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동정심
193화. 동정심
신왕파와 구왕파의 첫 전투로 꼽히는 까마귀 성 공방전은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볼프 사트로 후작의 철사자 용병단 120명은 괴멸했고, 망치성의 가스터 남작군 150명은 절반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로벨 로드릭 후작은 단 한 번의 전투로 200명의 적을 격파한 것이다.
“그래도 아직 1,200명 이상 남아 있어요. 붉은 수염 용병단과 상어 용병단 2개가 남아있고요.”
“상어 용병단?”
로벨은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평생 용병 노릇을 한 펄프 대장이 설명했다.
“그놈들은 말이 좋아 용병이지, 사실 해적입니다.”
“...해적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옛날에 북해에서 깃발 좀 날렸는데, 주드 맥켈런 남작의 상선을 건드리는 바람에 배를 몽땅 잃고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재수가 없었네. 아니지, 좋은 건가?”
북해의 사자 맥켈런 남작을 건드린 것은 운이 나쁘지만, 그러고도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었다.
“아니지요. 그 결과 영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최악일 겁니다.”
구릉성의 마튼 경이 연륜을 돋보이는 아부를 던졌다. 아직 젊은 브릭 경과 메튜 경이 입모양으로 감탄하며 열심히 되뇌었다.
로벨은 헛기침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늑대성 집무실 크기의 육각막사에 기사와 기사 종자와 용병들이 가득 차서 쇠 냄새와 땀 냄새를 풍겼다. 전쟁의 냄새이기도 했다.
“처음에 말했듯이 이제 시작이오. 볼프 후작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오.”
“그래도 뜨거운 맛을 보았으니 한동안 숙고하지 않겠습니까?”
“아뇨? 그렇지도 않을 걸요?”
마녀 키르케가 불쑥 말했다. 최근에 합류한 기사와 기사 종자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로드릭 가문에 적응이 끝난 대다수 가신은 자연스럽게 질문했다.
“어째서 말인가?”
“1,200명의 사람과 100마리의 말이 먹어치우니까요.”
“아, 그렇지. 초봄부터 싸우기 시작했으니 식량 사정이 좋을 리 없지. 농민을 긁어왔으니 봄농사도 시원찮을 테고...”
“그럼 또 덤비겠군.”
로벨은 마녀에게 작전회의를 맡기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낮 동안의 피로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절벽 위에 대포를 어쩌지 못하니까, 아마도 우회할 거예요.”
“어디로?”
북쪽은 검은 숲과 맞닿아 진입로가 없고, 동쪽은 굳건한 성문과 가파른 계곡이 있고, 남쪽까지 돌아갈 바에 그냥 포스트 포레스트로 진격할 것이다. 로벨이 전군을 이끌고 서쪽에 포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야 당연히 동쪽이죠! 그곳 말고 없잖아요?”
로벨은 마녀의 자존심을 위해 생각하는 척을 조금하고 반박했다.
“제임스 공작과 도너반 자작의 주력군이 수비 중이야. 성벽과 계곡이 있으니 여기보다 뚫기 어려울 텐데?”
“아니죠. 아니죠.”
마녀가 검지를 세우고 까닥였다. 누구한테 배운 제스처인지 궁금했다.
“그쪽은 병사가 100여 명밖에 안 돼요. 패잔병이라 싸우고 싶어 하지 않고요. 그리고 하나 더! 이곳에는 있지만 성문에는 없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성문 쪽이 더 쉽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게 뭐야? 아, 대포?”
“그것보다 훨씬 무서운 거요.”
로벨은 제임스 공작이 가지지 못한 ‘무서운 무기’가 뭘까 생각했다. 마녀 키르케가 히쭉이며 말했다.
“기사님이요.”
“...뭐?”
그 ‘기사님’이 포괄적인 신분 계층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히히힛!’ 웃으며 설명했다.
“성문에는 로벨 로드릭이란 무시무시한 기사님이 없어요. 그러니까 더 쉽죠.”
브릭 경과 매튜 경이 다시금 소리 내어 감탄하고 열심히 암기했다. 오랫동안 주군을 보필한 마녀가 시골에서 올라온 늙은 기사보다 한 수 위였다.
하지만 마녀 키르케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볼프 후작과 도트넘 백작도 그리 생각했다. 로벨의 무서움은 그랜드 챔피언의 무용만이 아니었다. 군 전체의 사기, 치밀한 전략과 전술, 그리고 옛 신이 가호하는 행운까지 포함되었다. 가히 정예 용병 100명 이상의 전력이었다.
로벨은 어색한 표정으로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 말이 맞다 치고, 그럼 어떡하지? 제임스 공작을 지원할까?”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어요.”
로벨은 마녀의 미소를 불안하게 보았다. 수염은 없지만 꼭 고양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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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의 예상이 적중했다. 볼프 후작은 새벽 일찍 군사를 움직여 대협곡을 건너갔다. 그들 딴에는 최대한 조용히 행군했으나, 네 자릿수의 병력이다 보니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로벨은 절벽 위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는 볼프 후작군을 지켜보았다. 어스름한 새벽 그림자 아래 서너 갈래로 흩어져 협곡을 넘어가는 인마가 인상적이었다.
“날씨가 좋아.”
로벨은 모닝스타의 갈기를 쓸어 만졌다.
모닝스타는 겁 많은 플레일에 비해 조용했다. 싫증내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봄을 머금은 새순을 우물거리며 사그라지는 별을 바라보았다. 로벨은 그런 모닝스타가 마음에 쏙 들었다.
“아침 해가 뜨면 공격할 모양이야.”
“푸르릉-!”
모닝스타가 콧바람을 뿜었다. 자기 생각도 그렇다는 것인지,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 조용하라는 것인지 헷갈렸다. 로벨은 좋은 쪽으로 받아들었다.
그때, 절벽길을 따라 브릭 경이 올라왔다. 브릭 경의 말은 로벨의 말과 달리 평범한(?) 전투마라 가파른 경사를 오르지 못하고 저 아래쪽에 퍼져있었다. 사실 브릭 경도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주군! 적의 병력을! 확인했습니다! 저희 쪽에! 2개 용병단! 300명 남기고! 주력군이! 모두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숨부터 고르시오.”
로벨은 다시 볼프 후작군을 바라보았다. 숫자와 방향을 알았으니 남은 것은 대응이었다.
“호른 경과 켈트 경은?”
“후우. 후우.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입니다.”
볼프 후작의 작전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2개 용병단이 수비하면 기세가 오른 로벨 로드릭 후작군이라도 쉽게 돌파하지 못한다. 그 사이 주력군으로 까마귀 성을 점령하면 볼프 후작군의 전략적 승리였다. 3배의 병력차 때문에 알아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볼프 후작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로벨의 무적무패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이다.
“좋소. 출발하시오.”
로벨의 배려로 숨을 고르던 브릭 경은 재차 떨어진 명령에 울상이 되어 절벽을 내려갔다. 로벨은 너무 심했나 싶어서 조용히 따라갔다.
여름의 문턱을 넘지 않은 늦은 봄은 건조하고 쾌적했다. 땀이 많이 나지 않고, 음식이 쉽게 상하지 않았다. 장거리 행군에 적합했다.
“전군! 이동한다! 전군! 이동한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이 분주해졌다. 새벽녘에 싸둔 군장을 짊어지고 천막을 걷어서 수레에 올렸다.
로벨과 대면한 붉은 수염 용병단과 상어 용병단은 바짝 긴장했다. 그들의 목적은 주력군이 성을 함락할 때까지 로벨 로드릭 후작군의 발을 잡아두는 것이다. 그 목적은 절반만 달성할 수 있었다.
로벨은 볼프 후작을 뒤쫓지 않았다. 그러나 볼프 후작 또한 까마귀 성을 점령할 수 없었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계곡을 건너간 볼프 후작군을 무시하고 북쪽으로 행군했다. 목적지는 분명했다. 지금쯤 텅 비어있을 떡갈나무 성과 블랙우드 시티였다.
볼프 후작과 북방의 기사들은 로벨의 주특기가 빈집털이라는 것을 진작 깨우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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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모닝스타의 어깨 높이 밖에 안 오는 자그마한 당나귀 위에서 투덜거렸다.
“에이, 빈집털이라니요? 꼭 도둑놈 같잖아요?”
로벨은 신이 나서 콧노래 부르는 외팔이 더치와 야유하는 허풍쟁이 제이콥과 대포를 끌면서 오만가지 욕을 쏟아내는 겁쟁이 데비를 차례를 보았다.
“그럼 뭐라고 해?
“기습전? 전격전? 의표를 지르는 깜짝 작전?”
“그게 그거지.”
로벨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바이저를 내렸다. 신령한 투구는 전투 중에도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하지만, 지금처럼 주위를 살필 때도 쓸모가 많았다.
“지금쯤 쫓아오고 있겠지?”
“뭐, 그렇겠죠? 블랙우드 시티를 뺏기면 까마귀 성을 차지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언제가 좋을까?”
어린 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옛 신은 공평해서 어린 집사에게 여러 재능을 주었지만, 단 한 가지, 군사적인 재능만은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본인이 관심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린 집사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볼프 후작군의 추격속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는 전쟁경험이 풍부한 펄프 대장이 정확했다.
“협곡을 도로 넘어와 전열을 갖추려면 4, 5시간이 족히 걸릴 겁니다.”
“고작이요?”
어린 집사가 질겁해서 반문했다. 펄프 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고작이 아니오. 저쪽은 오랜 전쟁으로 지친데다 부상병이 많아 속도가 느리오. 오늘은 한나절이지만, 내일은 하루가 되고, 모레는 이틀거리가 벌어질 거요. 본대로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오.”
“그럼요?”
“우선 정예병을 추려서 보낼 것이오. 최소한의 무장만 챙겨서 쫓아오면, 아마도 점심때쯤 대가리가 보일 거요.”
로벨도 그리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점심이고, 후미에서 뿌연 연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펄프 대장, 시작해.”
마녀 키르케의 작전은 블랙우드 시티를 속전속결로 점령하는 것이지만, 로벨은 꼬리를 달고 검은 숲을 횡단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적의 주력군을 격파하면 성과 도시는 저절로 얻을 수 있었다.
로벨의 작전은 이를 갈며 쫓아오는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괴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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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는 변수가 많아 ‘반드시’라 단정할 수 없지만, 일반론에 입각할 때 공격보다 수비가 유리한 것은 분명했다.
평소라면 뒷짐 지고 뛰어넘을 나무울타리도 빗발치는 화살 아래에서는 철옹성이 되고, 신발이 조금 젖을 뿐인 작은 물웅덩이도 빼곡히 늘어선 창벽 아래에서는 생사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검은 숲의 풍부한 자재를 아낌없이 사용해 언덕과 언덕 사이에 바리게이트를 쌓고 양쪽에 포병과 궁병을 배치했다.
로벨을 저지하기 위해 10마일을 쉬지 않고 쫓아온 지프 모몬트 경과 기사들은 고지대를 점령한 장엄한 살인병기에 화급히 정지했다.
“어느 틈에!”
북방의 국경을 지키는 지프 모몬트 경은 용맹했다. 병력, 무장, 지형까지 모두 열세인 상황에서도 전의를 잃지 않았다. 흥분한 말을 제자리에서 돌리며 적장을 찾았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백작 어디 있는가!”
로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대답하지 못했다.
로벨은 7명의 기사와 3명의 기마 용병을 이끌고 언덕을 빙 돌아 숨을 고르는 지프 모몬트 경의 배후를 노리는 중이었다. 앞에서 아무리 불러봤자 당연히 소용이 없었다.
“목표는 기사야! 병사들은 그냥 무시해!”
로벨은 해비 랜스를 랜스 레스트에 걸고 선두로 뛰쳐나갔다. 모닝스타는 명마의 혈통이 부끄럽지 않게 네 다리를 쭉쭉 뻗었다. 로벨의 승마술에 감탄한 기사와 용병들은 죽을힘을 다해 채찍질했다. 검은 숲 한 켠이 말발굽 소리에 진동했다.
“우아앗! 로벨 로드릭이다!”
“언제 뒤에서! 사, 살려줘!”
로벨의 웅장한 말과 빛나는 투구를 알아본 볼프 후작군은 사색이 되어 흩어졌다. 공명심이 넘치거나 용기가 지나친 일부 병사가 창을 꼬나들었지만 겔트 경과 호른 경이 3피트 이상 더 긴 랜스로 가볍게 치워버렸다. 고작 10필의 기마병에 100명의 정예부대가 쪼개졌다.
“로벨! 로벨 로드릭 경!”
“오랜만이오! 모몬트 경!”
로벨의 인사는 과격했다. 해비 랜스를 곧게 뻗어 고짓 플레이트를 정확히 후려쳤다. 지프 모몬트 경은 지난날 그랜드 토너먼트에서 챔피언에 대적해야 했던 숱한 기사들에게 동정심을 보냈다. 그리고 하필 실전에서 맞닥뜨린 자기 자신을 가장 동정했다.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