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92화 (192/605)

192화. 기세

192화. 기세

까마귀 성은 검은 숲, 포클랜드, 볼탄 반도를 나누는 대협곡에 위치했다.

북쪽으로는 검은 숲의 장엄한 원시림이 늘어서 있고, 남쪽으로는 포스트 포레스트의 광활한 농토가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네일 공국까지 이어지는 북부대로가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까마귀 성 서쪽 절벽 아래에는 로벨 로드릭 후작군 500명이 포진하고 있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끌며 100동이 넘는 천막 사이를 거닐었다. 어린 집사가 못마땅하다 못해 분통이 난 얼굴로 따라왔다.

“치졸한 작자가 무례하기까지 하네요! 으으윽! 화딱지가 나요!”

“치졸해? 무례해?”

“그렇잖아요? 충성서약을 핑계로 영주님을 끌어들인 것도 모자라서 성 밖에 방치하잖아요.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가신인지 모르겠네요!”

“몸이 안 좋아서 못 온다잖아. 그리고 저 조그만 성에 우리 군이 어떻게 주둔해?”

“사람이 너무 좋으면 바보가 돼요. 도너반 자작의 속셈을 알고 계시잖아요. 어차피, 음,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사람이라 이용한 거죠.”

로벨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어린 집사는 몇 마디 더 구시렁거렸지만, 그래도 늑대성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국왕 폐하와 에릭 공작의 명령도 있었고, 제임스 공작과 도너반 자작이 불쌍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 잘만하면 까마귀 성을 꿀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까마귀 성을 차지하면 이미 소유한 가시나무 성과 연계해서 검은 숲 남동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단순히 땅 크기만 해도 과거의 에릭 공작이나 볼프 후작과 견줄 만 했다.

‘우리 영주님이 진짜 제후가 되는 거지! 이히히힛!’

로벨은 갑자기 히쭉히쭉 웃기 시작한 어린 집사를 경계하며 지휘막사에 도착했다.

“후작님이 오셨습니다.”

“주군! 어서 오십시오!”

육각막사에 로벨의 기사와 기사의 기사와 기사 종자가 모두 모여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32명이었다.

로벨은 반짝반짝 빛나는 갑옷 사이를 지나 제일 안쪽에 앉았다. 직위가 높고 친분이 두터운 호른 경, 브릭 경, 켈트 경 등이 가볍게 목례했다. 오늘이 3일째라 장황한 소개는 생략했다. 성질이 급한 바위성의 켈트 경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볼프 후작의 군사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망치성의 가스터 남작이 합류해서 총 1,500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군의 3배가 넘습니다.”

그러자 겁 많고 소심한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주군, 이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철수하시죠.”

“그렇습니다! 에릭 공작도 아무 지시가 없지 않습니까!”

“고향에서 봄 농사가 한창인데... 이 먼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가문의 재산인 병사와 말을 이끌고 참전한 기사들이다. 돈이 안 되는 전쟁에서 몸을 사리는 것은 당연했다.

호른 경이 손바닥을 내밀어 기사들을 진정시켰다.

“포클랜드 시티가 심장이고, 프란시스 시티와 사트로 시티가 팔과 다리라면, 이곳 까마귀 성은 경추라 할 수 있소. 이 성을 빼앗기면 포클랜드 지방과 볼탄 반도가 단절되오. 그리되면 볼프 후작을 저지하기가 더욱 힘들어지오.”

호른 경의 말이 끝나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쇳가루와 말똥이 가득한 기사라도 지도는 볼 줄 알았다. 가시나무 성의 브릭 경이 시기와 질투를 담아 말을 쏘았다.

“이곳을 ‘왜’ 지켜야 하는지는 알겠소. 그럼 ‘어떻게’ 지켜야 할지도 말할 수 있소?”

“그것은...”

호른 경은 로벨의 눈치를 보았다. 전쟁소설이나 영웅소설에서는 기가 막힌 전략전술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뚝딱뚝딱 물리치지만, 현실에서 가장 훌륭한 전략은 군대가 굶지 않는 것이고, 가장 위대한 전술은 애당초 싸우지 않는 것이다.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로벨은 무명이 드높은 무적무패의 기사답게 신중히 대답했다.

“잘.”

“...예?”

나이 어린 기사가 반문했다. 로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잘 싸워봅시다.”

@

로벨 로드릭 후작군이 숫자는 적어도 까마귀 성과 절벽을 등진 만큼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로벨은 겁쟁이 데비의 포병대와 솜씨 좋은 궁수를 절벽 좌우에 배치하고, 과묵한 몬트의 기병대와 젊은 기사 종자를 모아 측면을 보호했다.

“적군이 300야드까지 접근하면 포격하고, 150야드까지 접근하면 사격하시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구릉성의 마튼 경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로벨의 기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그만큼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아군의 머리 위로 포탄과 화살이 날아갑니다. 오폭이 나면 피해도 피해지만, 전투경험이 부족한 농민병이 집단 패닉을 일으킬 겁니다.”

그러나 실전경험을 따지면 로벨과 로벨의 부하들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로벨은 임시로 만든 까마귀 성 지도를 가리켰다.

“정면에는 울프 용병단이 포진할 것이오. 경이 우려한 농민병은 숲 외곽에 배치해서 예비대로 활용할 것이오.”

로벨 로드릭 후작의 주력군은 어디까지 울프 용병단이었다. 기사들은 자신의 병사가 안전한 곳으로 빠지자 내심 기뻐했다. 로벨은 몸을 사리는 기사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주군이라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리 싸워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첫 전투에서 적의 기세를 꺾고 자신감을 심어줘야 해.’

로벨은 어깨가 무거웠다. 값비싼 필드 아머가 육중한 컴포지트 아머보다 부담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돌과 나무를 깎아 싸우던 고대부터 쇠와 화약을 두드려 싸우는 현대까지 변하지 않는 상식이 있었다. 첫 번째는 ‘고지를 점령할 것’이고, 두 번째는 ‘양쪽에서 포위할 것’이다.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두 가지 상식을 모두 갖추었다.

“쏴라!”

콰콰과광-! 콰광-!

5문의 팔코넷이 큰불을 뿜고, 이어서 5문의 핸드 캐논이 작은 불을 뿜었다. 전쟁경험이 없는 어린 기사 종자는 포성에 놀라 귀를 막았다.

“아처!”

그러나 모두가 소중한 귀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바레스트의 버트를 어깨에 고정한 울프 용병단 쇠뇌병과 롱보우에 화살을 먹인 바위성 사냥꾼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애꾸눈 볼포스는 매캐한 화약 연기에 하나 남은 눈을 깜박이며 절벽 반대쪽을 보았다. 펄프 대장이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좌우로 흔들었다.

“발사!”

앞서 떠나간 크고 작은 포탄을 길고 짧은 화살이 쫓아갔다.

볼프 후작의 선봉부대, 잉그비아 왕국의 철사자 용병단과 망치성의 가스터 남작군은 절벽 양쪽에서 쏟아지는 돌덩이와 쇠붙이가 달갑지 않았다. 욕설과 비명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으아앗! 살려줘!”

“내 다리! 내 다리가!”

로벨은 세 번째 공격을 끝낸 절벽 위 포병부대를 힐끔 보고, 다시 50야드 앞까지 접근한 적병을 보았다. 잉그비아 왕국에서 숱한 내전을 치른 철사자 용병단은 노련했다. 킬 존(Kill Zone)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최단시간에 울프 용병단 주력부대에 접근했다. 고지대에서 쏟아 붓는 십자포격은 효과적이지만, 아쉽게도 화력이 부족했다. 세 차례 공격에도 20여 명의 사상자밖에 내지 못했다.

‘그래도 기세가 꺾였어.’

로벨은 모닝스타를 앞으로 전진시키며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파이크맨!”

코골이 바디가 붉은 천이 달린 롱 파이크를 앞으로 내밀었다. 새파란 하늘에 새빨간 깃발은 유난히 눈에 잘 띄었다. 울프 용병단의 파이크맨이 일제히 창날을 기울였다.

길이가 20피트에 이르는 장창은 길이만큼이나 무게가 상당했다. 창 머리를 쭉 내밀고 적이 올 때까지 버티는 장창병은 정예 중에 정예였다.

“오, 온다!”

“버텨라!”

철사자 용병단은 화살과 포탄에 깨진 방패를 팽개치고 창벽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지만, 병사의 무기가 통일될 리 만무하다. 그냥 파이크라 해도 창대의 길이와 창날의 폭이 제각각이다. 그러한 불규칙성은 첫 접전에서 이점이 되었다. 창날을 쳐내고 기어들어온 용병 중 상당수가 창 그림자에 숨어있는 짧은 창에 희생되었다.

“전진! 전진! 물러나면 화살밥이 된다! 전진해라!”

철사자 용병대장이 기사처럼 롱소드를 휘두르며 지휘했다. 어쩌면 잉그비아 왕국의 몰락 기사일지도 모른다. 북방 왕국에서는 성공을 위해 명예를 버리는 기사가 많다고 들었다.

“골치 아픈데...”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넣고 땅에 꽂아 놓은 해비 랜스를 잡았다. 로벨의 기사 종자 역할을 수행하는 어린 집사가 가장 먼저 알아챘다.

“영주님? 설마...?”

로벨의 행동에는 설마가 없었다.

“가자! 모닝스타!”

“이히히힝-!”

하프 유니콘 모닝스타는 주인의 요구에 120% 응했다. 제자리에서 도움닫기 하더니 코골이 바디의 정수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머, 뭐야!”

“기사 나리다! 창 내려! 창 내려!”

코골이 바디가 화급히 명령했다. 그러나 창을 내릴 필요 없었다. 모닝스타는 창대 사이로 껑충껑충 뛰어서 질주했다. 말이 아니라 사슴이나 노루 같았다. 풀 플레이트 차림의 기사를 태우고 하는 짓으로 기적이었다.

‘역시 명마로구나!’

로벨은 어린 집사의 속을 뒤집는 태평한 감탄 후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시야가 전장 곳곳으로 확장되었다. 어린 집사가 ‘이 망할 영주님아! 가지 마요!’ 외치는 입모양부터 철사자 용병대장의 경악하는 표정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속도를 올려! 일직선으로!”

기사가 기마돌격 할 때는 흔히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투마의 격렬한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흡수하며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벨의 랜스 차칭은 기마돌격의 정수였다.

“어, 어어, 안ㄷ...!”

로벨의 기술과 모닝스타의 속력이 합쳐진 해비 랜스의 창끝이 용병대장의 흉갑을 찌그러트렸다. 판금이 우겨지고,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러졌다. 북해를 건너며 풍운을 꿈꿨을 용병대장은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비행을 체험하며 영영 떠나갔다.

“아앗! 대장!”

“으아악! 대장이 당했다!”

로벨은 적 대장을 일격에 날려버리고 계속 달렸다. 투지가 넘쳐서가 아니었다. 적진 한복판이라 멈추는 순간 위험했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보는 기사와 용병들 눈에는 주체 못할 힘으로 전장을 휘젓는 투신(鬪神)처럼 보였다. 머를 브릭 경은 끓어오르는 전의를 참지 못해 기어이 롱소드를 뽑아 쳐올렸다.

“주군을 따르자!”

흥분은 공포만큼이나 전염성이 강한 감정이다. 머를 브릭 경의 외침은 로벨 로드릭 후작군 전체의 외침이 되었다.

“영주님을 따르자!”

“기사 나리를 따라가라!”

“돌격! 돌격하라!”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가장 먼저 뛰쳐나왔다. 지휘관을 잃고, 사기에 압도당한 철사자 용병을 하나씩 후려 팼다. 머리가 쪼개지고 빗장뼈가 부서지는 잔혹한 공격이지만, 안타깝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로 코골이 바디를 비롯한 100여 명의 울프 용병단이 비슷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뒤늦게 망치성의 가스터 남작군이 도착했으나,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손쓰지 못했다.

“남작님, 이미 늦었습니다.”

“...제기랄. 본대까지 후퇴한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