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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01화 (201/605)

201화. 숙취

201화. 숙취

로벨은 첫 돌격에서 해비 랜스를 잃었다. 고르고 골라 다듬고 다듬은 애병이지만 아쉽지 않았다. 잉그비아 왕국 병사 두 명을 관통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달려라! 심장이 터질 때까지 멈추지 마라!”

“이럇! 이랴앗!”

고지대에서 달려 내려오는 중장갑 기사는 산비탈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와 비슷하다. 그것도 뾰족한 가시를 능동적으로 찔러대는 잔혹한 바위였다. 피가 튀고 뼈가 갈렸다.

운이 좋아서 참사를 피한 잉그비아 왕국 병사도 있었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기사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사기 백배한 포클랜드의 병사들이 채웠다.

구(舊)왕자파 병사들은 정신 못 차리는 잉그비아 왕국군과 북해의 해적을 무참히 도륙했다. 도끼와 몽둥이가 상하로 휘둘릴 때마다 핏물이 아치를 그리며 솟구쳤다. 초 단위로 사상자가 늘어갔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볼프 후작의 봉신 무트 모몬트 남작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좁은 계곡이라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까마귀 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전우의 활약에 흥분한 30명의 포클랜드의 기사가 앞장서고, 기적을 목도한 검은 숲의 병사가 고함을 지르며 따라갔다.

잉그비아 왕국군은 앞뒤로 포위당했다. 지형 또한 저지대라 불리했다. 그야말로 초승달 강 회전의 재현이었다.

“죽여라! 두 번 다시 우리 땅을 밟지 못하게 확실히 죽여라!”

로벨은 정신없이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베고, 찌르고, 때려서 하나씩 하나씩 꼬꾸라트렸다. 피와 비명에 흥분한 모닝스타도 사정없이 날뛰었다. 머리로 박고, 이빨로 깨물고, 뒷발로 걷어찼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다가 어느 순간 싸울 상대가 없음을 깨달았다.

로벨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바이저를 올렸다. 주위가 온통 시체였다. 아직 아닌 자도 출혈과 쇼크로 곧 시체가 될 것이다. 계곡 하류에서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졌지만 굳이 도울 필요는 없어 보였다.

“로벨 경! 로벨 경! 대승이오! 우하하핫!”

계곡 반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임스 공작이 휘하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무기와 갑옷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나도 비슷하겠지?’

솔직히 말하면 비슷하지 않았다. 로벨이 몇 배 더 심했다. 은빛으로 빛나던 고급 필드 아머가 검붉은 넝마처럼 변했다.

‘어린 집사가 한 소리 하겠다.’

로벨은 수백 명의 패잔병보다 소꿉친구의 잔소리를 걱정했다. 로벨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제임스 공작이 깜짝 놀라 걱정했다.

“아니, 왜 그러시오? 어디 부상이라도 입었소?”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고 말했다.

“볼프 후작과 도반 도트넘 백작을 보았소?”

“아, 아니오. 한 번도 못 봤소이다.”

로벨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늑대의 왕이 예언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로벨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임스 공작은 해맑게 웃었다.

“뭐, 블랙우드 시티에 있겠지. 패전 소식을 접하면 사색이 되어서 볼탄 반도로 돌아갈 것이오.”

볼탄 반도가 고향인 사람에게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자자,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의 승리를 축하합시다. 이크! 이놈 아직 살아있네?”

제임스 공작은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치는 해적을 전투마로 짓밟은 후 수행기사의 깃발 빼앗아 하늘 높이 올렸다.

“우리가 승리했다! 제임스 가문이 승리했다! 검은 숲이 승리했다! 포비아 왕국이 승리했다아아!”

우와아아아아아-!

전투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병사들은 창칼을 휘두르며 함께 고함질렀다. 로벨의 부하도, 자비에 후작의 기사도 미친 듯이 환호했다. 그러나 로벨은 침묵했다.

‘오늘은 이겼지만, 내일은...’

로벨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승리의 함성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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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는데, 패배한 군대보다 승리한 군대가 할 일이 많았다.

전사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치료하고, 포로를 관리하며, 전리품을 수집했다. 전공이 있는 기사를 포상하고, 살아남은 용병에게 전투 수당을 지급했다. 해적들이 성 아랫마을에 불을 지른 탓에 그것까지 처리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승전축하 연회는 만 하루가 지난 뒤에 겨우 열렸다.

“와하핫! 어서 오시오!”

“주군, 이쪽에 앉으시지요.”

식량 사정이 좋아지지 않아 와인 한 잔에 마른 과일이 전부인 조촐한 연회였다. 그나마도 잉그비아 왕국군이 놓고 간 물건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열성을 다해 닦은 필드 아머를 입고 참가했다. 전쟁이 끝나 가벼운 더블릿이나 우플랑드로 갈아입은 기사도 있지만, 무용담을 자랑하기 위해 갑옷을 챙긴 기사도 많았다. 갑옷에 난 흠집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생사의 고비와 무찌른 적군을 3배쯤 과장해 떠벌였다. 그런데 희한하게 로벨이 가까이 가면 입을 싹 씻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왜들 저러지?”

호른 경이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 누가 감히 주군 앞에서 무용담을 늘어놓겠습니까. 오우거 앞에서 힘자랑이지요.”

로벨은 한참 뒤에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모두가 어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벨의 열렬한 추종자인 브릭 경, 바이란 경 등은 자기 자랑보다 주인의 자랑을 늘어놓았고, 제임스 공작은 목이 쉴 만큼 웃으며 술잔을 채워주었다.

“무적무패! 무적무패란 호칭이 조금의 과장도 없다니! 카하! 벌써 몇 번째 승리요?”

“세어 본 적이 없소.”

“그게 더 대단하오! 하하핫! 그 옛날의 정복왕이라도 지금의 경을 대적하기 힘들 것이오. 어쩌면 정복왕보다 더한 업적이지!”

정복왕 샘 포클이 거론되자 연회장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어릴 때부터 샘 포클의 일대기를 듣고 자란 기사들에게 샘 포클은 신앙이었다. 천국에서 옛 신과 호형호제한다고 주장해도 상당수가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할 것이다.

“주군...!”

정치적으로도 위험한 발언이었다. 샘 포클은 정복왕이자 건국왕이다. 여러 지방을 점령해 나라를 세운 사람이었다. 자칫하면 반역, 반란, 국가전복의 뉘앙스가 될 수 있었다. 세 줄짜리 충성맹세로 맺어진 느슨한 주종관계라도 주군과 봉신의 경계는 분명했다.

제임스 공작은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험! 험험! 내가 취했나 보군. 미안하오.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어린 집사가 로벨의 옆구리를 툭 쳤다. 로벨은 화들짝 놀라 응수했다.

“본인의 보잘것없는 공적을 띄우려고 무리수를 던진 듯하오.”

“무리수? 무리수라고? 우하하! 그렇소! 그렇소이다!”

누가 말똥만 찬 기사들이 아니랄까봐 어려운 단어가 나오자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로벨은 어리둥절해 하며 화제를 바꿨다.

“그리고 볼프 사트로 후작이 건재하니 아직 승리라고 할 수 없소.”

검은 숲의 기사가 낄낄거리며 손사래 쳤다.

“지금까지 3천 명이 전멸했는데, 아무리 북해의 주인이라도 싸울 힘이 있겠소?”

“지금까지 싸운 적은 검은 숲의 징집병과 잉그비아 왕국군, 용병, 해적, 그리고 고블린이었소.”

책을 장식품이나 사치품으로 생각하긴 해도 바보들은 아니었다. 로벨의 말을 듣고 간과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구왕파의 주력군은...”

“우리 신왕파의 주력군과 마찬가지로 본거지에 있을 것이오.”

‘늑대의 왕, 뱀파이어의 군주와 함께 말이다.’

로벨은 뒷말을 삼켰다. 경계심은 가져야 하지만 공포심은 안 되었다.

그때, 이방인이라 어울리지 못하던 자비에 후작이 앞으로 나왔다.

“진짜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군.”

“그, 그럴리가...”

“그렇다면 잘 됐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기회가 있으니까. 그렇지 않소, 제임스 공작?”

과연 왕성을 장악할 만큼 야심만만한 기사였다. 제임스 공작 이하 여러 기사들은 술기운을 타고 호기롭게 응했다.

“그렇소! 까짓 사트로 가문 따위야!”

“누구는 날 때부터 영웅인가!”

“기다릴 것도 없소! 우리가 공격할 차례요!”

웃고 떠드는 사이 술잔이 가득가득 채워졌다. 전장에서 마시는 싸구려 와인이지만 승리의 기쁨과 닥쳐올 흥분에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델 포니 산 최고급 와인이라도 오늘의 술만큼 맛있지는 않을 것이다.

“국왕 폐하에게 영광을! 사트로 가문에 저주를!”

“포클랜드와 검은 숲, 그리고 로드릭 가문의 번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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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눈꺼풀을 간질이는 햇살에 눈을 떴다. 머리 하나 내밀기 좁은 총안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로벨은 손을 들어 햇빛을 가리고 보람찬 하루를 시작하는 첫 대사를 뱉었다.

“으으... 머리야...”

“어? 일어나셨어요?”

어린 집사가 재빨리 다가왔다. 로벨은 익숙한 목소리에 안도하며 땅에 떨어진 기억을 주워담았다. 승전축하연회가 생각보다 길어졌다. 수완 좋은 호른 경이 자꾸 술통을 구해왔고, 호기 넘치는 기사들은 내가 이기나 술이 이기나 보자는 듯 자꾸 마셨다. 석양이 지고 보름달이 계곡을 비출 때까지 술자리가 계속되었다. 기사 중의 기사, 챔피언 중의 챔피언 로벨도 꼼짝없이 마셔야 했다.

“괜찮아요?”

“...목이 아파.”

로벨이 마른기침하자 어린 집사가 재빨리 물병을 가져왔다. 로벨은 확인도 안 하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우물에서 갓 길어온 듯 시원했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자신이 깨어날 때를 위해 30분마다 물을 길어왔음을 알지 못했다.

“얼마나 마신 거예요?”

“몰라. 9잔 까진 기억해.”

“어쩐지.”

어린 집사가 심각한 얼굴로 주억댔다. 로벨은 태생적인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에 덜컥! 걱정했다.

“나 무슨 실수 안 했지?”

“메인 홀의 기둥을 붙잡고 ‘너 이 자식, 내가 살려준 거야. 고맙지? 고마우면 한잔 해!’ 어쩌고 하면서 바닥에 술을 붓다가 도너반 자작에게 한 소리 듣고 풀이 죽어서 엉엉 운 것 빼고요?”

“...충분해.”

어떤 의미로는 더 안 좋았다.

로벨은 지근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이곳은 까마귀 성의 1층 창고였다. 영주인 도너반 자작의 침실과 제임스 공작이 선점한 응접실을 제외하면 가장 크고 가장 햇살이 좋은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호른 경이랑 기사들은 숙소에 뻗어있고, 펄프 대장이랑 용병들은 성 아랫마을에서 주민을 돕고 있어요. 공짜로 돕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약탈은 아니니까 그냥 뒀어요. 제임스 공작이랑 자비에 후작 사람들은... 알게 뭐람? 그쪽 집안은 그쪽이 알아서 하겠죠.”

로벨도 적극 동의했다. 하나만 빼고 말이다.

“키르케는?”

“글쎄요? 부상자를 돌본다고 남은 술을 받아갔다는데...”

로벨의 표정이 굳었다. 숙취 때문이 아니었다.

“이곳은 전장이야. 3개 지방의 기사와 병사가 모여있고, 구왕파 잔당도 숨어있어.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고... 아, 알았어요! 찾아볼게요! 치잇!”

어린 집사는 아랫입술을 삐죽이고 창고를 떠났다. 로벨은 짚더미에 기대앉아 가느다란 햇살을 쬐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총안 밖에서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의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술을 왜 당신이 마시냐고!’, ‘모, 몸에 좋은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환자를 위한 거예요!’, ‘크아앙! 뭔 개소리야!’

로벨은 두 눈을 감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전쟁의 피로와 간밤의 숙취가 조금은 씻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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