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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96화 (196/605)

196화. 인기

196화. 인기

로벨은 까마귀 성루에 올라 그늘진 동쪽을 바라보았다. 죠드 도너반 자작이 빌려준 20대의 수레가 성문을 지나 북부대로로 떠나갔다. 지난 회전에서 부상 입은 병사와 전사자 유품이 실려 있었다.

“이 자식아! 죽지 말고! 어? 볼프 후작 때려잡고 따라갈 테니까! 어? 듣고 있냐?”

코골이 바디도 수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열독이 가라앉지 않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용병 특유의 허세를 잃지 않았다.

“시끄러! 아직 안 죽었다! 쿨럭! 쿨럭! 니들도 조심해라. 기사 나리랑 펄프 대장 옆에 잘 붙어있어.”

로벨은 코골이 바디와 코골이의 소대원을 보며 우울해 했다. 그 우울함을 알아챈 듯 펄프 대장이 성루로 올라왔다. 로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남은 병력은?”

펄프 대장은 여장 밖으로 떠나는 로벨 후작군을 힐끔 보고 보고했다.

“울프 용병단 121명, 호른 성 9명, 바위성 15명, 가시성 17명, 구릉성 25명, 늪지성 20명, 가시나무 성 10명으로 총 217명입니다.”

“...절반으로 줄었네?”

“저 녀석들을 보호할 녀석도 딸려 보냈으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펄프 대장은 천성이 용병이라 부상병을 호송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부상병을 호위하느라 멀쩡한 병력까지 차출되었다. 손 하나가 아쉬울 때라 마뜩찮았다. 로벨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주위에 환자가 많으면 사기가 떨어져. 남 보기에도 좋지 않고.”

로벨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울프 용병단 120명이면 결코 작은 전력이 아니었다. 제임스 공작의 군사도 있으니, 까마귀 성을 지키기에 충분했다.

“그래. 남이 볼 때 좋지 않아.”

로벨은 허리를 펴서 먼 곳을 보았다. 큰 뱀이 기어간 듯한 협곡을 넘어 넓은 포스트 포레스트의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포비아 왕국의 중심부, 포클랜드 지방이었다.

호른 경이 포클랜드의 기사들을 불러올 거야. 지금쯤 승전보가 전해졌을 테니까, 앞다퉈 찾아올 거야.

“그리되면 좋겠으나...”

펄프 대장이 말끝을 흐렸다. 30년 넘게 용병짓 하면서 엉덩이가 무거운 기사를 많이 보았다. 가진 것이 많으면 잃을 것도 많은 법이라 과연 몇 명이나 소환에 응할지 불확실했다. 로벨은 움찔해서 눈을 흘겼다. 꼭 뒷말이 붙으면 재수가 없었다.

“그리될 거야.”

“예?”

“그리될 거라고.”

로벨은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했다. 펄프 대장은 기에 눌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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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기대와 펄프 대장의 의심이 반씩 맞았다.

검은 숲의 땅을 한 토막 차지할 수 있지 않을까 꿈에 부푼 기사들이 찾아왔다. 바꿔 말하면, 가진 것이 변변치 않은 기사들만 찾아왔다.

“...302명?”

로벨은 포클랜드 전역에서 온 지원군 숫자를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로벨이 그 정도였으니, 검은 숲의 주인 제임스 공작은 말한 것도 없었다.

“고작? 고작 300명이라고? 제후 중에는 응한 자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35개 가문이 찾아왔는데 302명이면 단순히 계산해도 기사 한 명 당 병사가 10명이 안 되었다. 전투능력이 없는 수행원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병사는 200명이 채 안 될 것이다.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시골 기사만 찾아온 것이다. 갑옷과 말이나 제대로 갖췄을지 의심되었다. 도너반 자작이 젖은 기침 후 말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습니다.”

로벨은 까마귀 성의 총 병력을 계산했다. 세 자릿수 사칙연산이라 암산이 안 되었다. 두 번 정도 머뭇거리자 어린 집사가 재빨리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600하고 50이요!’

로벨의 병사와 검은 숲의 병사와 포클랜드의 병사를 합치면 총 650명이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1,000명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잉그비아 왕국군 뿐이라면...’

로벨은 고개를 숙이고 까마귀 성 메인 홀의 절반을 차지하는 오동나무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탓에 여기저기 흠집이 많지만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은 좋은 가구였다.

‘그런데 이 큰 게 어떻게 성문을 통과했지?’

로벨의 엉뚱한 호기심은 제임스 공작의 역성으로 깨졌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편지를 보내겠소! 그자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는 모양이오!”

도너반 자작이 숨을 몰아쉬며 옛 주군을 말렸다.

“그 전에 기사들을 만나보시지요. 기사가 30명이면 농민병 300명보다 낫습니다.”

“허! 제대로 된 기사라면 말이지!”

기사의 힘은 재화와 땅에서 나온다. 무기와 갑옷, 그리고 전투마가 있어야 기사였다. 로벨이 가난하다 하지만, 그래도 부친이 물려준 칼과 갑옷, 그리고 영지가 있어서 성공할 수 있었다. 사실 그조차도 없는 기사가 상당했다.

“그래도 기사입니다. 모욕을 받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제임스 공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 하나가 아쉬울 때였다. 오합지졸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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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의 주인은 제임스 공작이고, 까마귀 성의 주인은 도너반 자작이다. 로벨의 위세가 대단하다 하나 사실 객이었다. 로벨은 차마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어 예의 바르게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까마귀 성을 찾아온 포클랜드 기사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재산의 태반을 잃은 제임스 공작이 아니라 신왕파의 중추세력이자 가장 강한 군사력을 가진 로벨 로드릭 후작 때문에 찾아왔다. 로벨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본인은 쉬머 가문의 장남 로스 쉬머요. 그랜드 챔피언을 만나서 영광이오.”

“억새풀 마을에서 온 겔런 메블랑 남작이요. 후작의 무용담을 익히 들었소.”

로벨은 기사를 박대하지 못했다. 비록 양철통을 뒤집어쓴 듯한 초라한 몰골이라도 말이다.

“흐음... 로벨 경의 인기가 대단하군? 솔직히 부럽소이다.”

제임스 공작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로벨이 전전긍긍하면서도 기사들과 어울리자 제임스 공작이 의미심장하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로벨은 양쪽으로 괴로웠다. 그날 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 앞에서 한탄했다.

“이럴 바에 전쟁이 낫겠어! 정말이야!”

마녀 키르케는 ‘우리 기사님이 제일 인기 많아! 히히힛!’ 이러면서 좋아했지만, 눈치가 좋고 걱정이 많은 어린 집사는 짐짓 심각했다.

“으으음... 도움 안 되기는 검은 숲 기사나 포클랜드 기사나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정통성이 있는 제임스 공작쪽이 나아요.”

“치잇! 그게 뭐에요?”

마녀 키르케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려울 때 발 벗고 도와줬더니 알량한 질투심으로 보답하는 것이 얄미웠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었다.

“여기서 오래 버티면 제임스 가문하고 사이만 틀어지겠어요.”

“그럼 어떡해?”

어린 집사는 허공에 검은 숲 지도를 그렸다. 그믐달처럼 휘어진 북해안을 그리고, 먹물처럼 새까만 숲을 절반쯤 채워 넣고, 커다란 강줄기를 구불구불 그린 후 곳곳에 성과 도시를 박아 넣었다. 어린 집사의 눈에만 보이는 지도지만 실제 군사지도만큼 정확했다. 어린 집사의 기억력이 그만큼 뛰어났다.

“초승달 강 서쪽은 아직도 볼프 후작의 영향력이 강해요. 북쪽은 언제 전쟁터가 될지 모르고요. 코골이를 따라 볼탄 반도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면 가시나무 성으로 가죠.”

“가시나무 성?”

“전선에서 적당히 떨어진데다 충직한 머를 브릭 경의 영지니까 눈치 볼 것도 없어요.”

“그럼 전쟁준비는?”

“그까짓 꺼! 잘나신 검은 숲 공작님이 하라고 하세요!”

“그건 안 되지만... 그렇겠네...?”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으면 통솔이 불가능하다. 차라리 로벨이 떠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좋아. 우리군을 가시나무 성으로 보내.”

“히힛! 잘 생각하셨어요. 엥? 잠깐? 보내라고요?”

“응. 난 포클랜드 시티로 갈 거야.”

로벨의 깜짝 선언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로벨은 재빨리 덧붙였다.

“걱정 마. 혼자 안 가. 과묵한 몬트의 기마 소대와 다녀올게.”

“요즘 같이 수상할 때 당연히 혼자 가면 안 되죠! 그런데 왜요? 가서 뭐하게요?”

“포비아 왕국 해방군을 모을 거야. 호른 경의 말은 안 들어도 내 말은 들을 거야.”

“와아! 근거 없는 자신감!”

“그, 근거 있어!”

로벨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친분, 새 국왕의 신뢰, 와트 마르셀 백작의 우정 따위를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감이 조금 줄었다.

“...아마도?”

“으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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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자신의 군대를 재편성해서 가시나무 성으로 보냈다. 제임스 공작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찾아왔다.

“로벨 경! 로벨 경! 지금 어디 가는 거요?”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에 오른손을 걸치고 파나케아 투구를 왼쪽 옆구리에 끼운 채 돌아보았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간미가 넘치는 친구였다.

“볼탄 반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안심하시오. 이곳은 땅이 비좁아 600명이 주둔하기 힘드니 가까운 가시나무 성으로 가고자 하오.”

제임스 공작은 겉으로 놀라면서 속으로 안도했다. 로벨이 계속 주둔하면 까마귀 성뿐만 아니라 검은 숲의 주인 자리까지 위태로웠다. 로벨이 없는 사이 기사들을 회유하고 병사들을 모집하면 ‘검은 숲의 공작’ 위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시나무 성은 멀지 않고, 경의 영지이니 그렇겠군. 좋소! 그리하시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모닝스타에 올랐다. 과묵한 몬트 소대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었다.

로벨은 펄프 대장이 인솔하는 울프 용병단을 따라가다가 적당할 때 떨어졌다. 로벨의 빈자리는 미리 말을 맞춘 켈트 경의 랜스가 메꾸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행군은 자연스럽게 계속되었다.

로벨은 제임스 공작쪽 사람들에게 포클랜드 시티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로벨이 검은 숲을 벗어나면 사기가 떨어질 우려가 있었다. 의심이 많은 자는 자기 세력을 불린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말이 많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어려워. 어려워.”

로벨을 머리를 저었다. 인간관계에 서툴다고 생각한 적 없지만, 정치문제가 되자 매사 복잡했다.

“그래서 제가 있잖아요. 히히힛!”

“앗! 깜짝아!”

로벨은 화들짝 놀라 안장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툭툭 차며 따라왔다.

“같이 가려고?”

“어린 집사가 기사님만 보내면 불안하다고 따라가래요.”

“그럴 리가?”

로벨의 비밀과 관련해서 가장 불안한 것이 마녀인데, 마녀를 일부러 보낼 리 없었다. 로벨은 어느덧 멀어진 울프 용병단 본대 방향을 보았다. 어린 집사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못생긴 마녀가 또 어디 갔어? 당장 나와!’ 마녀 키르케가 천연덕스럽게 반응했다.

“이상한 환청이네요?”

“아하? 환청이구나?”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묵한 몬트와 발가락 슈미츠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고용주를 보았다.

로벨은 농담을 그만두고 피식- 웃었다. 친구가 함께하면 좋았다.

“흉내쟁이, 키르케를 태워줘.”

마녀는 로벨과 함께 말을 타지 못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기사 체면에 수행원을 태울 수 없으니 당연했다.

“그럼 가자. 서두르면 2, 3일이면 충분할 거야.”

“사고가 안 나면 말입지요?”

흉내쟁이 퍼시발이 고단한 여정을 직감하고 중얼거렸다. 로벨은 못 들은 척하고 고삐를 올렸다. 영리한 하프 유니콘은 채찍질이 필요 없었다. 주인의 뜻을 알고 통통 튀듯이 달려갔다.

“가자! 포클랜드 시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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