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97화 (197/605)

197화. 빈손

197화. 빈손

포비아 왕국은 예로부터 초원의 나라라 불리었다. 사실 왕국의 북쪽은 대부분 숲이고, 동쪽은 산과 구릉지대였지만, 기사 계급이 강성하고 오랜 세월 북방의 야만족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싸워온 탓에 포비아 왕국 = 기사 = 말 = 초원의 이미지가 뿌리 깊게 자리했다. 그리고 포클랜드 지역만 보면 초원의 나라가 맞기도 했다.

“히야! 히랴앗!”

로벨 로드릭, 과묵한 몬트, 발가락 슈미츠, 흉내쟁이 퍼시발, 그리고 마녀 키르케는 캔터 속도로 포클랜드의 초원을 내달렸다. 여름에 흠뻑 젖은 초원이 말머리 좌우로 부지런히 스쳐 지나갔다.

초원에는 푸르름이 넘실대고, 잘 익은 보리들은 바람을 타고 황금빛으로 물결쳤다. 양치기와 양치기의 벗이 순박한 얼굴로 장대를 휘젓자 털북숭이들이 구슬프게 울며 언덕을 올라갔다. 음메에에-

계절은 어느덧 여름이지만, 지나간 시절을 잊지 못한 낡은 바람이 그리운 손짓을 보내왔다. 로벨은 갑자기 몰아치는 서늘한 바람에 목을 조금 웅크렸다가 먼 곳을 보았다.

지평선 한 자락에 우뚝 솟은 영주의 성이 보이고, 그 아래 제분소의 빵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하얀 연기는 푸른 하늘에 닿아 뭉게구름이 되었다.

“푸르릉- 푸푸릉-”

모닝스타가 머리를 휘저었다. 로벨은 고삐를 살짝 당겨 속도를 줄였다. 모닝스타를 힘겹게 따라가던 ‘조랑말’이 간신히 보조를 맞췄다.

“영주님!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로벨은 고삐를 좀 더 잡아당겼다. 영리한 말은 주인의 마음을 읽은 듯 트롯으로 속도를 줄였다. 다그닥- 다그닥- 경쾌한 4박자 발굽소리가 달아오른 심장을 진정시켰다.

“여기가 어디쯤이야?”

“포스트 포레스트와 미들 랜드의 중간지역입니다.”

로벨은 포클랜드의 지도를 그려보았다. 어린 집사만큼 구체적이진 않아도 대략적인 윤곽 정도는 그렸다.

“포클랜드 시티까지 하루 남았네?”

“지금 속도로 가면 그렇습니다만...”

로벨은 거세게 콧김을 뿜어대는 모닝스타를 내려다보았다. 갈기 아래가 온통 땀범벅이었다. 하프 유니콘이 이 지경이니 평범한 전투마 ‘조랑말’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은 더 이상 달리기 힘들었다.

‘천천히 걸으면 10마일은 더 갈 수 있겠는데...’

로벨은 포클랜드 시티까지 거리를 가늠한 후 포기했다. 어차피 내일도 종일 가야 했다.

“쉴 곳을 찾아.”

“저 마을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과묵한 몬트가 빵 굽는 마을을 가리켰다. 저 정도 연기면 100개 이상 빵을 굽고 있을 것이다. 빵 하나로 5~6명이 먹으니, 마을 규모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마구간이 있겠지? 좋아.”

로벨은 모닝스타의 호흡을 확인한 후 다시 속도를 높였다. ‘조랑말’ 이하 평범한 전투마들은 말을 못해 원통하다는 듯 울부짖고 죽기 살기로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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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수확이 한창인 춘경지와 싹이 파랗게 자란 추경지를 지나자 옹기종기 모인 100여 가구의 초라한 흙집이 나왔다. 거위 떼가 홰를 치며 소똥 위를 지나가고, 벼슬이 나지 않은 젊은 수탉이 호기심 많은 병아리를 쪼아대고, 꼬리가 잘린 암퇘지가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새끼 돼지에게 젖을 물렸다. 어수선하고, 지저분하고, 꾸릿꾸릿한 냄새가 가득한 흔한 시골 마을이었다.

“옛날의 로드릭 마을 같군요.”

마녀 키르케와 발가락 슈미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을 알지 못하는 흉내쟁이만 의아해했다. 지금의 로드릭 마을은 고층건물이 많고, 도로도 잘 닦여서 어느 도시 부럽지 않았다.

로벨 일행은 마을 안을 누볐다. 크고 흉악한 무기를 가진 기사와 용병이 등장하자 주민들이 겁을 먹고 자리를 피했다. 사내들은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슬그머니 챙겼고 아낙들은 노인과 아이를 숨겼다.

자유도시가 아니면 외지인을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다. 과묵한 몬트는 안장에 걸린 워 해머를 느슨하게 풀었고, 발가락 슈미츠는 험악한 얼굴로 사람들을 위협했다. 주민도 중무장한 살인 전문가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마을 중앙에 이르자 짤막한 지팡이를 짚은 촌장이 나왔다.

“이곳은 쉬머 남작의 마을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쉬머 남작?”

로벨은 이름을 되새겼다. 포클랜드의 가문을 잘 알지 못하지만, 쉬머 가문은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흉내쟁이를 조종해서 옆으로 다가왔다.

“까마귀 성! 까마귀 성! 쉬머 기사님이 왔었어요.”

“아, 그래?”

로벨은 기억력을 열심히 되짚었다. 로벨이 까마귀 성을 떠나기 전 쉬머 가문의 장남 로스 쉬머 경이 병사 10명을 끌고 찾아왔다. 그런 기사가 서른이 넘다 보니 바로 기억하지 못했다.

“잘 됐습니다요. 신왕파 귀족이니 기사 나리를 박대하지는 않겠지요.”

“성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벨은 곰곰이 생각했다. 기사가 장원에 방문하면 영주에게 인사하는 것이 관례지만...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건데, 영주에게 인사하고, 대접받고, 가문의 역사를 들어주다 보면 여러모로 불편해졌다.

“그냥 마을에서 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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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의 나라’ 포클랜드 지방답게 시골치고 근사한 마구간이 있었다. 게으른 농마와 어리숙한 당나귀의 보금자리였다. 그런 곳에 덩치가 크고 투지가 넘치는 전투마가 네 마리나 들어오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푸르르르르릉...!”

모닝스타가 두 눈을 내리깔고 수컷들을 위협했다. 살인과 폭력에 익숙한 전투마조차 기를 못 피는데, 쟁기나 끌던 농마가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프 유니콘 모닝스타는 주인 앞에서 순한 양이지만, 주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성질 더러운 깡패가 되었다. 모닝스타를 위시한 윈필드 출신 전투마들은 등장과 동시에 쉬머 마을 마구간을 장악했다. 그것은 비단 마구간만의 일이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가 ‘에헴! 에헴!’ 거리며 로벨의 이력을 소개하자 지레 겁먹은 농부들이 농기구를 팽개치고 납작 엎드렸다.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 기사, 늑대성의 주인 등등의 호칭은 이해 못 해도, ‘후작’과 ‘백작’이 지체 높다는 것은 알았다.

‘후작이면 후작이지, 백작은 또 뭐야?’

‘쉿쉿! 원래 고귀한 나으리는 이름이 여러 개야!’

‘아무튼 길면 대단한 걸세! 더 조아리게!’

쉬머 마을 주민은 갓 구운 빵과 살이 통통하게 오른 암탉과 겨우내 말린 과일 한 바구니를 진상했다. 춘궁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귀한 살림을 꺼내서 고귀한 기사 나리를 정성껏 대접했다.

시골 출신인 과묵한 몬트는 송구해 했지만, 철없는 마녀 키르케 등은 “이히힛!” 웃으며 사양하지 않고 즐겼다.

그러나 쉬머 영지민이 모두 순진한 것은 아니었다. 영주의 성에 소식이 전해지자 구닥다리 플레이트 앤 메일을 갖춘 기사가 찾아왔다. 어디서 종자 생활을 했는지 의심이 많은 자였다.

“로벨 로드릭 후작이라고?”

로벨은 마을 광장에 불쑥 나타나 다짜고짜 이름을 부르는 쉬머 가문 기사를 불쾌하게 보았다. 그러나 일단 참았다. 예의하고 담을 쌓은 기사가 한둘이 아니라 이 정도 무례로 결투를 신청하면 왕국 내 남아날 기사가 없었다. 로벨의 수행원을 자처하는 마녀 키르케가 마주 소리쳤다.

“그래요! 우리 기사님이 로벨 후작님이세요!”

쉬머 가문 기사는 광장에 앉은 로벨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크게 웃었다.

“으하하! 로벨 후작은 검은 숲에서 대군을 이끌고 전쟁 중인데, 이 먼 곳에 무슨 일로 온단 말인가!”

“그건 그러니까...”

“네 이놈들! 거짓말도 자리를 봐가며 해야지! 우리 영주님의 장남, 로스 쉬머 경이 로드릭 후작과 친분이 두터운 사실을 몰랐구나!”

일행의 시선이 로벨에게 꽂혔다. ‘친구 좀 잘 사귀지 그랬습니까요?’ 로벨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 그런 기사 몰라!’ 쉬머 가문 기사는 그런 로벨 일행의 모습을 더욱 오해했다.

“게다가 무엇이냐? 저 계집처럼 희멀건 것이 무적무패의 챔피언이라고? 그럴듯한 갑옷만 입으면 개나 소나 기사인 줄 아느냐? 매우 괘씸하도다!”

아무리 오해라지만, 이쯤 되면 심각한 모욕이었다. 로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도가 지나치군.”

“뭣이? 정도? 으하핫! 너희 같은 사기꾼한테...”

과묵한 몬트는 이마를 짚고 한숨 쉬었다. 가문의 깃발이나 인장을 확인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저리 일관되게 무례하다니, 기사들의 외골수는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예로운 기사답게 더 이상의 모욕을 참지 않았다. 자리를 박차고 뛰어갔다.

“...대접해 줄 것닛!”

아론다이트의 크고 무거운 칼날이 물 흐르듯이 뽑혔다. 저녁 노을을 머금은 쇠붙이는 매서운 찌르기가 되었다. 칼 밥 좀 먹었다는 울프 용병단도 앗! 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니, 실전경험이 없는 시골 기사와 두더지도 겨우 잡는 농부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아론다이트의 차가운 칼날이 고짓 플레이트를 피해 목젖 앞에 정지했다. 쉬머 가문 기사는 롱소드 손잡이를 겨우 잡은 채로 뻣뻣하게 굳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 조상님을 뵈러 갈 상황이지만, 이성보다 가벼운 자존심이 기어이 혓바닥을 움직였다.

“이노옴! 비겁하다!”

“비, 비겁?”

로벨은 충격받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정말?” 마녀 키르케 이하 울프 용병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그렇긴 했어요.”

“우리야 그렇다 쳐도, 기사 나리인데...”

“치사해 보입지요. 암.”

로벨은 노을 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지난 세월 용병에게 물든 것은 어린 집사만이 아니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치우고 사과했다.

“정정당당하지 못했군. 칼을 뽑으시오.”

“이잇!”

쉬머 가문 기사는 사양하지 않고 롱소드를 뽑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수직으로 세워 기사의 예를 표시한 후 곧장 휘둘렀다. “흡!” 쉬머 가문 기사는 어금니를 악 물고 롱소드를 마주했다. 깡-!

앞서 ‘비겁’이나 ‘치사함’ 따위의 평가는 무의미했다. 전설의 기사가 휘두르는 전설의 검은 시골 기사의 부실한 검으로 대적이 불가능했다. 단 일합으로 롱소드가 두 동각 났다.

“마, 말도 안 돼!”

쉬머 가문 기사는 깨끗이 잘려나간 롱소드를 휘저으며 뒷걸음쳤다. 로벨은 폐부에 찬 공기를 가늘게 토하며 자세를 고쳤다.

“이 정도면 믿으시겠소?”

평생 칼을 잡아본 적 없는 사람도 로벨의 칼이 보통 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안목이 조금 있다면 로벨의 칼솜씨 또한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명검이라도 쇠를 자르는 것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지, 진짜 그랜드 챔피언이오?”

“아직도 의심하니 어쩔 수 없군.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

“믿소! 믿소! 믿는다지 않소!”

로벨은 빙그레 웃고 아론다이트를 회수했다. 마녀 키르케가 물개를 따라하고 발가락 슈미츠가 소쩍새를 흉내냈다.

쉬머 가문 기사는 매끄럽게 잘린 애병을 보며 의심을 털어냈다. 저만한 실력과 저만한 보물을 지닌 자가 빵 좀 빌어먹겠다고 사칭할 것 같지 않았다. 칼을 팔면 성을 통째로 살 수 있을 텐데, 뭐 하러 사서 고생할까.

“영주님께, 우리 주군께 안내하겠소. 성으로 갑시다.”

로벨은 손을 저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그럴 필요 없소. 우린 한시라도 빨리 포클랜드 시티에 가야 하니 이곳에서 일찍 쉬고 일찍 떠날 것이오.”

쉬머 가문 기사는 성질이 급하지만 충성스러운 기사였다. 로벨에게 몇 차례 권유하다 안 되자 얼굴을 굳히고 떠나갔다.

마녀 키르케가 아랫입술을 길게 당기며 중얼거렸다.

“영주님을 모셔오겠죠?”

흉내쟁이가 슬그머니 닭다리를 챙기며 물었다.

“엥? 안 가신다잖소?”

“우리 영주님 말고요. 저쪽 영주님이요.”

“저쪽? 아, 쉬머 남작 말이오?”

역사적으로 마녀의 예언은 잘 맞았다.

늦은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쉬머 가문의 당주 로앙 쉬머 남작이 로벨을 찾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고, 빈손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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