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폭풍전야
191화. 폭풍전야
봄은 알게 모르게 찾아와 정신 차리고 돌아보면 어느덧 곁에 있었다.
동구 밖에는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진창이 생겼고, 처마 위에는 집 떠난 철새가 슬그머니 돌아와 새집을 놓았다.
수레를 끄는 상인은 무심코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쳤고, 새끼 양을 쫓아가는 꼬마는 따뜻한 햇살에 뽀얀 콧물을 훔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늘어트리고 새로 만든 마을도로를 걸었다. 평평한 돌바닥에 딱딱한 말발굽이 부딪치자 오르간처럼 맑은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따각- 따각-
마녀 키르케는 축축한 눈덩이를 점잖은 이야카 머리 위에 올렸다. 이야카는 나이 많은 인간 누이의 장난에 눈을 흘겼지만 자꾸 반복하자 포기하고 내버려두었다. 잠시 뒤, 눈사람 모자를 쓰고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평화롭네요.”
“응. 좋아.”
어린 집사가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했다. 리암 수사, 페리 피터 행정관을 비롯한 새로운 관리자가 자리 잡아 업무량이 대폭 줄었다. 아침에 산책하고 저녁에 맥주 한잔 할 여유가 생겼다. 여담으로, 페리 행정관이 어린 집사의 지난 업무량을 보고 기겁해서 관료 학대라 외치기도 했다. 사실 어린 집사도 조금씩 늘어나서 감당이 된 것이지, 울프 용병단, 소금광산, 식품공장, 교역선, 보험, 시장과 상회업무가 한 번에 주어졌으며 진작 때려치우고 야반도주했을 것이다.
“포장도로 공사는?”
“로드릭 항에서 시장까지는 연결됐어요. 저 개울에 구름다리를 놓고, 노스폴드 시티에서 이쪽으로 오기만 하면 끝나요. 아마... 올해 여름이면 되지 않을까요?”
“여름...”
로벨은 늑대의 왕이 한 말을 기억했다. 올해도 대단히 격렬한 한 해가 될 것이다.
공사가 끝난 도로를 가장 먼저 이용한 것은 푸른 고래 호와 청새치 호의 이안 선장이었다. 이안 선장은 선원과 노예를 30명 동원해 에르나 왕국산 청동대포를 가져왔다. 3파운드 포탄을 쏠 수 있는 소구경 팔코넷 5문이었다.
로벨은 청동대포를 늑대성 연병장에 진열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옛날 팔콘 요새에서는 대포 3문 때문에 고전했었는데, 이제 우리가 5문을 가지게 됐어!”
겁쟁이 데비 이하 포병대가 할 일이 생겼다. 소구경이라 해도 대포였다. 핸드 캐논과 달리 수레로 끌어야 했다. 힘 좋은 짐말이 5필이나 배치되었다. 울프 용병단 12개 소대 중 가장 돈을 많이 잡아먹는 소대라 어린 집사가 싫어했다.
아무튼, 봄은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름다웠다. 어쩌면 잔혹한 여름을 앞둬서 그리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말이다.
“아앗! 불길한 소리 하지 마세요!”
@
전쟁의 불씨는 검은 숲에서 나타났다.
제임스 가문의 기사가 사냥 중 숲지기를 해친 사건이 발생했는데, 하필이면 사트로 가문의 사람이라 시비가 발생했다. 기사의 자존심이 가미되자 사소한 말다툼은 피를 보는 결투가 되었고, 수십 명 단위의 전투가 되었다.
알버트 제임스 공작은 잃어버린 땅과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봉신들을 소집했고, 볼프 사트로 후작은 겉보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전쟁을 막아야 하는 국왕은 본인 앞가림도 못하고, 국왕을 보필하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와트 마르셀 백작은 서로를 견제하느라 북방의 일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할 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2년 전 실종된 왕이 멀쩡히 살아서 검은 성에 나타났다.
로벨은 어이가 없어서 반문했다.
“누가 나타나?”
“진짜 왕이요!”
“...살아 있었어?”
세상을 단순하게 사는 로벨이 그러하니, 생각이 많은 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난 2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보다 새 국왕과 새 국왕의 측근들 행보가 궁금했다.
열흘이 채 지나지 않아 볼프 사트로 후작을 중심으로 구(舊)왕자파 세력이 재집결하기 시작했다. 그 대부분이 에릭 공작과 마르셀 백작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북방 영주들이었다.
포비아 왕국이 북부와 남부로 갈라져 피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의 제3차 볼탄 반도 전쟁이며, 왕좌를 놓고 다투는 제2차 왕위계승전쟁이었다.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오자 볼탄 반도의 최전방 늑대성도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로벨의 지시로 무기와 식량을 비축하고, 울프 용병단과 농민병을 훈련했다. 로벨 휘하의 봉신들까지 총 병력 800명이었다. 지난날과 비교할 수 없는 대병력이었다.
@
로벨은 필드 아머로 몸을 꽁꽁 감싸고 모닝스타를 몰아 언덕을 내려갔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고삐를 잡으려 했지만, 성질 더러운 하프 유니콘은 허풍쟁이의 머리를 깨물어 버렸다. 인간과 말의 무시무시한 싸움이 벌어졌다.
“저 고약한 놈!”
“제 주인이 아니면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니까.”
로벨은 벌게진 얼굴로 쒸익-! 쒸익-! 거리는 허풍쟁이에게 사과의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위로할 시간이 없었다. 성 아래에는 210명의 울프 용병단이 사열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 나리께서 오셨다!”
“정렬해! 정렬해라!”
펄프 대장 이하 소대장이 휘하 병사를 정렬시켰다. 무기도, 갑옷도, 덩치도 제각각 다르지만 행동만큼은 통일되었다. 길고 짧은 창을 높이 세우고, 크고 작은 방패를 앞세우고, 크로스보우와 핸드 캐논을 어깨에 걸쳤다. 과묵한 몬트의 기마소대가 깃발을 흔들고, 겁쟁이 데미의 포병대가 장전봉을 옆구리에 끼었다.
로벨은 모닝스타를 몰아 용병 앞을 지나갔다. 위대한 기사이자 고귀한 고용주가 가까이 오면 신입 용병은 바짝 긴장해서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펄프 대장이 새로 맞춘 셀릿을 고쳐 쓰고 망토를 추슬렀다.
“마로드, 어떻습니까?”
로벨은 눈을 부릅뜨고 꿈쩍하지 않는 용병들을 한 차례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훌륭해.”
“큰돈을 지불한 가치가 있어야죠.”
어린 집사가 구시렁거렸다. 세 자릿수 용병단을 유지하는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갔다. 소금광산과 식품공장의 수익이 전부 용병급료로 사용되었다.
로벨을 따라 사열식에 참가한 호른 경과 기사들도 감탄했다. 가시성의 바이란 경은 몇 년 새 몰라보게 커진 주군의 군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숫자는 적지만 기병과 포병을 운영하는 군대였으니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로벨은 끝에서 끝으로 이동한 후 말머리를 돌려서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경들이 볼 때 어떻소?”
호른 경이 산뜻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이 정도면 볼프 후작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주군의 땅을 넘보지 못할 겁니다.”
구릉성의 마튼 경과 늪지성의 메튜 경도 적극 동조했다. 그러나 좋게 말하면 냉철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냉소적인 켈트 경이 한마디 했다.
“우수한 병사도, 훌륭한 무기도 어디까지 상대적인 겁니다. 볼프 후작 또한 지난 수년간 철저히 준비했을 겁니다. 과신은 금물입니다.”
로벨의 열렬한 추종자인 머를 브릭 경이 욱해서 바이저를 쳐올렸다. 그러나 여러 기사와 수많은 용병 앞에서 싸울 만큼 분별없지 않았다.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예정된 훈련을 지시하고 기사들과 함께 구경했다.
“옳은 말이오. 적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겠지.”
@
그 기회는 로벨의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성 조지아의 축일을 하루 앞두고, 제임스 공작이 1,000명의 군대로 블랙우드 시티를 공격했다. 영지의 절반을 잃은 것치고 대단한 군세였다. 그러나 켈트 경의 말대로 볼프 후작은 철저히 준비했다. 도시 안에는 볼탄 반도의 군사 300명을 배치하고, 도시 밖에는 철사자 용병단을 비롯한 3개 용병단을 배치해서 역공했다. 전쟁은 아흐레 동안 진행되었으며, 끝내 제임스 공작의 패배로 끝이 났다.
제임스 공작은 패잔병을 수습해서 까마귀 성으로 후퇴했다. 떡갈나무 성을 비롯한 제임스 가문의 영지는 볼프 후작 손아귀에 들어갔다. 봄 농사가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여름이 아니잖아?”
로벨은 검은 숲에서 온 전령의 보고를 받고 속은 기분이 되었다. 어린 집사는 반대로 기뻐했다.
“우리가 아니라서 다행이죠. 저쪽에서 치고받고 싸우다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다.”
호른 경이 딱 잘라 부정했다.
“검은 숲 전체가 볼프 후작과 구(舊)국왕파 손에 들어갔습니다. 볼탄 반도 북부의 사트로 영지와 합치면 포비아 왕국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마녀 키르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커요?”
“그뿐만이 아니다. 북해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니 잉그비아 왕국과 네일 공국의 조력을 끌어들일 것이다. 거기에 검은 숲의 식량과 목재, 볼탄 반도의 병사와 철광을 가졌으니 국왕 폐하와 에릭 공작을 위협하기 충분하다.”
“그리고 정통성을 갖춘 옛 왕이 있어.”
로벨은 턱을 괴고 생각했다. 전쟁은 벌써 시작되었고, 전황은 좋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뾰로통해져서 투덜거렸다.
“에잇! 멍청한 제임스 공작!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왜 해가지고!”
기사와 마녀와 용병이 모두 동의했다. 그중 용병은 갑작스러웠다. 로벨과 로벨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온 늙은 용병을 뒤늦게 발견했다.
“우아악! 깜짝아!”
“펄프 대장이잖아? 언제 왔어?”
“...여름이 아니잖아? 하실 때부터 있었습니다.”
펄프 대장은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집사와 마녀는 미안한 감정을 담아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펄프 대장은 매스껍다는 표정으로 응수한 후 방문목적을 밝혔다.
“영주님, 까마귀 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도너반 자작의?”
로벨은 최측근들을 돌아보았다.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뚱하게 말했다.
“흥! 보나마나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것이겠죠!”
그 외에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제임스 공작의 봉신도 아니고, 그쪽 전쟁에 끼어들 이유가 없어요.”
“그치만 후작님은 신왕파잖아요? 구왕파가 득세하면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주군, 도너반 자작과 친분이 있는 것은 알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신중하게 결정해주십시오.”
로벨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 전쟁은 얽힌 세력이 많아 너무 복잡했다.
“일단 만나보자.”
@
까마귀 성의 전령은 죠드 도너반 자작의 조카이자 기사 종자인 몰트 도너반이었다. 올봄에 22살이 되었는데, 아직까지 기사 서임을 받지 못한 특이한 기사 종자였다.
“늑대성의 주인을 뵙습니다.”
로벨은 기사 종자 몰트의 인사를 받고 메인 홀 상석의 영주 의자에 앉았다.
“도너반 자작은 잘 지내시지?”
기사 종자 몰트는 볼탄 반도의 전설적인 영웅이 생각보다 마른데다 얼굴과 목소리가 계집처럼 곱상해서 당황했다. 오히려 수행기사-호른 경-가 사내답고 늠름했다. 소문 무성한 회색늑대를 양쪽에 끼고 있지 않았으면 주군과 기사가 뒤바뀐 줄 알았을 것이다.
“저희 주군께서는, 그리 잘 지내지 못하십니다.”
“볼프 후작 때문에?”
“그자도 원인 중 하나지만, 그보다 병세가 악화되신 탓에...”
“아, 그래?”
로벨은 가면과 붕대의 도너반 자작을 떠올렸다. 문둥병 환자는 몸이 약해 오래 살지 못했다.
“날 찾아온 이유는?”
로벨과 로벨의 식구들은 지원군, 보호, 도움 따위의 대사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사 종자 몰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대단히 뜻밖이었다.
“제 주군이신 죠드 도너반 자작의 전언입니다. 옛 신과 국왕 폐하의 허락 아래 로벨 로드릭 후작님께 충성을 맹세하고자 하니, 이 시간부터 도너반 가문은 후작님을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로벨은 나이 차가 얼마 안 나는 기사 종자 앞에서 체통 없이 입을 딱 벌렸다. 그 사실을 지적해야 할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도 비슷했다. 호른 경이 짤막한 콧수염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예상 밖의 강적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