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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98화 (198/605)

198화. 도망

198화. 도망

촌장의 집은 전형적인 포클랜드의 가정집이었다. 통나무로 뼈대를 잡고 흙으로 벽을 쌓은 후 짚을 위아래로 넉넉히 깔아 오리, 닭, 돼지 등과 함께 지냈다.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신 탓에 가축을 내보내고 새 짚을 깔아 깨끗하게 했다.

로벨은 흙냄새가 가시지 않은 짚더미에 기대 앉아 선잠을 잤다. 갑옷을 벗지 않아 눕는 것보다 기대는 것이 편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외지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무방비하게 잠드는 것은 용기도, 배짱도 아닌 무식함이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우려와 달리 멍청하지 않았다.

아귀가 맞지 않아 완전히 닫히지 않는 나무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그림자 하나가 스며들어왔다. 끼리리릭- 로벨의 손가락이 소음에 반응해 꿈틀거렸다. 의식은 그다음에 돌아왔다.

신발 가죽이 스치는 소리. 스르륵- 이어서 쇠와 쇠가 맞물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찰칵! 그 즉시 로벨의 손이 움직였다.

챙-! 챙챙-! 깡-!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불꽃을 피어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충돌 후 승부가 갈렸다. 아론다이트의 새하얀 칼날은 습격자의 어깨를, 습격자의 새까만 칼날은 로벨의 옆구리를 때렸다. 그러나 피를 본 것은 한쪽뿐이었다.

“크윽! 갑옷을!”

로벨은 플레이트 너머로 전해지는 둔탁한 충격에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단련된 일격이다. 어설프게 훈련한 농민이나 마구잡이로 싸우는 용병이 아니었다.

‘...기사였어?’

공격은 엇비슷하지만 결과가 달랐다. 로벨은 머리를 제외하면 전신이 쇳덩이였다. 전투마를 몰아 해비 랜스를 찔러 넣거나 해머로 마구 두드리지 않는 이상 치명상을 줄 수 없었다.

로벨은 피 흘리는 습격자를 무쇠발로 차고 집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정원이라 부르기가 민망한 좁은 앞마당에 환한 불빛이 가득했다. 횃불과 횃불을 반사하는 검광이었다.

‘넷, 아니, 다섯이야?’

이 작은 영지에 무슨 기사가 다섯이나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 세 명은 쉬머 가문의 기사가 아니었다.

“정말 로벨 로드릭이군.”

“저 거만한 얼굴을 잊을 수 없지.”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풀러(Fuller)를 따라 흐르는 핏물을 털어내고 진지하게 물었다.

“...누구야?”

로벨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는데,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진심으로 이름을 기억 못 하면 더 화가 날 듯했다.

“자비에 후작님을 모시는 프레디 해밀턴이다!”

“...아?”

잠이 덜 깬 것이 분명하다. 기억력이 나쁘다고 인정하기보다 그 편이 좋았다.

‘그런데 진짜 기억이 안 나는데?’

로벨은 눈알을 굴리며 간신히 임기응변을 짜냈다.

“무, 물론 기억하오. 샘 포클 왕성에서 보았잖소.”

“아이언베어 요새에서 보았다! 이 자식! 진짜 기억 못 하잖아!”

로벨의 필사적인 임기응변은 성질만 돋웠다. 본의는 아니지만, 소란을 피워서 시간을 끈 것은 효과적이었다. 로벨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상황을 눈치채고 달려왔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이놈들이! 감히 우리 기사 나리를!”

과묵한 몬트, 발가락 슈미츠, 흉내장이 퍼시발은 울프 용병단 사이에서도 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3인방이었다. 워 해머와 숏 스피어를 크게 휘두르며 쉬머 남작과 해밀턴 경의 뒤를 공격했다. 그러나 철이 들기 전에 철을 휘둘러온 것이 기사였다. 나이를 먹고 권력에 나태해졌어도 왕년의 솜씨가 어디가지 않았다. 말머리를 유연하게 돌려 롱소드를 휘둘렀다. 까강-! 깡! 퍼억-! 기사와 용병, 전투마와 전투마가 뒤섞여 난전이 벌어졌다. 병장기가 부딪치고, 갑옷이 부서지고, 성난 말이 서로를 깨물었다.

울프 용병단은 호전적인 흉내쟁이를 중심으로 기세를 올렸지만, 숫자와 무장차이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발가락 슈미츠는 빗발치는 칼질을 암 가드로 쳐내며 앓는 소리했다.

“으아악! 기사 나리! 보고만 계실 겁니까요?”

“누가 누구를 돕는 거지...”

로벨은 주위에 말들을 둘러보았다. ‘조랑말’을 비롯한 늑대성의 전투마가 모두 모였는데 한 마리가 비었다. 급해서 데려오지 않은 건지, 말을 안 들어서 못 데려왔는지...

‘그래도 고삐 정도는 풀어놨겠지?’

로벨은 건틀렛을 벗고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생전에 부친과 늙은 집사가 경망스럽다고 잔소리한 행위,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휘이익-! 그리고 이어지는 괴성. 콰광-!

영리한 하프 유니콘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마구간 문짝을 뒷발로 차서 부수고,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요란스럽게 달려왔다. 지푸라기와 흙먼지가 사방팔방으로 날아갔다. 정신을 못 차린 쉬머 남작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고, 곰인가?”

기세만 보면 새끼를 지키는 곰과 비슷하긴 했다. 전력으로 뛰어와 당황한 해밀턴 경의 전투마를 들이박았다. 쿵! 충차가 따로 없었다. 전투마 중에서 한 덩치하는 블랑크 산 전투마가 자지러지게 울며 쓰러졌다. 해밀턴 경 또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로벨은 애마의 활약에 주먹을 불끈 쥐어다.

“잘 키운 망아지가 용병보다 낫다!”

“뭐라구요?”

잘 못 키운(?) 용병들이 서운해 했지만 신이 난 고용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모닝스타의 고삐를 잡아 훌쩍 뛰어올랐다. 주인의 손길을 느낀 모닝스타는 더욱 흥분해서 앞발을 높이 들고 포효했다. 히히힝-! 달빛 아래 기립해서 울부짖는 하프 유니콘과 그 위에서 빛나는 칼을 추켜세운 젊은 기사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기사와 용병과 창문 틈으로 훔쳐보는 농부가 모두 일순간 숨을 죽였다.

‘가, 갑자기 일어나지 마! 위험하잖아?’

로벨은 모닝스타를 진정시키느라 여념 없었다. 눈에 띄는 무공은 없으나 40여 년을 칼 위에서 살아온 쉬머 남작은 지금이 그랜드 챔피언을 제압할 기회임을 직감했다. 플레이트 아머에 큰 타격을 줄 수 없는 롱소드를 팽개치고 메이스를 빼 들었다.

“로벨 로드리익!”

로벨은 모닝스타의 투레질로 한층 높아진 위치에서 쉬머 남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랜드 챔피언의 타이틀은 거저 딴 것이 아니었다. 아론다이트를 랜스처럼 비스듬히 내밀었다. 쉬머 남작은 칼날을 걷어내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메이스를 휘둘렀다. 로벨은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스의 쇠뭉치가 칼날에 닿기 전, 교묘하게 비틀어서 흘려보내고 쉬머 남작의 겨드랑이를 찔렀다.

“크윽!”

로벨의 고급 필드 아머와 달라 겨드랑이까지 보호하지 못했다. 살점이 갈라지고 핏물이 와락 쏟아졌다. 쉬머 경은 절묘한 카운터에 크게 놀라 말 위에서 떨어졌다.

“쉬머 경!”

“주군!”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아래로 뻗어 늙은 영주를 굽어보았다. 안장 위에서 칼이 닿을 리 없지만 로벨의 기백과 아론다이트의 예기에 쉬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엉금엉금 기어서 물러났다. 로벨은 칼끝을 겨냥한 채 말했다.

“본인은 쉬머 가문과 척진 일이 없거늘, 어찌해서 본인을 죽이려 한 것이오. 더욱이 남작의 아들이 우리군과 함께 있는데?”

쉬머 남작은 상처를 틀어막고 부르르- 떨었다.

“지금은 난세요. 국왕이 둘이고 영토가 양분되었지. 우리 같은 작은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사하고 치졸하다 해도 편을 고를 수밖에 없소.”

“이길 수 있는 편?”

“우리의 가치를 알아주는 편이오.”

로벨은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박하지도 않았다.

‘나 또한 가난한 기사 가문의 딸로 기회를 잡기 위해 거짓을 꾸몄어. 그런 내가 명예를 논할 수 있을까.’

로벨이 기사의 명예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지 모른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겨냥한 채 모닝스타를 이동시켰다. 해밀턴 경을 비롯한 기사들은 주춤거리며 반대방향으로 이동했다. 기습은 실패했고, 숫자와 무장의 우세도 사라졌다. 정면대결로 가면 그랜드 챔피언을 이길 수 없었다.

로벨은 기사들을 경계하며 울프 용병단과 합류했다.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어느덧 다가와 빤히 쳐다보았다. 로벨은 왼손을 내밀어 마녀의 손을 잡았다. 마녀는 긴박한 와중에도 ‘히히힛!’ 웃었다.

“드디어 기사님이랑 같이 타네요?”

“응.”

로벨은 과묵한 몬트에게 눈짓했다. 승산이 적은 것은 로벨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한 명을 부상 입히고 한 명을 낙마시켰지만, 여전히 기사가 셋이었다. 로벨이 아무리 잘 싸우고 울프 용병단이 아무리 용맹해도 중무장 기사들을 상대로 피해 없이 이기기가 힘들었다.

“쫓아오지 마시오.”

“도, 도망칠 생각인가!”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시오.”

“기회?”

“우리 중 한 명이라도 이 마을을 벗어나면 볼탄 반도의 대군을 이끌고 돌아올 것이오. 감당할 수 있겠소?”

“...크윽!”

“기회를 주겠소. 도망치시오.”

로벨은 모닝스타의 말머리를 돌렸다. 과묵한 몬트 등은 기사들을 경계하며 로벨을 따라 달렸다. 쉬머 마을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마녀 키르케가 소리 높여 웃었다.

“도망가면서 도망치라니요? 히히힛! 재밌어요!”

“쉿! 쉿! 눈치채고 쫓아 올라.”

로벨은 모닝스타를 재촉하며 미소 지었다. 쉬머 남작군의 추격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을 몇 번이나 더 겪어야 할 지 걱정되었다.

‘에릭 공작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안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못 보내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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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짐작이 맞아 떨어졌다.

“그렇소. 보낼 수 없었소.”

로벨 일행은 새벽부터 쉬지 않고 달려서 해가 지기 전에 포클랜드 시티에 도착했다. 사람과 말 모두 기진맥진해졌으나 운이 좋게 의식을 잃기 전에 샘 포클의 왕성을 찾았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연전연승 행진을 이어가는 무적의 기사를 안쓰럽게 보았다. 머리가 반쯤 풀어지고 갑옷도 지저분했다. 검은 숲에서 얼마나 급하게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포클랜드 지방은 대단히 불안하오.”

로벨은 처량하게 주군을 올려다보았다. 에릭 공작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없소.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알 수 없소. 아니지. 알아도 소용이 없소.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되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충성서약이오.”

로벨은 기사의 자부심이자 제후의 족쇄에 움찔했다.

“우리의 왕은 포클랜드 기사들의 충성서약을 받지 못했소. 그런데 옛 왕이 돌아왔소.”

“옛 왕에게 충성한 기사들이...”

“누구에게 충성했느냐만 따지면 오히려 쉽겠지. 허나 뱃가죽에 기름이 낀 기사들이라 그리 단순하지 않소. 누구 편에 붙는 것이 더 이득이 될지 주판알을 굴리고 있소.”

로벨은 로앙 쉬머 남작을 떠올리고 어두워졌다. 로벨이 승기를 잡자 신왕파에 붙더니, 로벨이 소수의 호위병과 함께 영지에 찾아오자 기회라 생각하고 돌변했다. 에릭 공작은 로벨이 이해했음을 깨닫고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수도의 병력을 빼내는 순간 국왕 폐하와 우리가 위험해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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