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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90화 (190/605)

190화. 모닝스타

190화. 모닝스타

잉그비아 왕국의 대포장인이 주철로 대포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데, 솔직히 신뢰가 가지 않았다. 화약무기는 위력이 막강한 만큼 신뢰성과 안전성이 최우선이었다. 그 점에서는 지난 100년 동안 검증된 청동대포가 제일이었다.

“청동대포는 아이란드 왕국산이 좋긴 한데...”

“그쪽 대포는 너무 커.”

“그게 왜요? 크면 좋은 거 아닌가요?”

“무겁고 느리잖아.”

로벨은 에르나 왕국산 청동대포를 검토했다. 에르나 왕국은 정통 해양강국답게 대포가 발달했다. 종류도 무려 12가지였다.

“팔콘에서 팔코넷 크기가 적당해. 그 이상은 쓸모없어.”

“그나마 다행이네요. 난 또 이이이~따마한 대포를 사달라고 할 줄 알았네요.”

로벨은 오래된 책자를 뒤적였다. 포클랜드 시티에 갔을 때 가져온 것인데, 대포의 크기와 사용법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었다. 로벨이 원하는 팔코넷 이외에도 캘버린이라 불리는 12파운드, 24파운드, 심지어 48파운드짜리 포탄을 사용하는 거포가 있었다.

“48파운드면... 저 식충이 몸무게 정도 되겠는데요?”

“컹!”

로벨은 책장을 넘기며 발가락으로 ‘식충이’의 목을 긁어 주었다. 기분이 좋은 듯 골골거렸다.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식충... 아니, 아야 몸무게가 70파운드는 나갈걸?”

“하긴, 저 뱃살이 늘어진 거 보면 꽤 나가겠네요.”

어린 집사는 아야와 이야카의 나이를 떠올려보았다. 처음 데려왔을 때를 0살로 쳐도 벌써 5살이었다. 야생에 있었으면 짝을 만나 일가를 이뤘을 것이다.

‘그리고 사냥당했겠지...’

로벨은 공방 기술자가 왕과 영주를 위해 만든 ‘유익하고 재미있는 최신식 대포 안내책자’를 덮고 한숨을 쉬었다.

“이것만 봐서 모르겠어. 실물을 봐야 알지.”

“이안 선장을 보내요. 해적 출신이라 대포에 빠삭하잖아요.”

“응. 그럴 거야. 이 무거운 걸 육로로 가져올 수 없잖아.”

로벨은 여유자금을 탈탈 털어서 2만 5천 페닝을 준비했다. 최신형 팔코넷을 4~5문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어린 집사가 무기로 써도 될 두툼한 금화 자루를 떠나보내며 울먹였다.

“이 돈이 어떤 돈인데, 내가, 내가 어떻게 모았는데,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다니... 흑흑...”

“어차피 도로공사에 쓸 돈이었잖아?”

대포도 대포지만, 화약과 포탄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화약의 주재료인 초석은 에르나 왕국과 아이란드 왕국에서 소량 채굴되는데, 그 가격이 엄청나서 두 왕국의 전체 수익 중 10~15%를 차지할 정도였다. 포탄도 석공을 시켜 제작해야 하며, 소모품인 만큼 비용이 적지 않았다.

“대포 5문이면 한번 쏠 때마다 300페닝씩 소모돼요.”

“그 대신 적을 두 자릿수로 해치울 수 있어. 용병을 희생하는 것보다 싸잖아.”

어린 집사는 재고해보자고 졸랐지만 로벨은 단호했다. 이안 선장에게 금화를 넘겼다. 그러나 어린 집사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전투마를 알아보자.”

“으아아앙-!”

@

로벨은 전투마가 필요했다. 과묵한 몬트의 ‘조랑말’을 빌려 타고 있지만, 체구가 작고 돌파력이 부족한 윈필드산 전투마라 중장갑 기사가 타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예전의 ‘플레일’처럼 오베리아산 거마가 필요했다.

로벨이 기사의 명예, 자존심, 필요와 안전을 주장하자 어린 집사도 반대하지 않았다.

“쓸 만한 말을 사려면 포클랜드 시티나 프란시스 시티로 가야 할 텐데요?”

“응. 가자.”

“에이, 겨울인데요? 그리고 전 재산 탈탈 털어서 해적 선장한테 맡긴 게 조금 전이잖아요? 봄 추수까지 기다리세요.”

“봄까지?”

로벨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집사는 사랑하는 주인이 반칙(?)하자 비장의 무기 장부를 보여주었다.

“자! 보세요! 1페닝은 고사하고 1로닝도 없어요!”

“...그 정도야?”

“봄이 오면 여유가 생기니까 그때 사요! 안 사는 게 아니잖아요? 100일만 참아요!”

로벨은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그날 저녁, 로벨에게 꿈과 희망을, 어린 집사에게 좌절과 고통을 주는 사람이 찾아왔다. 자작나무 숲과 로드릭 항을 통치하는 자칭 로벨의 수호기사 호른 경이었다.

로벨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봉신을 환영했다. 어린 집사에게 닭 한 마리 잡게 하고, 마녀 키르케에게 따뜻한 와인을 내오게 했다.

“깁스 자작의 일로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소.”

“저보다 가시성의 바이란 경이 고생했지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햇빛을 못 쬐어서 뽀얀 피부에 희고 고운 송곳니가 보이자 호른 경은 죄진 사람처럼 시선을 피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오? 술이나 한잔하자고 찾아온 것 같지는 않은데?”

호른 경은 글루바인(Gluhwein)을 한 모금 마시고 잔기침했다.

“실은 아주 귀한 말을 보아 소개해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귀한 말?”

“어제 오후에 안면이 있는 상인이 전투마를 팔겠다고 찾아왔는데, 아무리 봐도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렇소?”

로벨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 마침 주군께서 애마를 잃은 일이 기억나 이곳으로 찾아오라 말했습니다.”

“오호, 고맙소. 안 그래도 새로운 전투마를 구하려던 참이었소.”

로벨은 기둥 뒤에서 의미불명의 몸짓을 보내는 어린 집사를 보았지만 그냥 못 본 셈 치기로 했다.

“그럼 언제쯤 볼 수 있겠소?”

로벨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자 호른 경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

다음날 아침. 늑대성으로 몇 명의 행상인이 찾아왔다. 한 명은 외팔이 더치보다 주먹 하나가 더 큰 거인이고, 또 한 명은 어린 집사의 눈높이밖에 안 되는 소인이었다.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가죽옷을 잔뜩 껴입었는데, 꼭 살찐 곰과 못생긴 토끼 같았다.

“아이고! 영주님! 영주님을 뵙게 되어 평생 동안 길이길이 간직할 무한하고 광영된 영광이옵니다!”

“후, 후, 후작님을 뵙습니다요.”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천지차이였다. 소인은 숨 한번 쉴 동안 기본 열 마디씩 떠들었고, 거인은 한마디 하는데도 옆 사람이 지칠 만큼 느렸다. 로벨은 자상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내 성에 온 것을 환영해. 나한테 보여줄 것이 있다고?”

거인과 소인이 시선을 교환했다. 의미심장하다 못해 간사해 보이는 눈짓이었다.

“그 녀석을 이곳에서 보여드려도 될는지요?”

“괜찮아.”

“가져와라!”

성 안으로 한 필의 군마가 들어왔다. 나무마루에 말발굽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또각... 또각... 또각... 그리고 횃불과 촛불 아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 로벨은 물론이고, 말을 볼 줄 모르는 펄프 대장 등도 감탄했다.

체구는 윈필드 태생 ‘조랑말’하고 비슷하지만, 새까만 갈기가 폭포수처럼 흐르고 새하얀 몸은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기가 흘렀다. 목은 가냘픈 듯 단단하고, 어깨에는 주체 못 할 근육이 꿈틀거리며, 네 다리 모두 쭉 뻗어서 걸음마다 기운이 넘쳤다. 말 중에도 영웅이 있다면 분명 이런 말일 것이다.

“그 말은...”

“험! 험험!”

소인이 새삼스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상품을 소개했다.

“이 녀석으로 말씀드리자면 하얀 숲의 고귀한 혈통으로 요정과 어울려 다니는 전설의 신수 유니콘의 3대 후손으로 반요반마(半妖半馬)의 신비하고 신묘한 짐승이니...”

로벨은 행상인의 잡소리에서 핵심만 골랐다.

“유니콘이라고?”

로벨은 대단히 흥미로운 얼굴로 자칭(?) 유니콘 3대 후손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거인이 막아섰다.

“아, 아, 안 됩니다!”

로벨은 평소답지 않게 욱! 해서 칼자루를 잡았다. 거인은 덩치가 아까울 만큼 겁을 먹었다.

“영, 영주님, 이놈은 성질이 더러우니 조심하셔야...”

그러나 ‘유니콘’은 로벨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잇몸을 뒤집고 푸르릉거리며 로벨을 반겼다.

“어허? 이놈이 왜 이래? 미쳤나?”

“비켜봐.”

로벨은 새 전투마가 새 주인을 알아보자 기뻐서 볼을 쓰다듬었다. 전설의 기사와 전설의 말은 누가 뭐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것도 기묘하게 비슷했다. 어린 집사조차 잠시 돈 걱정을 잊고 감탄했다.

‘유니콘의 전설은... 처녀를 보호하고... 처녀...’

어린 집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짜 유니콘의 피가 흐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좋은 기수를 알아본 건지 알 수 없으나, 자칭타칭 ‘유니콘’이 로벨을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허허, 이 녀석이 이렇게 좋아하는 것은 처음 보는군요. 아무래도 저희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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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새로운 전투마가 마음에 꼭 들었지만, 어린 집사와 행상인은 가격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5만 페닝이라고!”

어린 집사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행상인이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 어디서 유니콘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5만 페닝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 돈이면 성을 하나 사겠다!”

“기사는 명마를 알아보는 법! 영주님이 진정한 기사라면 5만 페닝을 아까워하지 않을...”

“우린 아깝거든요? 안 돼! 안 돼! 그 값을 주면 우린 파산이야! 영주님! 그 가짜 유니콘 냉큼 돌려줘요!”

로벨은 가짜 유니콘의 목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저었다. 걸음마를 뗄 때부터 함께한 사이라 눈빛만으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이 녀석이 있으면 토너먼트 우승도 따놓은 거야. 5만 페닝쯤 벌어서 주자.’

‘전쟁통에 토너먼트 비슷한 것도 안 열리는데 어디서 우승해요!’

로벨은 딴 건 몰라도 기사의 무구만큼은 완강했다. 기사의 상징과 같은 말을 포기할 리 없었다. 어린 집사는 작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저 말이 정말 대단하면, 사겠다는 왕과 제후가 잔뜩 있을 텐데요. 왜 여기까지 끌고 온 거죠?”

“그야, 최고의 기사님이 탔으면 해서...”

“최고의 기사가 아니면 타지 못해서가 아니고요? 오호라, 조금 전 우리 영주님이 보러갈 때 필사적으로 막던데, 그 이유가 뭐죠?”

“그거야, 그러니까, 그게...”

“하핫! 좋아요! 그쪽이 타 보세요! 그쪽이 타고 정말 ‘쓸 만한’ 말이란 것을 증명하면 5만 페닝을 지불하죠!”

어린 집사가 승부수를 던졌다. 지금 순간은 성(城)을 걸고 한판 승부하는 위대한 갬블러였다.

행상인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좌우로 눈알을 굴렸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곳은 어린 집사의 아성이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4만 페닝에 팔겠습니다.”

어린 집사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아직 안 끝났어요! 보아하니 포클랜드 출신 같은데, 저 말을 어디서 구했죠? 설마 아버지가 물려줬다고 우기지는 않을 테고, 혈통 증명서가 있나요?”

“저 말은 하얀 숲에서 노획한 말로...”

“그럼 유니콘 어쩌고 다 거짓말이네요?”

“그, 그건 아닙니다! 하얀 숲의 마법사가 증명해줬습니다!”

“우리 성에도 하얀 숲의 못된 마녀가 있어요. 그리 믿을 만한 종자들이 아니죠.”

어린 집사가 강하게 밀어붙이자 행상인이 주춤거렸다. 그 마법사란 작자와 좋게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1만 페닝에 사죠! 고작 말 한 마리에 1만 페닝을 지불하는 집사도 나밖에 없을 걸요?”

“무, 무슨 헛소리요! 그 값이면 평범한 전투마보다 조금 비싼 정도잖습니까! 3만 페닝! 그 이하면 그냥 잡아서 삶아 먹겠습니다!”

어린 집사와 행상인은 불꽃 튀는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1만 5천 페닝으로 타협했다. 마녀 키르케가 순박한 얼굴로 박수치고, 펄프 대장이 입술을 모아 휘파람 불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금이 없어서 그런데, 현물로 거래되죠?

“에잇! 안 해! 안 팔아!”

“이미 늦었어요. 히힛! 맥주 좋아하세요? 양털도 많은데요. 가만있자, 1만 5천 페닝어치 실어가려면 수레가 몇 대 필요하지...”

로벨은 어린 집사의 패악질을 못 본척하고 새로운 친구에게 속삭였다.

“네 이름은 ‘모닝스타’야. 검은 갈기하고 잘 어울리지? 네 친구 플레일을 대신해 앞으로 잘 부탁해.”

그렇게 늑대성의 새 식구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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