?”

초승달 강 너머의 성과 요새에는 볼프 후작군이 버티고 있었다. 숫자는 많지 않아도 공성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선뜻 진군하기가 어려웠다. 어느 소심한 기사가 약한 소리를 했다.

“블랙우드 시티까지 요충지가 11개요.”

로벨은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확신했다.

“그건 문제가 안 되오. 한 곳만 점령하면 되오.”

“떡갈나무 성!”

검은 숲 출신이 가장 먼저 알아챘다. 고작 두어 번 방문한 로벨이 생각할 정도니 당연했다.

“까마귀 성이 검은 숲의 대문이라면, 떡갈나무 성은 안마당이오. 떡갈나무 성을 점령하고 발 빠른 부대를 주둔시키면 적군이 어디서 준동하든 진압할 수 있소.”

제임스 공작과 검은 숲 기사들은 흥분해서 옳다고 떠들었고, 자비에 후작과 포클랜드 기사들은 그런가 보다 반응했다.

“어차피 해야 할 싸움이면 승기를 잡았을 때 마무리해야지. 난 찬성이오.”

“에라이! 체면 차릴 때가 아니잖소? 당장 출발합시다!”

그때, 자비에 후작이 말했다.

“본인이 떡갈나무 성을 맡겠소.”

“...후작이?”

의외의 자원자에 깜짝 놀랐다. 제임스 공작쪽에서는 불편한 기색도 있었다. 자비에 후작은 오해를 풀기 위해 부연 설명했다.

“경들의 병사는 지치지 않았소. 그나마 생생한 포클랜드 인이 나서야지.”

표정들이 복잡해졌다. 로벨은 여러 기사를 쭉 훑어보고 말했다.

“떡갈나무 성은 견고한 곳이오. 성벽이 15피트에 이르고, 해자가 깊이 파여 있소.”

“그래도 로벨 로드릭은 없겠지.”

로벨은 뜬금없이 자신이 거론되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비에 후작은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의 악몽을 떠올리고 씁쓸해했다. 한 곳에서 두 번 연속으로 패배한 유일한 전투인데, 그 원흉은 기억조차 못하는 듯했다.

“어쨌든 그리할 것이오. 경들은 안심하고 군량 조달에 힘쓰시오. 사트로 가문의 본대와 싸울 날이 머지않았으니...”

@

로드릭 가문, 제임스 가문, 자비에 가문과 세 가문의 봉신 가문과 세력이 없는 서른네 개 가문까지 총 52개 가문이 초승달 강을 도하했다. 기사가 52명, 기사 종자가 79명이며, 용병과 농민병을 합쳐 920명이었다. 수행원과 종군 상인까지 합치며 1,100명이 넘었다. 어지간한 장원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수준이었다.

“멋져...”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꼭 쥐고 중얼거렸다. 햇빛을 받아 빛이 나는 플레이트 아머-햇빛보다 눈 밑이 퀭한 기사 종자의 노고가 더 크다-를 입고,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덩치의 전투마를 타고 어지러운 깃발 아래 행군하는 기사들의 모습은 소설책에서 막 튀어나온 듯했다.

“흐유-! 말똥 냄새가 장난 아니에요.”

어린 집사가 코를 붙잡고 질색했다.

“말이 말똥 싸는 게 당연하죠. 남자가 그거 가지고 징징거려요?”

“전 그쪽하고 달리 곱게 자랐거든요? 그리고 엄한 농부들 약탈하러 가는데 뭐가 멋지다고...”

보통은 사내아이가 좋아하고 계집아이가 무서워하는데 늑대성 식구들은 반대였다.

“약탈이 아니라, 그 뭐냐, 그래! 빌리는 거죠! 그래요!”

“퍽이나?”

어린 집사처럼 냉소적인 사람도 없지 않으나, 객관적으로 볼 때 장관이었다. 하늘이 아프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높은 파이크와 쇠와 사슬로 보강해서 철컥! 철컥! 소리 내는 부츠가 수백 개였다. 이만한 병사와 이만한 쇠붙이가 한곳에 모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신왕파 군대를 목격한 검은 숲 영지민들은 겁에 질려 도망가거나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그 반응에 철없는 어린 병사들은 우쭐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어린 집사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지금쯤 도로 공사가 끝났을 텐데... 리암 수사님이 임금을 빼먹진 않았겠죠?”

“헤? 임금 안 주면 좋은 거 아니에요?”

“우리 영지의 평판이 떨어져요. 영주님의 명예도 걸려있고요. 그리고 소문이 나면 다음에 공사할 때 아무도 안 오겠죠.”

“또 공사해요?”

“그럼요! 아직도 할 일이 산더미에요.”

어린 집사는 왕위계승전쟁 이후, 어쩌면 그 이후의 이후까지 생각했다. 그 미래는 철저히 늑대성이 중심이었다.

반면, 로벨은 눈앞에 닥친 일만 생각했다. 그러나 로벨이 보는 것은 늑대성이나 볼탄 반도가 아니라 포비아 왕국 전체였다.

‘검은 숲에서 밀려나면 전쟁터는 자연히 볼탄 반도가 될 거야. 에릭 공작이 없으니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의 도움이 필요해.’

로벨은 눈앞에 포비아 왕국의 지도를 그렸다. 세부적으로는 잘못된 곳이 많지만, 세력도로 볼 때 어느 지도보다 정확했다.

‘페르젠 백작은 성격이 단순하니까 조금만 띄워주면 도와줄 거야. 페르젠 백작군으로 바위성과 가시성을 지키자. 그리고 헤르만 백작은...’

몰드 헤르만 백작은 선대 볼트 헤르만 백작만큼이나 음흉했다. 솔직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지금은 방법이 없어. 호수성과 가까운 늪지성을 부탁하자.’

그 외에도 덩굴성의 에디즈 자작, 바람성의 맥기 남작 등을 생각했다. 에릭 공작과 함께 주력이 빠져나갔지만, 볼탄 반도의 저력은 약하지 않았다.

“여기서 헤어져야겠소.”

로벨의 상념이 깨졌다. 자비에 후작이 헬름을 뒤집어쓰며 전투마를 몰아 다가왔다.

“본인은 이대로 북진해서 떡갈나무 성을 점령하겠소. 경은 어느 쪽으로 가시오?”

로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가 가까워서 방향을 가늠하기 좋았다.

“푸른달 성으로 갈 것이오.”

“꽤 멀군.”

“볼프 후작의 잔당을 격퇴하고, 군량을 모아 떡갈나무 성으로 보내겠소. 언제가 좋으시오?”

“3일이오. 3일이면 충분하니 서두르시오.”

자비에 후작은 소리 내서 웃었다. 헬름의 촘촘한 숨구멍으로 유쾌함이 흘러나왔다.

“그럼 무운을 빌겠소.”

“옛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검은 숲의 경계를 따라 푸른달 성으로 향했다. 지난날 ‘검은 숲 해방군’으로 종군한 그대로였다. 그 시절 경험이 있는 고참 용병들은 여유를 부리며 기회가 될 때마다 신입 용병에게 자랑했다.

마녀 키르케가 항상 그랬듯 뜬금없이 질문했다.

“왜 푸른 달이에요? 달은 하얗잖아요?”

어린 집사가 당나귀 위에서 턱을 괴어 로벨을 흉내 냈다.

“초저녁에는 주황색이고, 한밤중에는 하얀색이죠.”

“그럼 파란색은 언제죠?”

어린 집사가 고민에 잠겼다. 로벨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어린 집사가 모르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자 감탄사를 터트렸다.

“바보야. 하늘을 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멀리 떨어진 곳의 봉신과 봉신의 병사들까지 저기 뭐가 있나 싶어서 덩달아 높은 곳을 보았다. 우습고 황당하지만, 모두가 푸른 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낮에 뜬 달이 파랗군요?”

“낮에 뜬 달... 음... 어감이 이상해요.”

마녀 키르케가 직업정신을 발휘했다. 신비, 신성, 신화, 모순, 망상이 마법사의 힘이었다.

“의외의 장소. 잘못된 시간. 흐릿한 존재...”

로벨이 깜짝 놀라 물었다.

“마법이야?”

마녀는 지팡이로 고깔모자를 올리고 배시시- 웃었다.

“아니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거예요.”

“아, 그래?”

로벨은 큰일이 아니라 안도했다. 그러나 큰일은 아니어도 별일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오랜만에 전공분야가 거론되자 신나서 조잘조잘 떠들었다.

“하지만 뭐 마법이 별건가요? 나무 밑동을 가리키며 ‘저건 의자다!’ 외치면, 더 이상 밑동이가 아니라 의자로 보이는 것이 마법이죠.”

“...응?”

“사물의 진정한 형상은 현실이 아니라 관념-이데아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의자라는 사물을 현실에서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잖아요? 다리가 3개인 것도 의자고, 등받이가 없는 것도 의자고, 쇠로 만든 것도 의자고, 돌로 만든 것도 의자고...”

“끄응!”

어린 집사가 로벨을 째려보았다. ‘왜 쓸데없는 말을 해가지고!’ 로벨도 할 말이 없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푸른달 성에 갈 때까지 현실이 어떻고 관념이 어떻고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

그러나 전쟁은 가장 현실적인 사회활동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만큼 일목요연한 것이 없었다. 철학과 관념은 물론이고, 상식과 논리조차 끼어들 틈이 없었다.

“사다리 올려! 사다리 올리라고!”

“풋맨 소대! 밥값 할 때다! 돌격 앞으로!”

푸른달 성은 늑대성이 늑대성이라 불리기 이전, 가난한 시절의 로드릭 성과 비슷했다. 통나무를 여러 개 엮어서 성벽으로 삼고, 목재 성탑과 목재 망루를 곳곳에 배치했다. 단, 검은 숲의 풍부한 자원 덕분에 규모는 훨씬 컸다.

울프 용병단 성벽 아래 파비스 설치하고 쉼 없이 쿼럴을 쏟아붓는 동시에, 역시나 풍부한 자원을 활용해 20개의 사다리를 동원했다.

이때 지난 전쟁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사다리 아래쪽을 뾰족하게 깎아 땅에 박히게 하고, 사다리 끝에 갈고리를 달아 성가퀴에 걸리게 했다. 숙련된 풋맨들은 한 손으로 방패를 쓰고 한 손으로 사다리를 지탱하며 다가가 적절한 위치에서 일치단결해 기울였다. 사다리 끝이 높이높이 올라가 정점을 찍고 성벽 쪽으로 빠르게 기울어졌다.

쿵! 쿠웅-!

푸른달 성에 사다리가 하나둘 걸렸다. 성 수비병이 악착같이 달라붙어 사다리를 밀어냈으나 울프 용병단이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자 뾰족한 발판이 땅속 깊숙이 박히고, 갈고리가 성벽을 꽉 움켜잡아 쉽게 밀려나지 않았다. 한 명 두 명 성벽에 오르고, 한 사람 두 사람 쓰러트리다 보니, 어느 순간 성벽 위에는 익숙한 얼굴이 더 많아졌다. 호른 경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끝났군요.”

성을 수비하는 사트로 가문 기사가 종자와 함께 아성에서 끝까지 저항했으나 부질없었다. 로벨과 측근들은 활짝 열린 성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시체와 부상자가 주위에 너부러져 처참했다. 성벽에서 멀지 않은 곳, 아성쪽에서 투탕투탕하는 성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의 걸걸한 욕설은 덤이었다. 로벨이 성 안에 있었으면 해머가 아니라 욕설 때문에 성문을 열었을 것이다.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와 파비스를 양손에 들고 로벨을 맞이했다.

“영주님, 승리했습니다.”

“응. 수고했어.”

로벨 로드릭의 승전기록이 더해졌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은 승전이었다. 검은 숲 곳곳에서, 그리고 볼탄 반도 곳곳에서 비슷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