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94화 (194/605)

194화. 회전

194화. 회전

격파. 격파. 격파...!

로벨은 절묘한 유인책으로 지프 모몬트 경을 비롯한 9명의 기사를 생포하고 100여 명의 병사를 쫓아냈으며, 곧장 볼프 후작의 본대를 기습해서 붉은 수염 용병단에 큰 타격을 입혔다.

볼프 후작군은 또다시 200여 명의 피해를 보았다. 볼프 사트로 후작의 친동생, 에반 사트로 백작이 헬름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로벨 로드리이익! 정정당당하게 붙자!”

유리하면 정정당당이고, 불리하면 비겁한 것이 사람의 심리이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포클랜드 시티의 에릭 공작은 로벨 로드릭 후작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았냐며 의기양양했고, 와트 마르셀 백작 이하 포클랜드 기사들은 신왕파의 승리에 안도하는 한편, 로벨 로드릭과 볼탄 반도의 막강한 군사력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로벨 로드릭의 창끝이 남쪽을 향하는 순간 왕위계승전쟁으로 분열된 포클랜드가 어찌될지 불 보듯 뻔했다.

적이면 당연히 무섭고, 아군일 때도 무서운 포비아 왕국 최강의 기사. 무적무패의 지휘관. 로벨 로드릭 후작은 연전연승에도 뜻하지 않게 우울했다.

“여기 봐! 여기 봐!”

로벨은 호롱불 아래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어깨 갑옷을 보물 감정하듯이 유심히 살피다가 돌연히 벌떡 일어났다. 어린 집사는 침을 뱉어서 먼지투성이 그리브를 닦다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왜, 왜 그래요?”

“흠집이 생겼어!”

“......”

어린 집사는 옹알이할 때부터 함께 한 젊은 주인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야 갑옷이잖아요. 창에 찔리고 화살에 맞았는데 그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이죠.”

“그치만! 그치만!”

로벨은 어린 집사 따라 헝겊에 침을 묻혀서 하얗게 벗겨진 상박 부분을 빡빡 문질렀다. 그래도 흠집이 사라지지 않자 울상이 되었다.

“10년 동안 입으려고 했는데...”

“무슨 10년 씩이나... 아니! 잠깐만요! 그거 기스 좀 났다고 안 입으려고요?”

“그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로벨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로벨의 우울함은 갑옷의 손상 때문만이 아니었다. 수차례 전투로 로벨의 병사 중 3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전쟁을 계속될수록 피해는 커질 것이다.

어린 집사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로벨의 속마음을 어렵지 않게 읽었다.

“볼프 후작군은 아직도 1,000명이 남았어요.”

“...응.”

“이쯤에서 화해할까요? 저쪽도 많이 힘드니까 받아줄 거 같은데요?”

“우린 그래도 상관없지만, 제임스 공작이랑 도너반 자작이 싫어할 거야.”

“흥! 그 작자들이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한테 주는 것도 없이 요구만 많은데!”

“그렇지 않아.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시리다잖아. 검은 숲이 없으면 볼탄 반도와 포클랜드가 전쟁이야.”

어린 집사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광택을 잃지 않은 필드 아머를 치우고 고뇌하는 주인을 위로했다.

“그럼 기왕 싸우는 거 후딱 처치해요. 빨리 끝내면 갑옷도, 말도, 사람도 상하지 않을 거 아네요?”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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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벨과 어린 집사는 볼프 후작의 저력을 얕잡아 보았다. 나아가 에릭 공작, 제임스 공작, 도너반 자작도 그러했다. 볼프 후작과 구왕파 영주들은 잉그비아 왕국의 지원을 받아 1,000명 군대를 보냈다.

북해를 건너온 병사 1,000명과 기존병사 1,000명을 합쳐서 총 2,000명의 적이 생겼다. 로벨과 검은 숲의 연합군 5, 600명이 상대할 규모가 아니었다. 로벨과 로벨의 측근들은 소식을 듣고 크게 당황했다.

“뭐? 미친 거 아니야?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이다니!”

“볼프 후작! 이 작자가 제정신인가?”

모두가 화내고 놀라는 가운데, 비교적 냉철한 사람이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어쩌겠어요? 이대로 가면 동생한테 왕위를 뺏길 판인데, 이판사판이죠.”

“허나!”

허나 이후로 할 말이 없었다. 크든 작든 권력을 누려온 기사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왕은 왕위뿐만 아니라 목숨을 내놔야 할 것이다.

“제길! 그럼 우리쪽은 왜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 거지? 국왕 폐하는? 에릭 공작은?”

“지금쯤 소식을 접했을 거요. 이제야 부랴부랴 준비 중이겠지.”

그것도 희망사항이었다.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체감을 못 하는 것이 인간의 오랜 습성이라 까마귀 성이 돌파당하고 포스트 포레스트가 함락되기 전까지 포클랜드의 영주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과거 검은 숲의 몬스터가 소란을 피웠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싸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일단 볼탄 반도로 후퇴해서 에릭 공작의 여러 봉신들과 연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사와 집사와 마녀와 용병이 동시에 로벨을 쳐다보았다.

로벨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험상궂은 기사와 덩치 좋은 용병 사이를 지나 육각막사 밖으로 나왔다. 검은 숲의 짙은 그림자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모닝스타와 기사들의 전투마가 푸릉- 푸르릉- 투정부리고, 전투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젊은 용병과 목숨을 담보로 한 밑천 챙기는 종군상인이 은화 한 장에 목청 높여 싸웠다.

나이 많은 농민병은 창에 기대어서 하품을 삼켰고, 나이 어린 기사 종자는 포도주를 훔쳐 마시다 로벨을 보고 기겁해서 도망쳤다. 누구의 종자인지 모르지만 서임식 때까지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주군?”

호른 경이 기사들을 대표해 따라 나왔다. 로벨은 몸을 돌려 500명의 군사를 책임진 지휘관을 차례로 보았다.

“철군은 안 되오.”

“...그럼 어찌합니까? 앞뒤로 2배 많은 적을 두고 싸울 수 없습니다.”

로벨은 휘하 기사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크게 말했다.

“잉그비아 왕국군이 내려오려면 사나흘은 걸릴 것이오. 그 사이 볼프 후작군을 격파하고 2차 검은 숲 해방군을 조직할 것이오.”

호른 경의 입술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1,000명의 대군을 절반도 안 되는 병력으로, 그것도 고작 사흘 만에 격파하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아, 아무리 주군이라도...”

“난 아무리란 말을 좋아하지 않소.”

전쟁을 오래 끌면 안 된다. 단 한 번으로 전쟁을 끝내야 했다.

로벨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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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꽃. 기사의 낭만. 시인이 노래하고 역사가가 환호하는 영웅의 무도회. 수백, 수천의 병사가 마주한 채 피로 피를 씻어주는 장엄하고 장렬한 전투가 바로 회전(會戰)이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 473명과 볼프 사트로 후작군 997명이 검은 숲을 가르는 초승달 강을 측면에 두고 마주 섰다.

로벨 쪽에는 잉그비아 왕국군이 오기 전에 볼프 후작의 주력군을 격파할 필요가 있었고, 볼프 후작에게는 2배나 많은 병력으로 유리한 전투를 피할 이유가 없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재촉해 아군의 주력부대인 스피어맨 앞으로 나갔다.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깃발을 가지고 따라왔다. 야전으로 헤진 깃발을 따라 940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로벨은 전열 우측에서 좌측 끝까지 갔다가 다시 우측으로 돌아왔다. 일선을 담당하는 파이크맨이 잘 보였다.

울프 용병단의 숙련된 창병을 중심으로 각 영지의 농민병이 꾀죄죄한 몰골로 늘어서 있었다. 지저분하고 부실한 차림이지만, 하늘 높이 솟은 창만큼은 날카로웠다.

“적이 두 배라고 겁먹을 것 없어. 너희가 싸우는 상대는 눈앞에 한 명뿐이야. 적이 두 배라고 두 명과 싸우진 않아. 진짜야.”

전쟁경험이 풍부한 울프 용병단이 숨죽여 낄낄거렸다. 고참이 신참한테 자주 하는 농담이었다. 그리고 꽤 효과가 있는 농담이기도 했다.

로벨은 부드럽게 웃었다. 정오 햇살 아래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 짓는 미남 기사의 모습은 전투를 앞둔 기사와 병사에게 퍽 인상적이었다.

“너희보고 천 명의 적을 죽이라고 하지 않아. 너희가 할 일은 하나야. 나를 믿고, 전우를 믿고, 자기 자신을 믿으며 그 자리를 지켜. 그것만 하면 이길 수 있어.”

로벨의 청아한 목소리가 산뜻한 봄바람을 타고 평야 곳곳에 흘러갔다. 세 자릿수 병사가 모였지만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꼴깍-

누구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로벨은 그곳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긴장하지 마. 무서워하지 마. 우리는 반드시 이기니까. 의심하지 마. 도망가지 마. 이 자리에서 약속할게. 우리는 승리하고 또 승리해서 다 함께 고향으로 가게 될 거야.”

어린 집사가 재빨리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눈짓했다. 눈짓만으로 알아채지 못할까봐 입술도 위아래로 비틀었다. 다행히 어린 집사의 의도를 알아챘다.

“우와아! 로벨 로드릭 만세! 볼탄 반도 만세!”

“아군에게 승리를! 적군에게 죽음을!”

로벨이 심어놓은 자신감이 허풍쟁이의 고함을 촉매로 터져 나왔다. 전쟁의 공포를 살인의 흥분으로 바꿔서 창을 흔들고 방패를 두드리며 함성 질렀다. 총명한 기사와 노련한 용병은 사기가 충만할 때를 놓치지 않았다.

“롱보우를 준비해라. 첫 공격을 저지해야 한다.”

“과묵한 몬트! 적이 측면을 노릴 거야! 외곽을 돌면서 경계해!”

“겁쟁이 데비! 이놈아! 너까지 흥분하면 어떡하냐! 대포 준비해!”

세 자릿수의 사람이 하나의 목적으로 모이면 한 마리의 생물과 같다. 그 생물이 ‘군대’란 이름을 가졌다면 필히 강한 발톱과 뾰족한 송곳니가 있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발톱은 10문의 대포와 100발의 쇠뇌였고, 송곳니는 기사와 기병으로 구성된 총 11명의 기마부대였다.

“적이 온다!”

“볼프 후작군이 이동한다!”

검은 숲을 호령하는 두 마리의 맹수가 마침내 정면으로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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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가 충만해서 함성을 지를 때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피를 뿌릴 것 같지만, 현실은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은 창칼로 무장하고 수백 야드를 질주해서 싸우지 못한다. 체력이 우수한 병사라도 그리 싸우면 적의 전열 앞에서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검은 숲 회전은 영웅소설로 전쟁을 배운 자라면 답답할 만큼 느리게 진행되었다. 수적으로 유리한 볼프 후작군이 산보하듯 천천히 다가왔다.

양측에 거리가 300야드에 접어드는 순간, 로벨의 포병대가 굉음을 토해냈다.

콰콰광-!

볼프 후작의 주력군 일부가 주먹만한 돌덩이에 박살났다. 직격당한 병사는 신체의 일부가 완전히 사라졌고, 깨진 파편에 맞은 병사는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나자빠졌다. 그러나 볼프 후작은 멈추지 않았다.

소구경 팔코넷과 개인화기에 가까운 핸드 케논으로 1천 명의 적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설령 제자리에서 가만히 맞아준다 해도 청동화기 특성상 3발 이상 연속으로 쏠 수 없었다. 평지에서 대포의 이점은 크지 않았다.

양측의 거리가 150야드로 접어들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롱보우!”

“크로스보우!”

각 부대의 사수가 앞으로 나와 조상의 지혜와 장인의 정성이 깃든 투사병기를 겨냥했다.

활과 쇠뇌의 장단점은 분명했다. 곡사로 쏠 수 있는 활은 면(面)이었고, 직사에 강한 쇠뇌는 선(線)이었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긴 화살에 산발적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정면에서 날아드는 짧은 쿼럴에 선두가 무너졌다. 어느 무기가 위력적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양쪽 다 똑같은 무기를 사용하니까.

양측의 거리가 50야드가 되었다. 눈이 좋으면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살에 맞아 쓰러진 전우. 햇살보다 뜨거운 피. 찢어지는 비명과 의미 모를 욕설이 투구 안에서 메아리쳤다. 전쟁의 공포가 비로소 피부에 와 닿았다.

“파이크!”

“파이크!”

펄프 대장이 좌우로 뛰어다니며 고함쳤다.

결혼식을 앞둔 형을 대신해 참전한 14살 소년병은 훈련받은 대로 창을 내밀었다. 창끝이 안쓰럽게 흔들렸다.

오늘이 7번째 전투인 33살의 베테랑 용병은 창보다 욕이 대단했다. 달필가도 받아쓰기 힘든 장문의 욕설을 퍼부었다.

고귀한 기사 나리와 몸값 높은 고참 용병은 어느새 창벽 뒤로 이동했다. 적과 아군 사이에는 장막처럼 드리운 도합 500개의 창대뿐이었다. 펄프 대장이 짧고 굵게 명령했다.

“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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