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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95화 (195/605)

195화. 기쁨

195화. 기쁨

전쟁은 순수하다.

인간이 수천 년간 쌓아온 문화, 양식, 통념 따위를 팽개치고, 태초의 야성을 끄집어내어 상대방을 대한다. 따라서 전쟁터에는 규칙도, 정의도, 도덕도 없었다. ‘죽기 전에 죽일 것’을 대명제로 직접적이고 직관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서로 다른 깃발 아래 창과 창이 피를 탐하고, 칼과 도끼가 뼈를 취했다. 엇갈린 창 아래로 짤막한 클리버와 핸드 액스를 가진 풋맨들이 기어들어가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발목이 잘리고, 발등이 부서졌다.

“버텨! 버텨라!”

“밀어붙여!”

회전(會戰)은 힘 대 힘의 대결이었다. 개인의 기량, 병기의 우수함, 지휘관의 통솔력이 부질없이 ‘질량’으로 싸웠다. 이쪽이 한 명 쓰러지면 저쪽도 한 명 쓰러졌다. 그 시체 위에서 다시 한 명씩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졌다.

로벨은 점점 얇아지는 창벽을 필사적으로 지원했다. 적병을 얼마나 쓰러뜨렸는지는 세지 않았다. 깨지고 부러져서 팽개친 랜스 숫자조차도 가물가물했다.

“막아야 해!”

로벨은 짐승처럼 고함지르는 신입 용병을 더욱 독려했다. 시체가 쌓여서 장애물이 되고, 피가 고여서 첨벙첨벙 소리를 내었다.

로벨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수 파나케아의 투구가 꼭 좋지만은 않았다. 남들보다 많은 것을 보는 만큼 보기 싫은 것도 보았다. 이성을 잃은 병사의 광기와 죽어가는 병사의 공포 말이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먼저 볼 수 있었다.

“...왔어.”

로벨의 중얼거림은 가장 가까이 있는 허풍쟁이 제이콥만 들을 수 있었다. 허풍쟁이의 얼굴이 여름밤의 달맞이꽃처럼 환해졌다.

“왔다앗! 드디어 왔다아앗!”

누가, 어디서, 왜 왔는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의 외침에 기사와 용병이 하나둘 미소 지었다. 코골이 바디가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필사적으로 틀어막으며 낄낄거렸다.

“시부랄... 빨리 좀 오지... 크큭...!”

인간의 몸은 신기해서 감정이 고취되자 체력이 회복됐다. 근육이 단단히 뭉치고, 뼈마디가 바짝 쪼여졌다.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던 창칼이 부쩍 가벼워졌다. 얼마나 가벼운지 머리 위로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도 될 정도였다.

“애꾸눈 볼포스가 왔다!”

“애꾸눈이 돌아왔다!”

“애꾸눈이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

볼프 후작군은 애꾸눈이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지원군의 위치와 규모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빽빽하게 늘어선 적과 아군과 무기 탓에 시야가 좋지 않았다. 3야드 밖도 안 보이니 전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위치를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부우우우-웅-!

부우웅-웅-!

뿔나팔 특유의 크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과 볼프 사트로 후작군 사이에 희비가 헛갈렸다.

“뒤, 뒤쪽이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울프 용병단은 땅바닥으로 기울어진 창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피와 흙과 기타 지저분한 이물질이 잔뜩 달라붙은 창날이지만, 주인의 잔혹한 미소를 배경으로 삼자 이루 말할 수 없이 흉흉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되기는? 너희가 진 거지! 으하핫!”

“모조리 죽여라!”

울프 용병단을 중심으로 로벨 로드릭 후작군이 전진했다. 그러자 초승달 강 하류에서 120여 명의 병사가 호응했다. 볼프 후작과 후작의 부하들에게 쌓인 것이 무척 많은 병사들이었다.

“늑대성의 형제들을 돕는다!”

“떡갈나무 성의 치욕을 갚을 때다!”

“전진! 전진! 전진하라!”

까마귀 성에 주둔 중이던 제임스 공작군과 도너반 자작군이 패배를 딛고 일어나 진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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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볼포스 한 사람이 전황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애꾸눈이 이끌고 온 제임스 공작군과 도너반 자작군은 가능했다.

가문의 깃발을 휘날리는 20명의 검은 숲 기사와 시퍼런 창날을 곧추세운 100명의 검은 숲 병사가 지칠 때로 지친 900여 명의 볼프 후작군을 압박했다.

볼프 후작군은 남북으로 포위되어 지리멸렬하게 무너졌다. 숫자상으로는 2배 가까이 많지만, 앞뒤로 포위된 상황에서 수적우세는 큰 의미가 없었다. 더욱이 한나절 동안 계속된 전투로 창이 무뎌지고 화살이 바닥났다.

전세에 민감한 용병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잃을 것이 많은 기사도 하나둘 전선을 이탈했다. 휘하 병사를 챙겨서 도망친 기사는 그나마 신의가 있는 편이다. 겁에 질린 대다수 기사들은 몇몇 수행원만 데리고 탈출했다.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일반 병사도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장 동쪽에 위치한 병사들은 그나마 도망치기 용이했지만, 서쪽에 위치한 병사들은 초승달 강까지 삼면이 포위되어 옴짝달싹 못 하고 죽어갔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그리고 검은 숲 연합군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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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공작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3년 인생에서 오늘이 가장 찬란한 날이라 확신했다. 어쩌면 죽을 때 돌이켜 회상할 황금의 시절일지도 모른다.

“자자! 마시시오! 마시란 말이오!”

숙적 볼프 사트로 후작에게 통쾌하게 복수하고 잃어버린 영지의 절반을 되찾았으니 충분히 기뻐할 만 했다.

“이런 날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소?”

제임스 공작은 시뻘게진 얼굴로 포도주를 쏟아 부었다. 술잔에 채워지는 양보다 흘러넘치는 양이 많았다. 마녀 키르케가 아까워 죽겠다는 듯 움찔움찔했다.

로벨은 손등을 적신 술을 떨어내고 차분하게 대꾸했다.

“버얼써 마아니 마셔소오.”

그 말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제임스 공작은 껄껄 웃고 초저녁부터 십 수 차례 반복한 이야기를 또다시 했다.

“경의 전령이 와서, 와서, 뭐라더라? 아! 그래! 사자를 사냥하는 사냥꾼의 심정으로 결전에 임하니, 기회를 엿봐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시오. 으하핫! 그렇소! 최후의 일격! 최후의 일격 말이오!”

로벨은 힘없이 웃었다. 실제로 로벨이 한 말은 ‘내일 정오에 전투가 시작되니까 제9시까지 와서 배후를 치시오. 한 번 더 말하겠소. 제9시까지 와야 하오. 농담이 아니오. 진짜 심각하오. 안 오면 우리 싹 다 죽는 거야앗!’ 정도였는데, 전달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수신자가 의역을 과하게 했는지 내용이 약간 바뀌었다.

로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벨의 승전축하연회지만, 딱히 축하받고 싶지 않았다.

울프 용병단과 각 영지군의 피해가 상당했다. 전사자만 91명이고, 크고 작은 부상자가 절반이었다. 제임스 공작이 1시간만 늦었어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외팔이 더치와 코골이 바디도 부상을 입었다. 그중 화살에 맞은 코골이가 특히 심각했다. 화살촉을 제거하고 상처를 꿰매자 열독이 찾아왔다. 셋 중 하나가 죽어 나가는 무서운 후유증이었다.

“그만! 그마안! 그만 마시겠소!”

“어허! 이 사람이 취하긴 취했군!”

로벨은 술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술기운과 갑옷 무게를 못 이겨 뒤로 한 걸음, 옆으로 두 걸음 기우뚱거렸지만 다행히 쓰러지지 않았다. 로벨 못지않게 취한 로벨의 봉신과 제임스 공작의 봉신이 껄껄 웃으며 걱정 반 야유 반 보내왔다. 로벨은 베시시- 웃어주고 술판이 된 지휘막사를 벗어났다.

승전의 기쁨은 기사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검은 숲 출신과 볼탄 반도 출신과 기타 각지의 용병이 뒤섞여서 먹고 마시고 노래했다. 걸걸한 사내들 웃음 사이로 간드러진 여인네 목소리도 있었다. 주둔지에 창부를 들여온 간 큰 병사가 있었다. 누군지 찾아서 혼내줄까 하다가 그만뒀다. 저 정도 일탈은 봐줘도 될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남사스러운 탓도 있었다. 로벨은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아직도 숙맥이었다.

“주군, 괜찮습니까?”

호른 경이 걱정되었는지 뒤따라 나왔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둔지 반대쪽을 보았다.

불과 30야드 떨어진 곳이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짐 더미처럼 쌓여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료지식이 조금 있거나, 이발사 일을 한 적이 있는 병사들이 부상자를 돌보았다. 치료라 부르는 요식행위였다. 몸에 박힌 화살촉과 칼날을 빼내고 상처를 꿰매는 것이 전부였다. 부상이 심하면 절단하기도 했다. 상처가 썩게 두는 것보다 잘라내는 쪽이 생존에 유리했다. 제대로 된 약은 없었다. 바가지로 퍼내는 싸구려 와인이 진통제이자 소독약이었다. 가장 많이 취한 것은 기사도, 용병도 아니고 환자들이었다.

호른 경은 로벨의 시선 방향을 알아채고 위로했다.

“그래도 술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도너반 자작이 선견지명이 있군요.”

까마귀 성에서 영내의 술을 몽땅 보내왔다. 술장사를 노린 종군상인은 좌절했지만, 기사와 병사들은 쾌재를 불렀다. 어린 집사가 특히 좋아했다.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무리겠지.”

숫자만 보면 아직도 200명이 멀쩡하지만, 부상자를 챙기고 포로를 관리하면 절반도 싸울 수 없었다. 지금은 술과 승리에 취해있지만, 내일 아침이면 덜컥 겁이 날 것이다. ‘그 짓을 또 해야 한다고?’ 승리해도 탈영병은 나오는 법이다.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쉬어야 했다.

“내일 아침 까마귀 성으로 철수하겠소.”

“예. 알겠습니다.”

“전투가 불가능한 병사들은 로드릭 영지로 돌려보낼 것이오. 도너반 자작에게 수레와 말을 빌리도록 하시오.”

“주군의 뜻을 따릅니다.”

“그리고... 지원군이 필요하오.”

로벨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뻔했다. 호른 경은 낙관적인 전망을 펼쳤다.

“볼프 후작군이 대패했는데, 잉그비아 왕국군이 여기까지 오겠습니까?”

“오늘 볼프 후작을 보았소?”

“볼프 사트로 후작은... 아닙니다. 그의 친동생 에반 사트로 후작뿐이었습니다.”

“그럼 올 것이오.”

호른 경은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벨은 확신했다. 볼프 후작의 호전성을 확신하고, 구왕의 욕심을 확신하고, 늑대의 왕의 예언을 확신했다.

“...여름이 가깝지 않소?”

“여름이요?”

로벨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여운을 주기 위해서 아니라 위장이 뒤집혔기 때문이다.

“욱! 우욱-! 우웨엑-!”

“아앗! 주군! 주군! 여기서 토하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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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의기양양하게 철수했다. 아니, 개선했다. 까마귀 성 주민들은 3전 3승의 쾌거를 올리고 마침내 1,500명의 침략군을 격퇴한 영웅들을 환영했다. 계곡 아래로 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지고 경쾌한 노래가 메아리쳤다. 이러한 환대를 받아본 적 없는 신입 용병과 젊은 농민병은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렀다.

로벨은 계곡 아래쪽에 병사를 두고 몇몇 기사와 함께 까마귀 성으로 올라갔다. 병이 깊어 참전하지 못한 도너반 자작이 성문 앞에 마중 나왔다.

“주군, 승전을 축하합니다.”

철가면과 붕대에 신앙이 깊은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둥병은 옛 신의 징벌이라 신실한 신자가 가까이 해서 안 되었다.

그러나 로벨은 옛 신을 정말 옛날 옛적 고리타분한 선각자 나부랭이로 여기는 기사였다. 도너반 자작의 두 손을 맞잡았다.

“경이 제때 군사를 보내준 덕분이오. 고맙소.”

도너반 자작은 당황해서 얼른 손을 뺐다. 붕대를 갈아주는 충직한 하인 외에 이렇게 서슴없이 손을 잡는 사람이 없었다. 로벨은 자신이 무례해서 화가 났다고 오해했다.

“아, 미안하오. 승리의 영광을 나눈다는 것이 조급했군.”

“그런 것이 아니라...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로벨은 철가면 너머로 엿보이는 소소한 기쁨에 안도하며 말했다.

“그전에 부탁이 있소. 부상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소.

도너반 자작은 영민한 사람이라 하나를 말하면 둘, 셋을 이해했다.

“수레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소.”

로벨은 왜인지 심통이 난 호른 경과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외면한 켈트 경을 차례로 보고 다시 7번째 봉신이 된 도너반 자작을 보았다.

“곧 다가올 대전쟁에 대비해 검은 숲 해방군, 아니, 포비아 왕국 해방군을 결성해야 하오.”

철가면도 속마음을 숨기지는 못한다. 도너반 자작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에게서 해방합니까?”

로벨은 여러 기사들이 들을 수 있게 크게 대답했다.

“과오를 저지른 옛 왕과 잉그비아 왕국의 사악한 악마추종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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