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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89화 (189/605)

189화. 공포

189화. 공포

로벨은 뭉그적거리며 일어났다. 기왕 들킨 거 비굴하게 숨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붉고 옷자락에 눈과 흙이 묻어 있어 소용없었다.

“어, 저기, 음, 그러니까, 오랜만이야.”

어색한 표정, 어색한 몸짓, 어색한 말투까지 3박자가 완벽했다.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이 부끄러워했다.

늑대의 왕은 츠바이핸더를 꺼내 땅에 꽂았다. 쿵-! 전투마 ‘조랑말’이 깜짝 놀라 투레질했다. 사냥꾼 형제와 울프 용병단도 덩달아 놀라 활과 쇠뇌를 겨냥했다. 그러자 늑대무리가 자세를 낮추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크르릉... 크릉...”

로벨은 흐룬팅의 폼멜을 쓸어내리며 앞으로 나갔다. 햇살에 살포시 녹다가 삭풍에 꽁꽁 얼어버린 눈덩어리가 강철 부츠에 바서졌다. 눈 속에 파묻힌 나뭇가지가 우두둑- 소리 내며 부러졌다.

‘조용하다...’

로벨은 늑대의 왕과 거리를 재었다. 15피트, 14피트, 13피트... 늑대의 왕의 신장과 츠바이핸더의 길이를 생각할 때 아슬아슬한 간격이었다.

‘한 걸음 반. 그리고 두 걸음 반.’

로벨과 늑대의 왕이 대치했다. 정오 햇살은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차디찬 북풍은 측면에서 몰아친다. 눈에는 잔가지와 돌부리가 숨어있지만 주의를 조금만 기울이면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승부를 내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늑대의 왕이었다. 츠바이핸더를 번쩍 뽑아 어깨와 팔꿈치 관절을 기괴할 만큼 회전하며 휘둘렀다. 휘리릭-! 육중한 쇳덩이에서 채찍 휘두르는 소리가 나왔다.

로벨은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 레슬링 선수처럼 자세를 낮추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늑대의 왕의 무지막지한 거병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풍압으로 머리카락이 쓸려갔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정통으로 맞으면 갑옷을 입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더 빨라!’

로벨은 흐룬팅을 안쪽으로 끌어당겨 최단거리로 발검했다. 롱소드보다 조금 짧다고 하지만, 그래도 전쟁에 사용되는 중병기인데 흡사 대거처럼 날렵하게 찔러 들어갔다.

수평으로 크게 휘둘러진 츠바이핸더와 수직으로 짧게 치고 올라가는 흐룬팅이 교차했다. 햇빛을 튕겨내는 칼날과 발에 채여 휘날리는 눈송이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이얏! 이겼다!”

성질 급한 외팔이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샘 포클 시대 이전부터 수많은 싸움을 치러온 괴물을 얕잡아 본 발언이다.

늑대의 왕은 츠바이핸더를 휘두른 반동으로 상체를 기울여 목젖 아래에서 올라오는 흐룬팅을 피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한 스웨이였다.

‘피해?’

로벨은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받았다. 늑대의 왕이 회심의 일격을 피했다. 바꿔 말하면 효과가 있다는 뜻이었다. 과거에는 피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로벨은 왼발을 오른쪽으로 옮겨 회전하며 늑대의 왕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적에게 등을 보이는 위험천만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자신보다 크고, 자신보다 무거운 무기를 가진 상대에게는 통했다. 늑대의 왕은 옆구리에 바짝 붙은 로벨을 어찌하지 못해 한 걸음 물러났다.

거리가 가까워질 때는 장병기인 츠바이핸더가 선공했지만, 거리가 멀어질 때는 단병기인 흐룬팅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로벨은 늑대의 왕이 흐룬팅 간격에 들어오는 순간 빗살 같은 찌르기를 재차 날렸다. 늑대의 왕은 츠바이핸더를 끌어당겨 가드와 리카소(Riccaso:칼몸 아랫부분)로 급소를 보호했다. 깡! 까강! 챙! 챙!

눈 깜짝할 사이 검격이 세 번 오갔다. 로벨은 거리를 내주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밀어붙였다. 늑대의 왕은 힘겹게 방어하다가 기어이 못 참고 츠바이핸더를 놓아버렸다. 늑대의 왕 정도면 몸뚱이가 무기였다. 특히 두 주먹은 철퇴나 다름없었다.

퍼억-!

로벨은 늑대왕의 바디 훅을 맞아 한 걸음 밀려났다. 가벼운 주먹질인데 모닝스타에 맞은 것처럼 충격이 대단했다. 흉갑을 안 입었으면 갈비뼈가 몇 대 나갔을 것이다. 늑대의 왕은 땅에 떨어진 애병을 씁쓸하게 보며 말했다.

“못 본 사이 꽤 거칠어졌군.”

“아직 성장기라서.”

로벨은 흐룬팅을 좌우로 한 번씩 휘두르고 어깨높이로 겨냥했다. 늑대의 왕이 땅에 떨어진 츠바이핸더를 줍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나 늑대의 왕은 무기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기둥 같은 다리를 쭉 뻗어 앞차기를 날렸다. 로벨은 흐룬팅을 사선으로 내밀어 늑대의 왕을 베었다.

“큭!”

“깨갱-!”

로벨은 발에 채여 날아가고, 늑대의 왕은 피를 뿌리며 비틀거렸다.

“기사 나리!”

“저거 진짜 괴물이잖아?”

로벨은 뒤로 한 바퀴 구른 후 잽싸게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늑대의 왕은 피를 흘리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로벨은 늑대의 왕의 종아리를 유심히 보았다. 가죽옷이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서 핏물이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통했어.’

마녀 키르케가 말한 것처럼 흐룬팅은 늑대의 왕에게 통한다. 마도의 무구가 있으면 마도의 수호자와 싸워볼 만 했다.

늑대의 왕은 흐룬팅의 사정거리 밖에서 멈춰 섰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충분해?”

늑대의 왕은 꼿꼿하게 서서 로벨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날이 아니다. 오랫동안 미뤄온 승부를 가리기에 이곳은 초라하지.”

로벨은 자세를 바꾸고 거리를 다시 재었다. 하지만 늑대의 왕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만둬라. 진짜 싸움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

“...무슨 말이야?”

“곧 전쟁이 시작될 거란 뜻이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아주 큰 전쟁 말이다.”

“볼프 후작이?”

“그리고 우리 수호자가.”

로벨은 늑대의 왕을 칠 기회를 엿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늑대들이 피냄새에 취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로벨은 피치 못하게 거리를 좀 더 벌려야 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오른손으로 아바레스트를 견착하고 왼손으로 수신호했다. 늑대의 왕은 몰라도, 일반 늑대쯤은 제압할 수 있었다.

“내년 여름은 너희에게 잊혀지지 않는 시절이 될 것이다. 그때 너와 나도 못다 한 승부를 가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하려고 찾아온 거야?”

“네가 무대에 설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로벨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난 여름까지 기다릴 생각 없는데?”

로벨은 송곳니를 자랑하는 수컷 늑대를 경계하며 우측으로 이동했다. 로벨은 위대한 기사였다. 자고로 위대한 인물은 승부를 볼 때를 알았다. 승기를 잡았으니 고이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늑대의 왕에게는 친구가 있었다. 평범한 친구가 아니었다. 자신의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친구였다.

“아우우우우-!”

늑대 한 마리가 로벨을 향해 달려들었다. 로벨은 건틀렛으로 주둥이를 막고 흐룬팅으로 목을 찔렀다.

“앗! 영주님!”

“쏴라!”

파파파-팡-!

쿼럴과 화살이 쏘아졌다. 늑대 3마리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그 뒤로 10마리가 더 있었다. 보통 늑대가 아니라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로벨은 왼팔로 목을 보호하고 흐룬팅을 팔자로 휘저었다. 사냥꾼 찰드 형제가 능숙한 솜씨로 롱보우를 쏘았다. 하지만 사냥꾼은 군인이 아니었다. 소지한 화살이 많지 않았다. 세 발 쏘고 나니 쓸 만한 화살이 없었다.

울프 용병단은 재장전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도끼와 단검을 휘둘렀다. 사나운 늑대들이지만 갑옷과 투구가 있으니 해볼 만 했다.

“늑대의 왕! 리카온!”

로벨은 광견처럼 달려드는 늑대무리 너머로 늑대의 왕을 찾았다. 어느덧 저 멀리 떠나있었다. 거인처럼 커서 보폭도 넓었다. 이제 전투마로 쫓아가도 힘들 듯했다.

“네놈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말이야!”

로벨은 늑대의 피를 뒤집어쓰고 흡사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

늑대사냥은 성공이었다. 우습지만, 스무 두 마리의 늑대를 모조리 소탕할 수 있었다. 숲 속 어딘가에 암컷과 새끼가 남아있겠지만, 그 수가 몇 마리 되지 않을 테니 적어도 2~3년 동안은 늑대로 인한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울프 용병단은 늑대 가죽, 이빨, 발톱을 챙겼다. 북부 늑대의 장신구는 인어의 바다 너머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다. 이안 선장에게 부탁하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은 영주라서 가만히 있어도 총 열한 마리의 가죽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린 집사가 잘 처분하여 영지운영자금으로 사용할 것이다.

“여름...”

로벨이 중얼거리자 송곳니를 입가에 붙이고 흡혈귀 흉내 내는 마녀 키르케와 징그럽다고 질색하는 허풍쟁이 제이콥이 돌아보았다.

“아닌데요? 겨울인데요?”

“으이구! 이 멍청한 아가씨야! 늑대 부리는 괴물 놈이 한 말이잖아!”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마녀가 멍청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마녀 키르케는 입술을 삐죽이고 말했다.

“그럼 볼프 후작님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누구랑 싸울까요? 에릭 공작님일까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전쟁이랬어. 검은 숲, 볼탄 반도, 어쩌면 하얀 숲과 포클랜드 지방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전쟁이 될 거야.”

볼프 후작은 그럴 힘이 있었다. 당장 늑대의 왕만 해도 위협적이었다. 거기에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 류트 공자, 뱀파이어 군주 등이 작당하면 왕위계승전쟁으로 분열된 포클랜드의 기사들이 대적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여름까지 시간이 있어. 국왕 폐하와 에릭 공작에게 경고하고,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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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공사현장으로 돌아가 늑대 무리를 모두 처치했으니 안심하라 전했다. 인부들은 한나절 만에 늑대 스무 마리를 처치한 기사와 용병을 칭송했다.

로벨은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사냥꾼 형제와 울프 용병단도 입단속 시켰다. 영지민이 전쟁, 괴물, 늑대의 왕 따위를 알아봐야 혼란만 생길 뿐이다. 오직 세 사람, 어린 집사, 리암 수사, 펄프 대장에게만 오늘의 일을 알려주었다.

“전쟁이 날 거라고요? 그 괴물이 그리 경고했어요?”

어린 집사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웃기는 놈이네요? 할 짓이 그렇게 없나?”

“그거 말고도 자격이 어쩌고 했는데...”

늑대의 왕이 뭔지 모르는 리암 수사는 볼프 후작의 기사라 생각했다.

“후작님을 암살하러 왔다가 잘 안 되자 아무 말이나 떠든 것이 아닐까요?”

“그런 실없는 놈이 아니야.”

로벨은 매끈한 턱을 쓸어 만지며 고민했다.

“하얀 숲의 후작이 말했어. 영성을 가질 거라고. 그게 뭔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명예 비슷한 거라면 아마도 전쟁터에서 승부를 보고 싶을 거야.”

“역사에 길이 남을 전쟁에서 무적의 기사로 알려진 영주님을 쓰러트린다면... 가능성이 있군요.”

“뭣에요? 우리 영주님이 왜 쓰러져요?”

“취소해! 취소해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빼액! 소리쳤다. 펄프 대장은 성화에 못 이겨 로벨과 두 사람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리암 수사에게도 사과하고 다시 말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울프 용병단 병력이 205명입니다. 뉴 로드릭 마을과 회색산의 수비병을 모으면 총 255명입니다. 볼프 후작의 주력군이 와도 해 볼만 합니다.”

“그걸로 부족해.”

로벨은 늑대의 왕을 생각했다. 그런 괴물은 평범한 무기로 대적할 수 없다.

“대포 사자. 전투마도 몇 마리 사고.”

어린 집사의 얼굴에 끔찍한 공포가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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