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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200화 (200/605)

200화. 산폭풍

200화. 산폭풍

검은 숲은 지독한 열기에 시달렸다. 여름의 습한 공기나 정오의 강렬한 햇볕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내뿜는 숨결과 병장기가 빚어내는 마찰열이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위치를 사수하라! 물러나지 마라!”

“조준! 발사!”

공포와 광기가 맞물려서 피를 뿌리고, 쇠와 쇠가 부딪쳐서 불꽃을 토했다. 살의로 충만한 눈길은 쇳물보다 뜨겁고, 분노를 주체 못 하는 손짓은 번개처럼 강렬했다.

까마귀 성 성문은 한여름 태양이 무색할 만큼 불타고 있었다.

제임스 공작은 바이저를 신경질적으로 올리고 수염을 적시는 땀을 닦아냈다. 작금의 상황이 누구 탓인지는 모르지만, 누군가를 탓해야만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로벨 경의 부하들은 어디 있나!”

“북쪽 계곡에서 넘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길! 제길! 제기랄! 자신만만하게 떠나더니만!”

아군을 탓하는 것은 효과가 없었다. 제임스 공작은 성벽을 막 기어오른 ‘적’을 노려보았다.

길고 뾰족한 송곳니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와 걸쭉한 침을 흘려보냈다. 구정물이 흐르는 머리카락과 고목껍질 같은 피부, 대칭성이 많이 결연된 이목구비 등은 인간과 다른, 별개의 종(種)임을 증명했다.

“이 빌어먹을 고블린 때문이야!”

제임스 공작은 메이스를 높이 들어 고블린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분노와 짜증이 담긴 5파운드 쇳덩이는 고블린의 머리를 으깨버렸다. 피와 살점이 성벽을 장식했다.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제임스 가문의 몇 안 남은 수행기사가 우는소리를 했다.

“마로드! 더 이상 버틸 수 없습니다!”

“버텨라! 버텨야 한다! 이곳이 뚫리면 검은 숲은 끝장이야!”

제임스 공작은 기사들을 독려하고 성 밖을 내다보았다. 성벽 아래에서 새까만 파도가 넘실거렸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물결이었다.

구왕파의 군사력은 최초의 첩보와 달랐다. 애초 보고된 잉그비아 왕국군 1,000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북해의 해적단 200명과 검은 숲의 고블린 800마리가 합류해서 총 2,000명에 가까운 대군이었다. 시체를 쌓아도 성벽을 넘을 수 있을 정도니 수성이 쉽지 않았다.

쾅-! 콰광-!

성벽 아래에서 굉음이 터졌다. 제임스 공작과 수행기사는 깜짝 놀라 성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장궁병이 화살을 날리고, 해적과 고블린이 사다리를 기어오르지만 개의치 않았다.

성문이 열렸다! 성문이 열렸다!

제임스 공작은 분노해서 괴성을 질렀다. 그러나 성 밖의 함성과 성 안의 비명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벙어리의 절규.

“아성으로! 아성으로 피하십시오!”

“공작님을 모셔라!”

성문의 소란이 가라앉자 제임스 가문 기사들의 고함이 사방으로 퍼졌다. 제임스 공작은 사다리를 팽개치고 성문으로 뛰어가는 고블린을 향해 메이스를 집어던지려 했지만,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팔다리를 잡아끄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고래고래 소리치며 성 안으로, 성 안으로 끝없이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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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성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해적과 괴물은 외성을 넘어 계곡 아래의 마을을 약탈했다. 영민한 까마귀 영주가 영지민을 피신시키지 않았으면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을 것이다. 까마귀 성의 적은 기사가 아니라 무법자이고 식인괴물이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계곡을 건너 다시 올라가야 하는 까마귀 성채는 외성만큼이나 견고했다. 수비군은 적어도 대포와 투석기가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다. 2천 명이 아니라 2만 명이라도 단시간에 함락은 어려웠다.

“문제는 식량입니다.”

까마귀 영주 도너반 자작이 한숨을 쉬었다. 날숨에서 피냄새가 묻어났다. 건강이 갈수록 안 좋았다. 제임스 공작은 저 몸을 이끌고 작전회의에 참가한 자작이 안타까웠다. 자기 영지가 짓밟히는데 병석에 누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얼마나 견딜 수 있겠소.”

“이곳 까마귀 성은 농사를 많이 짓는 곳이 아닙니다. 더욱이 봄 추수도 마치지 못했으니... 남은 식량으로는 사흘을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고작? 고작 사흘이오?”

그것도 대단한 것이었다. 제임스 공작의 병사 100여 명과 포클랜드의 병사 300여 명, 그리고 성 아래 주민까지 수용했으니, 성 안의 인구가 몇 배로 늘어났다. 겨울부터 지금까지 별다른 생산활동도 없이 농성해 왔으니, 결코 준비가 미흡하다 할 수 없었다. 사나흘 정도 여유가 있었으면 봄 추수를 무사히 마치고 가을까지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도너반 자작이 무능하다기 보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한 볼프 후작이 대단했다.

“그래도 버텨봅시다. 로벨 경이 반드시 구원해줄 것이오.”

제임스 공작이 기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반응이 미지근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기사가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그 작자를 믿을 수 있습니까?”

“응? 무슨 소리요?”

“로벨 후작은 본디 볼탄 반도의 토박이로 검은 숲에 미련이 없는 자입니다. 볼프 후작과 악연이 있어 우리를 돕는 것일 뿐입니다. 까마귀 성이 함락되고, 검은 숲이 구왕파 손아귀에 넘어가도 상관할 바가 없을 겁니다.”

제임스 공작은 메인 홀 태반을 차지하는 오동나무 테이블을 꽝! 내리쳤다.

“헛소리! 로벨 경은 명예로운 자요! 우리를 두고 도망가지 않을 거요! 그리고 바보도 아니지! 검은 숲이 구왕파 수중에 들어가며 다음은 볼탄 반도란 것을 잘 알고 있소!”

도너반 자작과 도너반 가문 기사들은 조상대대로 물려온 까마귀 성의 보물을 걱정해 움찔움찔했다. 그러나 제임스 가문 기사들은 무심하게 할 말만 했다.

“로벨 후작이 대단한 기사이긴 하나, 후작도 2천 명의 대군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후작이 가진 병력은 고향의 예비병까지 더해도 고작 300명 남짓입니다.”

제임스 공작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적에게 포위되면 정신적인 압박을 먼저 받는다. 지금처럼 쉽게 흥분하고 쉽게 겁에 질렸다. 도너반 자작이 오동나무 테이블을 쓸어 만지며 나직이 말했다.

“아직 사흘이 있습니다. 머리를 식히고 다시 대책을 논의하지요. 경들도 그만 쉬도록 하시오.”

딱히 할 말이 없는 기사들은 고개를 까닥이고 메인 홀을 떠났다. 제임스 공작은 테이블을 짚고 숙인 채 한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도너반 자작은 왕국 제일의 제후에서 몰락한 기사가 되어버린 제임스 공작의 처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반대였지?’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위대한 제후가 된 기사가 있었다. 도너반 자작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나의 마지막 주인이시여, 부디 우리를 구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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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란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볼프 후작군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고블린 부대를 앞세워 계곡을 올라왔다. 그리고 목숨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까마귀 성 수비병은 까마귀 성의 모든 방어시설을 속속히 알고 있었다. 투석구를 개방해서 계곡 아래로 돌덩이를 쏟아 붓고, 기름 항아리를 쏘아 우회로를 차단했다. 어찌어찌 성문 앞에 도착해도 총안에서 쏘아대는 쿼럴에 고슴도치가 되었다. 3일 동안 공격해서 300마리의 고블린이 전사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허나 사흘이 지나자 위기가 찾아왔다. 무기와 식량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화살과 기름은 물론이고, 돌까지 부족합니다.”

“무기보다 식량이 심각합니다. 하루만 지나면 탈영병이 속출할 겁니다.”

제임스 공작은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노려보았다. 속으로 울분을 토하고 있으리라. 도너반 자작이 쇠약해진 목소리로 대신 명령했다.

“성 안의 자재를 가져다 사용하시오. 바닥과 내벽을 허물면 포탄으로 쓸 수 있을 것이오. 영지민에게 배식을 중단하고 쥐와 개를 잡도록 하시오. 정 안 되면... 늙은 말부터 도축하시오.”

“그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로벨 후작은? 로벨 로드릭 후작은 언제 옵니까?”

“왕국 제일의 기사라고 거들먹거리더니, 정작 위기시에는...”

“입 조심하시오. 본인의 주군이오.”

도너반 자작이 철가면 틈새로 경고했다. 제임스 가문 기사도 너무 막 나갔다 싶었는지 찔끔했다. 그때, 침묵하던 제임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안 되오.”

“마로드?”

“더 이상 피하지 않겠소. 더 이상 기적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오.”

메인 홀에 모인 50명의 기사들이 침묵했다. 포클랜드의 시골 기사들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임스 공작은 그래도 끝까지 곁에 남아준 기사들에게 고마움 표시하고 단호히 말했다.

“적의 본진을 치겠소.”

“마, 말도 안 되오! 자살행위요!”

“적의 숫자는 우리군의 5배 입니다!”

가문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제임스 공작은 단호했다.

“적군은 계곡 아래에 주둔 중이오. 그리고 우리가 치고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할 것이오. 지금 기습하면 해적과 괴물은 저항하지 못하고 흩어질 것이오.”

“볼프 사트로 후작군과 잉그비아 왕국군은 다릅니다! 그들은 정예군입니다. 더욱이 지난 사흘 동안 전투를 하지 않아 체력이 회복했을 터인데...”

“그러니 방심하고 있을 것이오. 아니면 대체 뭐요? 이대로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것은 죄다 먹어치운 후에 아사할 생각이오?”

조금 전까지 로벨을 욕하던 기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벨 후작이 오면...”

잠시 뒤, 까마귀 성의 여론은 로벨 로드릭 후작이 지원군을 이끌고 올 때까지 버티자는 쪽과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하니 여력이 있을 때 역공하자는 쪽으로 갈라졌다. 도너반 자작은 철가면을 붙잡고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이곳에 로벨 경이, 나의 주인이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말하면, 양쪽의 의견이 모두 옳았다.

부우우우-웅-!

빠아암-! 빠아아암-!

성 밖에서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임스 공작 이하 검은 숲 기사들은 말싸움을 멈추고 성문 밖으로 몸을 돌렸다.

“또 오는군.”

“이 지긋지긋한 괴물놈들!”

제임스 공작은 어금니를 빡빡 갈며 성채 밖으로 나갔다. 지칠 때로 지친 병사들이 병장기를 챙겨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가장 멀고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웅성거림이 퍼져갔다.

“볼프 후작이... 볼프 후작이 아닙니다!”

“뭐라고?”

계곡 아래의 적이 방심하고 있으니 기습하면 승산이 있다는 제임스 공작의 주장도, 로벨 로드릭이 지원군을 이끌고 오면 이길 수 있다는 수행기사의 주장도 사실이었다.

“로드릭 깃발입니다! 로벨 로드릭 후작의 군대입니다!”

왜냐하면, 포클랜드 전역을 순회한 무적무패의 챔피언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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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로벨이 데리고 온 총 800명의 대군이 계곡 반대편을 점령하고 2천 명의 침략군을 굽어보았다. 포클랜드의 쟁쟁한 깃발이 계곡 아래에서 올라오는 상승기류에 펄럭였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깃발은 볼탄 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로드릭 가문 깃발이었다.

부우우우우웅-!

과묵한 몬트가 뿔나팔을 길게 불었다. 계곡과 성벽을 따라 길게 메아리쳤다. 옛 신의 천사가 연주하는 듯 장엄하고, 사신이 낫을 드리운 듯 스산했다.

“로벨 경... 로벨 경이 왔다...”

제임스 공작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작에게는 다행히도 울먹이는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공작이 우는 것보다 더 대단한 장관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 차례 나팔연주를 마친 로벨 후작군 및 포클랜드 제후군이 진군했다. 가파른 계곡길을 따라 한 걸음... 두걸음... 경사가 급한 탓에 속도가 금방 붙었다. 삽시간에 전력질주가 되었다. 빛나는 금속 갑옷과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산폭풍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새하얀 투구를 쓰고 새하얀 전투마를 모는 청년 기사였다. 소음 탓인지, 흙먼지 탓인지 모르지만, 창공에서 나팔 부는 옛 신의 천사들과 함께 달려오는 것 같았다.

“오오... 옛 신이시어... 나의 주인이시어...”

산폭풍은 산사태가 되어 교만한 2천 명의 침략자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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