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우두머리
188화. 우두머리
영지가 넓어지고 인구가 늘어나자 겨울이라고 한가하지 않았다.
성 안에서는 어린 집사가 각 지방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분석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고, 성 밖에서는 펄프 대장을 비롯한 고참 용병이 신입 용병을 훈련시키느라 목이 쉬었다.
교외에서는 로드릭 교역로, 혹은 늑대도로라 불리는 포장도로 공사가 한창이고, 그 길을 따라 계절에 굴하지 않는 용감하고 부지런한 행상인이 오고 갔다.
“후우...”
로벨은 칼자루를 돌려 지팡이처럼 땅을 짚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한바탕 몸을 움직이자 정수리, 어깨, 굴곡진 등과 매끈한 다리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기사의 열정은 차디찬 아침 공기도 밀어냈다.
“...좋아.”
로벨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근육 한 조각, 뼈 한 마디의 움직임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그랜드 토너먼트 시절 이상의 컨디션이었다. 지금이라면 볼프 사트로 후작, 주드 맥켈런 남작, 심지어 그렉 페럿 경과 싸워도 질 것 같지 않았다.
“기사 나리, 여기 계십니까요?”
물론, 갑옷이 있을 때 이야기였다. 로벨은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돌렸다. 어린 집사 외에는 거의 벗다시피 한 몸을 보일 수 없었다.
“누, 누구야!”
“아이고, 여기 계셨군요?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요!”
“...허풍쟁이?”
로벨은 등을 돌린 채로 조심조심 우플랑드를 챙겼다. 키가 크고 어깨와 등의 근육이 오밀조밀해서 뒷모습만으로 정체를 들킬 일은 없었다.
로벨은 우플랑드를 뒤집어쓰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조인 후 비로소 허풍쟁이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화를 냈다.
“이 시간에 찾아오면 안 돼! 아무리 너라도 용서 못 해!”
의도와 달리 감동을 주었다. 허풍쟁이는 ‘아무리 너라도...?’ 어쩌고 중얼거리다가 활짝 웃었다.
“크힛! 큼! 죄송합니다요. 다음부터 조심하겠습니다.”
로벨은 머리카락을 끌어모아 말꼬리처럼 묶고 소드 벨트를 챙겨 흐룬팅과 아론다이트를 차례로 꽂아 넣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차차! 늑대입니다! 늑대가 나타났습니다요!”
“컹!”
아야와 이야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쳐다보았다. 허풍쟁이는 계속 자라고 손짓하고 말했다.
“저놈들 말고 진짜 늑대입니다! 공사장에 출몰해서 당나귀 한 마리를 잡아갔습니다요!”
“아, 그래?”
올해 가을 사냥하지 않았더니 불어난 숫자를 감당 못 해 숲 밖으로 뛰쳐나온 모양이다. 하루빨리 손쓰지 않으면 겨우내 행상인과 가축들을 괴롭힐 것이다. 로벨은 심심한데 잘 됐다는 생각으로 미소 지었다.
“애꾸눈 볼포스와 사냥꾼 찰드 형제를 불러.”
“오! 늑대사냥입니까요?”
“응. 용병 중에서도 자원자를 20명 정도 뽑아. 나도 곧 갈 테니까, 성 아래에서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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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하프 아머 차림으로 오래전 구멍 난 가죽 망토를 두르고 후드를 깊이 눌러 섰다. 그리고 과묵한 몬트의 전투마 ‘조랑말’을 꺼내서 가벼운 승마용 안장을 얹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로벨을 발견하지 못했다.
겨울 아침은 고요했다.
밤사이 쌓인 눈이 아침 햇살에 녹아 후두둑- 떨어지고, 상어 이빨처럼 삐죽삐죽한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아야와 이야카는 아성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뜨거운 입김을 토해냈다. 로벨을 따라가고 싶은데, 눈 때문에 발바닥이 차서 망설여지는 모양이다. 로벨은 늑대에게 늑대가 사냥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키르케랑 놀고 있어.”
“컹! 컹컹!”
늑대 남매는 ‘키르케’란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키르케를 부르기 위해 주방으로 뛰어갔다.
로벨은 전투마를 끌고 성문으로 향했다. 늑대성을 지키는 신입 용병이 로벨을 알아보고 뻣뻣하게 굳어서 포차드를 곧추 세웠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요, 기사 나리!”
“응. 잘 잤어?”
로벨은 용병 같지 않은 용병을 다독이고 느릿느릿 성을 벗어났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해 꼬리를 잡혔다.
“기사님! 기사님! 같이 가요! 우아악!”
마녀 키르케가 부츠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급히 쫓아왔다. 오른발과 왼발을 동시에 내밀다가 엉덩방아를 한 번 찍고 울상을 지으며 엉금엉금 기어왔다.
“추운데 왜 나와?”
“힛! 바늘 가는데 실이 따라가야죠!”
“어린 집사는?”
“책상에 코 박고 코~ 자고 있어요.”
“추운데 침대 가서 자지...”
“그래서 제가 아야랑 이야카랑 붙여주고 왔어요.”
숲 속의... 아니, 집무실의 잠자는 집사는 장난꾸러기 늑대 남매의 장난감이 되어 괴상한 꿈을 꿀 것이다.
성 아래쪽, 언덕길 초입에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을 비롯한 사냥꾼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아바레스트, 크로스보우, 롱보우 등등 대형병기를 하나씩 어깨에 걸고, 클리버, 더크, 헌팅 나이프 따위를 손질했다. 성 앞이라 망정이지, 어디 외지에서 마주치면 산적떼로 오해받기 딱 좋은 비주얼이었다.
“야, 야, 조용해라, 기사 나리 오셨다.”
“좋은 아침입니다요, 나으리!”
로벨이 전투마를 타고 휘적휘적 다가오자 모자를 벗거나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전부 낯이 익었다. 위험은 낮고 수익은 짭짤한 늑대사냥에 짬(?) 안 되는 용병은 끼어들지도 못했다. 최소 3년 이상 함께한 고참병뿐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동료의 좋은 점은 긴말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허풍쟁이가 고삐를 잡고, 애꾸눈이 길을 잡았다.
“북쪽 숲으로 갈까요?”
“늑대가 습격한 현장 먼저.”
사냥꾼 찰드 형제와 울프 용병단은 사냥도구로 가장한 병장기를 걸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동했다. 웃통을 벗고 장작을 쪼개는 농부도, 입김을 호호 불며 짐을 내리는 상인도 일손을 멈추고 인사했다.
추위를 모르는 것은 어린아이의 특권이다. 사내아이들은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동네방네 뛰어다니고, 계집아이들은 송아지 뿔에 실타래를 감으며 깔깔거렸다.
“앗! 영주님이다!”
“영주님! 안냐세요!”
로벨은 로드릭 마을 장난꾸러기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어른 중 한 명이 쫓아나와 영주님께 무례하다고 혼냈지만, 신분과 권력에 익숙하지 못한 꼬마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로벨의 이름을 ‘영주님(Lord)’으로 알고 있는 꼬마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인기가 참 좋습니다요.”
“영주니까.”
“아닙니다요. 자기 주인을 좋아하는 농민은 흔치 않아요. 못된 주인이 많은 탓도 있지만, 아무리 잘해줘도 만족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입죠.”
로벨은 콧구멍을 후비적거리는 허풍쟁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허풍쟁이는 시선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뒤돌아보았다.
“왜, 왜 그렇게 보십니까요?”
“내가 아는 허풍쟁이 같지 않아서...”
“제가 글을 못 읽어서 그렇지, 이 나이 먹도록 보고 배운 게 많습니다요.”
“응응. 너희들은 바보가 아니야.”
로벨은 피식- 웃었다.
겨울치고 퍽 따뜻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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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피해가 생각보다 막심했다.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것은 당나귀 한 마리지만, 그로 인한 공포는 백 명의 인부와 쉰 마리의 가축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한두 마리가 아닙니다! 스무 마리, 아니, 서른 마리가 넘었습니다!”
간밤에 늑대 무리를 목격한 인부가 울먹이며 외쳤다. 외팔이가 으르렁거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늑대가 서른 마리나 나타났다고?”
“거짓말이 아닌 듯하다.”
애꾸눈이 공사장 밖에서 흔적을 찾았다. 간밤에 쌓인 눈에 네 발 짐승의 족적이 남아 있었다.
“숫자가 상당합니다. 스무 마리는 족히 넘습니다.”
“진짜야? 뭐가 그리 많아?”
늑대가 무리 짓기 좋아하는 짐승이라 해도 2, 30마리가 몰려다니는 일은 흔치 않았다. 전문가가 확신하자 긴가민가하던 인부들이 웅성거렸다. 허풍쟁이가 두 팔 벌리고 외쳤다.
“겁먹지 마! 우리 기사 나리가 직접 오셨잖아!”
“아이고, 영주님!”
“후작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로벨은 말머리를 돌려서 무릎 꿇고 애걸하는 인부들을 내려다보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왔는데 큰일이 되었다.
“제대로 준비해야겠는데?”
로벨 일행은 사냥에 앞서 무기를 점검했다. 시위를 감아 걸쇠에 걸고, 쿼럴을 뽑아 촉과 깃을 확인하고, 대거와 나이프를 뽑아 칼끝을 훑어보았다. 로벨은 흐룬팅의 칼날을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칼집에 밀어 넣었다.
“어느 쪽이야?”
사냥꾼 찰드 형제가 눈 덮인 땅을 훔치며 말했다.
“우두머리가 누군지 몰라도 멍청하군요. 흔적을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큰 찰드가 북쪽을 가리켰다. 외팔이가 코를 팽! 풀고 따지듯 물었다.
“확실한 거냐? 자신 없으면 아버지 모셔오고.”
“사냥감 추적은 아버지보다 큰 형님이 낫소!”
작은 찰드가 바락바락 대들었다. 머리 하나가 차이 나는 덩치를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였다. 외팔이는 용감한 찰드 형제가 싫지 않았다.
“누가 뭐래? 확실한지 물었지! 으하핫!”
로벨은 애꾸눈과 허풍쟁이에게 눈짓했다.
“그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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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 부르기에는 황량하고, 들판이라 생각하기에는 수목이 우거졌다.
로벨은 후드를 벗고 허리를 숙여 앙상한 나뭇가지를 피했다. 지형이 모호한 만큼 말을 타기도, 내려서 걷기도 모호했다.
“아직도 멀었어?”
“거, 거의 다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추격은 신중했고, 신중한 만큼 아주 느렸다.
마녀 키르케가 다리 아프다고 구시렁거리고, 외팔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낼 때였다.
“잠깐!”
갑자기 큰 찰드가 정지신호를 보냈다.
“뭣이라? 잠깐? 자암-까안?”
허풍쟁이 이하 신사적인 용병들이 앞뒤로 잘려나간 문장을 점잖게 지적해주었다. 사냥꾼 형제는 기가 죽어서 경칭과 존칭을 모두 붙여 설명했다.
“여, 영주님 나으리, 늑대의 배설물입니다.”
로벨은 웃음을 참고 전투마에서 내렸다. 큰 찰드가 눈더미를 헤집어 손바닥만한 갈색 덩어리를 꺼내 보였다.
“하나는 사흘쯤 지났고, 하나는 몇 시간 안 되었습니다. 한 시간? 한 시간 반?”
“이 근방이 놈들의 소굴이군.”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풀어 쥐며 중얼거렸다. 사냥꾼끼리는 통하는 게 있었다.
작은 찰드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바람을 살폈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춰 로벨과 울프 용병단에게 속삭였다.
“바람을 지고 가면 대번에 도망칠 겁니다.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가야 합니다.”
“좋아. 가자.”
로벨은 전투마 고삐를 잡고 두 발로 걸었다.
사냥감에게 들키지 않고 거리를 좁히는 것이 사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사냥 경험이 적은 마녀조차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고 숨을 죽였다. 그러나 결과부터 말하면, 북치고 나팔 불며 행군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공사현장을 습격한 늑대 무리는 공터 한가운데 늘어져서 숨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사냥꾼 형제가 평한 ‘멍청한 우두머리’ 때문이었다.
로벨은 늑대 우두머리를 보는 순간 자세를 바짝 낮췄다. 그리고 동작이 굼뜬 용병들을 닦달했다.
“숙여! 숙여!”
“엥? 기사 나리?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요?”
로벨의 체통 없는 행동에 흉내쟁이 퍼시발이 실소했다. 그러나 잠시 뒤 웃을 수 없었다. 용병치고 대단히 점잖은 애꾸눈, 겁을 상실한 외팔이, 허세 빼면 시체인 허풍쟁이, 장난기 많은 코골이 등이 모두 로벨을 따라 몸을 납작 숙였다.
“저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괴상하게 많은 늑대부터 괴상했어!”
“제길! 제길! 제길! 제길!”
“이제 어찌합니까요? 도, 도망갈까요?”
상황파악이 안 되는 것은 사냥꾼 찰드 형제와 흉내쟁이를 비롯한 비교적 최근에 합류한 용병들이었다.
흉내쟁이 퍼시발은 눈치껏 따라 웅크린 다음 만만한 허풍쟁이의 옆구리를 찔렀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어?”
“그걸 말이라고... 아, 넌 거인의 발 전투 때 없었지? 제길! 귀신보다 더한 괴물이야!”
흉내쟁이는 무적무패의 기사 나리와 울프 용병단을 당황하게 한 상대가 궁금했다. 머리를 살짝 들고 상대를 보려고 했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귀신보다 무서운 상대가 반응했다.
“그랜드 챔피언 로벨 로드릭! 숨지 말고 나와라! 나, 늑대의 왕이 그대를 만나러 왔다! 으하하핫!”
로벨은 귀를 막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중얼거렸다.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