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합류
199화. 합류
인구 4만 명의 대도시는 무게감이 있었다. 북부를 뒤흔든 제2차 왕위계승전쟁에도 웃음과 활기를 잃지 않았다.
부두에서는 햇살에 보기 좋게 그을린 인부가 구슬땀을 흘리고, 시장에서는 사투리 가득한 상인이 목청 높여 흥정을 벌였다. 정수리가 허전한 옛 신의 사제와 턱밑이 까칠한 어린 학생이 각자의 속도로 거리를 거닐고, 고집불통 노새에 계란과 우유를 잔뜩 실은 농장 아낙이 울상이 되어 회초리를 휘둘렀다. 평범해서 평화로운 수도 포클랜드의 일상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평화를 만끽하지는 못했다. 내일보다 먼 곳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곧 닥쳐올 전란에 근심했다.
‘포클랜드 기사들을 믿지 못하면 더더욱 지원군을 보내야 해.’
에릭 공작은 기사들을 믿지 못해 군사를 보내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로벨의 생각은 달랐다. 누가 언제 돌아설지 알 수 없다면, 차라리 한곳에 모아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 상태로 승기를 잡으면 감히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 모으지?’
로벨은 모닝스타를 끌고 시장 도로를 걸었다. 모닝스타는 북적북적한 인파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녀 키르케는 홍당무로 모닝스타를 꼬시다가 잘 안 되자 삐져서 로벨의 반대쪽에 붙었다.
“기사님, 기사님, 무슨 생각 하세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로벨이 미지근하게 반응하자 마녀의 볼살이 부풀었다. 나름대로 귀여움을 살린 항의였다.
“말 안 해도 대충 알 것 같아요.”
“응?”
“기사님을 모을 거죠?”
로벨이 걸음을 멈췄다. 잡담을 하며 따라오던 울프 용병단과 전투마도 모두 멈췄다. 거구의 용병과 우람한 말이 갑자기 정지하자 시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야! 뭐야! 왜 막아!” 발가락과 흉내쟁이가 얼굴의 주름숫자를 최대치로 늘리고 양해를 구했다. “야? 우리 기사 나리한테 ‘야’라고 했냐?”, “창자를 쭈욱- 뽑아 목을 매달아줄까?” 정중한 말투는 양해를 구하는데 효과적이다. 교양이 넘치는 수도 시민들은 바쁜 일상에서도 경제를 토론하고 날씨를 걱정했다. 로벨도 자유로운 대화 분위기에 동참했다.
“어떻게 알았어?”
“기사님 생각이야 뻔하죠. 에릭 공작님을 배신할 리도 없고, 질 것 같다고 도망칠 리도 없고, 어떻게든 지원군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아무도 보내주지 않으니까 직접 모으겠죠.”
“응. 그럴까 생각 중이야. 하지만...”
“포클랜드에 친구가 없어서 걱정이죠? 일단 한 명을 포섭해야 줄줄이 엮을 수 있을 테니까요.”
“치, 친구 있어! 진짜야!”
“그치만 힘이 없죠?”
“...아마도.”
로벨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마녀 키르케가 뒷짐 지고 깡총 뛰었다. 단발머리가 기분 좋게 찰랑거렸다.
“그럼 친분을 버리세요.”
“무슨 뜻이야?”
“지난 일을 생각하지 말고 가장 힘 있는 기사님을 포섭해요. 포클랜드에서 가장 강한 기사님이 누구예요? 아, 물론 기사님 빼고요!”
로벨은 손가락을 꼽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 안 된다. 와트 마르셀 백작? 에릭 공작이 움직이지 않으면 역시 안 된다. 그 외에는 돌체 백작, 데이브 백작, 발루아 남작...’
“...자비에 후작!”
“예?”
시민들과 의기투합하던 울프 용병단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자비에 후작이 아직 건재하잖아?”
“그렇겠죠? 기사 나리의 목을 따기 위해 악착같이 숨 쉬고 있겠죠?”
“그렇게 말하지 마. 어쩌면 내 목보다 에릭 공작님의 목을 더 탐낼지도 모르잖아.”
“그게 그거잖습니까요!”
로벨은 방긋 웃었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뭐라고요?”
“소설책에 자주 나오잖아.”
로벨은 모닝스타를 끌어당겨 안장에 훌쩍 올랐다.
“이 나으리가 대체 뭔 소리야!”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진짜 가려구요?”
로벨은 어디서 지원군을 모아야 할지 알았다. 잘하면 에릭 공작의 시름을 볼프 후작에게 선물할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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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로벨의 강경한 주장을 못 이겨 얼음성으로 출발했다. 그 길이 쉽지는 않았다. 어디서 소문이 새어나갔는지 에릭 공작이 찾아와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국왕 폐하까지 사람을 보내 우려를 표시했다. 로벨은 흉갑을 쾅! 소리 나게 두드리고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의 두 주군을 안심시켰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반드시 군대를 모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사흘 치 식량을 챙겨서 북쪽으로 달려갔다.
과묵한 몬트가 ‘조랑말’을 재촉해 모닝스타 꽁무니에 따라붙으며 질문했다.
“영주님, 자비에 후작을 만나 어쩌실 겁니까?”
로벨은 모닝스타가 알아서 가도록 놔두고 몸을 뒤로 기울였다.
“설득할 거야.”
“...설득이 되겠습니까?”
로벨은 느긋하게 팔짱을 끼었다. 초보자에게 권장하지 않는 승마자세였다.
“자비에 후작은 신왕과 구왕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장 대표적인 제후야.”
어린 왕자를 새 국왕으로 내세운 것이 일견 충성심으로 보일 수 있으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어린 왕자는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었다. 애당초 주인의 죽음을 확인하지도, 허락을 받지도 않고, 새 주인에게 충성한 것은 명백히 서약 위반이다. 새 주인이 설령 친아들이라 해도 말이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지만...’
권력 앞에서는 부모형제도 없다는 옛말은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이었다.
“기사 나리! 얼음성이 보입니다!”
로벨은 여름에 흠뻑 빠진 초원 저 먼 곳에 홀로 솟은 얼음성을 보았다. 성탑 위에 까만 깃발이 열풍에 이끌려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얼음성은 포클랜드 평야 북쪽에 자리했다. 차가워 보이는 이름 때문에 간혹 북해와 가깝지 않을까 오해하는데, 지도를 보면 늑대성보다 훨씬 남쪽이었다. 한겨울이 아니면 얼음 비슷한 것을 볼 수 없었다.
“강철성하고 비슷하네요.”
“어딜 봐서?”
“얼음으로 안 만들었어요.”
로벨은 ‘하하핫!’ 웃었다.
“샘 포클 시대 이전에, 그러니까 위대한 왕이 검은 숲과 볼탄 반도를 정복하기 이전에, 고대 겔몬 족의 최북단이 이곳 얼음성이었어. 이 초원을 벗어나면 괴물과 야만족이 득실거리는 미지의 숲과 산이었지. 그들 기준에서 이 성은 가장 먼저 얼음이 어는 곳이라 얼음성이라 불렀어.”
“옛날 사람은 세계가 참 작았군요.”
“지금도 작을지 몰라. 혹시 알아? 저 태양을 쫓아가면 새로운 세계가 나올지?”
로벨과 마녀 키르케의 대화를 엿듣던 발가락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쪽 끝에는 바다뿐입니다요.”
“그 바다의 끝에는?”
“어... 음... 낭떠러지가 있지 않을까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세상의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제가 밝혀질 거라 믿었다. 고대 겔몬 족은 이 성이 세상의 끝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포클랜드 중부의 작은 성일뿐인 것처럼 말이다.
“누구냐! 멈춰라!”
얼음성이 가까워지자 무장한 병사가 경고했다. 여장 위로 쿼럴을 얹은 크로스보우가 속속 올라왔다. 로벨 일행은 적절한 거리에서 멈췄다. 로벨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춰 쿼럴 한두 방에 끄떡없지만,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은 달랐다.
로벨을 대신해 발가락 슈미츠가 로드릭 깃발을 펼치고 소리쳤다.
“이분은 포클랜드의 후작이자 볼탄 반도의 백작이신 로벨 로드릭 경이다! 자비에 후작을 만나고자 찾아왔다!”
“로벨 로드릭이라고!”
성벽 위가 부산스러워졌다. 지난 1차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한 베테랑 병사들이라 로벨의 무용을 똑똑히 기억했다.
‘거, 겁먹지 마! 고작 다섯이잖아!’
‘우리 성은 높고 튼튼하다!’
‘그, 그럼 뭐해? 그랜드 챔피언은 주먹으로 성문을 부순다고!’
로벨 일행은 웅성거리는 자비에 후작군을 한심하게 올려다보았다.
‘저럴 시간에 보고 좀 하지.’
초병 중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는 듯 아성으로 뛰어갔다.
성벽과 해자를 사이에 두고 기이한 대치가 이어졌다. 20배의 병력차이가 있으나 놀랍게도 성 안 병사들이 겁을 먹었다. 흉내쟁이가 낄낄거렸다.
“기사 나리가 고함지르면 항복할 지도 모르겠는뎁쇼?”
로벨은 반박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흰 머리에 검은 수염을 한 중년 기사가 올라왔다. 포클랜드의 대영주에서 몰락한 ‘반역자’ 자비에 후작이었다.
“로벨 로드릭 경! 쉬머 마을의 일을 복수하고자 왔는가?”
로벨을 기습한 프레디 해밀턴 경의 일을 걱정한 모양이다. 로벨은 그 기사가 이곳에 있는지 주의 깊게 살피며 말했다.
“아니오! 도움을 요청하고자 왔소!”
“기, 기사 나리?”
울프 용병단이 당황해서 속닥였다. 하지만 진짜 당황한 것은 자비에 후작과 부하들이었다.
“무적무패의 챔피언이 도움을?”
“그리고 경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소.”
자비에 후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웃기는 헛소리군! 본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장본인이 할 말인가?”
로벨은 말재주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알기 쉽게 돌려 말하지도, 재치 있게 비유하지도 못했다.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잉그비아 왕국이 쳐들어왔소. 그들과 싸울 기사가 필요하오.”
자비에 후작은 여장에 몸을 기대고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본인은 모든 것을 잃었소. 이 초라한 성과 100명도 안 되는 병사가 전부요.”
“경뿐만이 아니오. 경을 따르는 기사와 그 기사의 식솔이 모두 필요하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왜 싸우지 않소?”
“경이 이곳에 있으니 싸우지 못하오.”
“포비아 왕국의 자칭 주인이 싸우지 않는데, 왕좌를 내준 본인이 왜 싸워야 하오?”
“왕이 아니니까. 왕에게 버려졌으니까.”
로벨의 말에 반응한 것은 자비에 후작의 몇 안 되는 병사들이었다. 왕에게 버려졌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로벨은 처음과 다른 이유로 겁에 질린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그 성에서 백날을 지내도 바뀌는 것은 없소. 신왕파가 승리하든 구왕파가 승리하든 패배자이고 반역자일 뿐이오. 살고자 하면 선택해야 할 것이오. 새로이 충성을 맹세해야 하오.”
“...누구에게?”
로벨은 여러 의미로 끙끙 앓고 있을 로앙 쉬머 남작의 말을 빌렸다.
“경의 가치를 알아줄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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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모두 그렇듯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쉬웠다.
자비에 후작이 기사 7명과 병사 50명을 이끌고 합류하자 자비에 후작의 친인척과 봉신도 차례로 성문을 열었다. 그래서 과묵한 몬트 이하 울프 용병단은 죽을 맛이었다.
‘저것들이 기사 나리를 공격하면 어쩌지?’
자비에 후작에게는 로벨의 목을-수행원의 목은 덤으로- 잘라 볼프 후작에게 바친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지난 악연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매력적이었다. 로벨이 아무리 강하고 모닝스타가 아무리 빨라도 두 자릿수의 기사와 세 자릿수의 병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자비에 후작이란 야심 많은 영웅을 얕잡아 본 생각이었다.
‘지금 로벨 로드릭을 죽이면 지난 원한 때문에 죽인 것이 된다. 신왕과 구왕 어느 쪽에도 공을 인정받지 못한다.’
바꿔 말해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었다. 과묵한 몬트는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자비에 후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로벨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 뒤통수를 쪼개줄 작정이었다.
로벨은 암중에 오가는 칼날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게 마녀와 잡담했다.
“내가 말했잖아. 내 말은 들을 거라고. 에헴!”
로벨이 콧대를 세우자 마녀가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모자라요. 겨우 500명이잖아요?”
로벨은 마녀를 따라서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마녀와 달리 크고 두꺼워서 잘되지 않았다.
“아직 합류하지 않은 제후가 있어.”
“엥? 누구요?”
로벨은 서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를 상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