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87화 (187/605)

187화. 신병

187화. 신병

용병의 가장 큰 문제는 신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을 지키기 위해 고용한 용병이 적과 내통해서 성문을 열어줬다거나, 마을을 지키기 위해 고용한 용병이 강도가 되어 약탈을 자행했다는 이야기는 술안주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정말 위험한 순간에는 온갖 핑계로 몸을 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제값’을 다하는 용병은 흔하지 않다. 몸값을 올리기 위해 어느 정도 ‘성의’는 보이지만, 딱 그 정도였다. 속된 말로 먹고살려고 하는 짓인데, 죽을 짓을 할 리 없었다.

제후 입장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병사는 가족과 고향을 지키는 향토병이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전쟁과 무관한 농부, 광부, 어부 등이란 것이다. 싸우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지만, 열의만큼 잘 싸우지는 못했다. 인간이 전쟁이란 강압적 의사소통법을 익힌 이래 줄곧 이어진 딜레마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용병의 기술과 농민병의 충성심을 가진 군대가 있었다.

“울프 용병단은 로벨 로드릭 후작의 사설 용병단으로 군기가 엄정하고 충성심이 매우 높소.”

실력과 신용을 모두 가진 울프 용병단이 노스폴드 시티 의회의 주요안건으로 떠올랐다.

“지휘관의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병사 개개인이 용맹해서 몸을 사리지 않소.”

“어허? 용병은 몸뚱이가 재산인데, 몸을 사리지 않는다?”

“제가 듣기로 전투 중에 부상을 입으면 후작이 소유한 시설에 기술직이나 관리직으로 보내준다고 합니다.”

“그거 대단하군! 먹고 살 길이 열려 있으면 누구라도 용감해질 수 있지!”

“그 때문에 울프 용병단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용병이 수백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로벨 로드릭 후작의 불패신화는 행정적인 뒷받침에서 비롯된 것인가?”

웨던 남작은 노스폴드 시티의 민생과 경제를 책임지는 12명의 길드장을 차례로 보았다.

“그럼 결정이 난 듯 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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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폴드 시티 상인 및 기술자 조합이 무려 7만 7천 페닝의 도로 공사비를 내놓았다. 조건은 단 2가지였다. 노스폴드 시민의 통행료 면제와 노스폴드 시티의 군사적 보호였다. 국왕의 특허장을 믿지 못하는 지금, 신뢰할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 판단한 것이다.

로벨은 시 의회의 사정을 이해하고 전부 수용했다. 노스폴드 시티를 위협할 세력이면 로드릭 마을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니 싸운다면 함께 싸우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솔직히 7만 페닝의 목돈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어린 집사는 계획을 전면 수정해서 포장도로를 깔기로 마음먹었다. 기존의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완전히 갈아엎었다. 땅을 3피트 이상 파내고, 큰 돌에서 작은 돌을 순차적으로 채워 넣고, 자갈과 모래로 마무리한 후 다시 평평한 돌로 포장했다. 큰 비가 내려도, 크고 무거운 마차가 지나가도 망가지지 않을 ‘진짜 도로’였다.

어린 집사는 구릉성, 바위성, 가시성 등에서 보내온 인부와 우마를 맞이하며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이런 공사는 제후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펄프 대장이 하품하다가 피식- 웃었다.

“우리 나리 정도면 제후 아니오? 성이 몇 개고, 병사가 몇 명인데?”

“아, 그런가요?”

세간의 평가는 정확했다. 어느 누구도 로벨 로드릭을 프란시스 가문의 일개 봉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에릭 공작도 일개 제후가 아니게 됐지만...”

어린 집사는 포클랜드 시티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곱씹었다.

왕성을 장악한 3개 세력 중 하얀 숲의 둠 노릭스 후작은 이름뿐이고, 장미성의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구름성의 와트 마르셀 백작이 주축인데,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에릭 공작 파벌이 우세했다. 포비아 왕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한 것은 볼탄 반도 북부와 검은 숲 일대를 장악한 볼프 사트로 후작이었다. 군사력으로 보나 정통성으로 보나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다. 선대부터 쌓아온 악감정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웨던 남작의 걱정처럼, 또 전쟁이 나는 게 아닐지...”

어린 집사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문득 걱정되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만, 영주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펄프 대장은 못다 한 하품을 마저 하면서 손짓했다.

“저기, 하아아-암-! 잖소.”

로벨 로드릭 ‘제후’는 켈트 경, 바이란 경 등 봉신들과 함께 있었다. 어린 집사는 안도하면서 호기심을 느꼈다.

“저기까지 나가서 뭐하는 거야?”

그 대답은 금방 들려왔다.

“오오! 그러니까 포클랜드의 대장인이 30일 밤낮 오직 주군만을 위해 만든,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최신 유행 플레이트 아머란 말이군요?”

“응!”

기사들을 모아놓고 갑옷 자랑 중이었다.

“으이구! 저럴 땐 꼭 애 같다니까!”

어린 집사는 주인의 체통을 지켜주기 위해 후다닥 쫓아갔다. 펄프 대장이 껄껄 웃었다.

“내 눈에는 두 사람 다 애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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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잦은 로드릭 영지에서 겨울은 군사적인 보충, 보강, 보급의 계절이었다. 전쟁으로 희생된 결원을 보충하고, 무기와 전술을 보강하고, 소모된 전시물자를 채워 넣었다.

일련의 과정은 로벨과 펄프 대장이 어린 집사의 철저한 디펜스를 뚫고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진행되는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진짜? 진짜야?”

“예. 진짜예요.”

로벨과 펄프 대장은 못 믿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늑대성에 상주하는 울프 용병단을 200명으로 늘리고, 숙영지를 3배로 증축하자는 의견을 어린 집사가 수용했다.

최종적으로 20명 증가와 숙영막사 한 동이 목적이었던 로벨과 펄프 대장은 그만 당황해버렸다.

“웨던 남작도 그러더니만, 요즘 왜들 이러지?”

“어차피 영주님의 재산인데,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로벨의 매끈한 얼굴과 펄프 대장의 주름진 얼굴이 동시에 창백해졌다.

“왜, 왜 그래? 그러니까 무섭잖아?”

“무슨 화난 일 있소? 외팔이 때문이면 내 혼쭐을 내주리다.”

어린 집사는 ‘어라? 이게 통하네? 다음에 써먹어야지’ 따위를 생각하며 겉으로 버럭! 소리쳤다.

“웨던 남작이 말했잖아요! 볼프 후작이 전쟁준비 중이라고요!”

“그거야 뭐, 항상 있는 일 아니야?”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과 한판 벌이려는 것이겠지.”

“아, 그렇겠네? 똑똑한데?”

“별말씀을, 마로드.”

늑대성의 군사책임자들이 태평하게 떠들자 어린 집사가 도리어 화를 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군사비를 늘려달라는 거예요? 일단 우기고 본 거야? 이게 뭐야!”

“아니,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도 직감이랄까, 경륜이랄까.”

“꼭 뭔가 터질 거 같아서...?”

어린 집사만큼 복잡한 추론을 하지는 않지만, 전사의 본능으로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아무튼, 좋아요. 병력을 보충하고 화살과 화약을 비축해요. 공사비가 굳어서 그 정도 여유는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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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소설에 심취한 소년과 농사일에 싫증이 난 청년은 종종 ‘용병’이란 고소득 전문직에 흥미를 가진다. 그러나 막상 용병들은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낀다. 돈을 만지는 것은 전쟁이 났을 때뿐이고, 평소에는 부랑자나 다름없이 지내며 허드렛일을 하거나 도적질로 연명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도 한 몫 버는 것은 쉽지 않다. 영악한 영주들은 용병대장을 통해서 ‘신뢰할 수 있는’ 용병을 고용하는데, 용병대장 눈에 띄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용병대장은 자신이 부릴 용병을 실력과 연줄로 뽑는데, 가난한 신출내기 용병은 감히 말조차 붙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용병업에 뛰어든 청년 중 절반은 이름만 용병이지 부랑자, 좀도둑, 동네 건달 따위로 연명하다 성난 농부나 사나운 행상인 손에 불구가 되어 화려하지 못한 전성기를 끝마쳤다.

“저 사람이 다 울프 용병단 지원자라고?”

어린 집사는 울프 용병단 주둔지에 바글바글 모인 인파를 보고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100명 추가로 뽑을 뿐인데 700명이 넘는 용병이 찾아왔다. 볼탄 반도의 용병이란 용병은 전부 모였다. 로벨의 랜서(Lancer) 흉내쟁이가 콧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우리 울프 용병단만한 곳이 없지요. 전쟁 끝났다고 해산하라고 안 하지, 수당 따박따박 나오지, 노후 보장해주지, 장기 복무하면 땅도 주고, 집도 주고, 마누라도 주고...”

“누가 땅을 줘요? 그리고 마누라는 직접 구해야지! 왜 우리가 구해줘!”

로벨은 수행원이 티격태격하든 말든 위풍당당하게 전투마 ‘조랑말’을 몰았다.

하얗게 빛나는 파나케아 셀릿과 바람을 빗겨내는 듯한 필드 아머와 한눈에 ‘진짜’임을 알 수 있는 흐룬팅과 아론다이트, 그리고 그 모든 장비를 갖춘 젊고 아름다운 기사의 모습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이나 전설 속의 기사 같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넋 놓고 예비 고용주를 쳐다보는 뜨내기 용병들에게 말했다.

“저분이 우리 용병단의 최고 지휘관이자 볼탄 반도의 실세 로벨 로드릭 후작 나리야. 이름이야 다들 알고 있지?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 무적무패의 기사, 킹 메이커, 포클랜드의 후작, 늑대성의 주인...”

아버지의 낡은 갑옷을 훔쳐 입고 찾아온 신입 용병부터 수차례 전쟁을 치른 자칭 베테랑 용병까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영웅 중의 영웅, 전설 중의 전설을 각막에 새겼다.

“포클랜드 시티 성문을 주먹으로 때려 부쉈다는 게 사실이오?”

“주먹이 아니라 발이라던데?”

“에라이, 머저리들아! 사람이 어떻게 성문을 부수냐! 성문지기를 향해 호통치니까 기세에 눌려서 홀린 듯이 성문을 열었다잖아!”

“아니, 음, 그게 더 힘들 거 같은데?”

허풍쟁이 이하 울프 용병단은 웃음을 참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옛 신의 천사들이 강림해서 수비병을 도륙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는 괴담(?)까지 나왔다. 외팔이가 애꾸눈 어깨를 쾅쾅 두드리며 ‘너희들이 천사였냐? 날개 어디 있냐? 등짝! 등짝 좀 보자!’ 따위를 떠들다가 몰매를 맞을 때 간신히 1차 심사가 끝났다.

로벨의 요구조건에 맞춰 말을 탈 줄 아는 사람, 크로스보우나 롱보우를 다룰 줄 아는 사람, 대포를 다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 선발했다. 완력이 좋은 용병, 전투경험이 풍부한 용병이 다수 있었지만 제외했다.

“그런 용병은 이미 많아.”

외팔이, 애꾸눈, 허풍쟁이, 겁쟁이, 코골이보다 참전경험이 많은 용병은 지극히 드물다. 후계자 전쟁, 정통성 전쟁, 검은 숲 전쟁, 왕위계승전쟁 등등 굵직한 전쟁만 꼽아도 한 손으로 다 세지 못하니 어지간한 용병은 무용담을 꺼내지도 못했다.

어린 집사가 계약서를 확인하며 물었다.

“말이랑 활은 그렇다 치고, 대포병은 왜 뽑아요?”

로벨은 흠칫! 하고 몸을 떨었다.

“여유자금이 있잖아? 그렇지? 그걸로... 음... 대포를 몇 개 사면 좋지 않을까?”

“와하하! 영주님! 농담도 참!”

“하하! 농담 아닌데?”

“......”

“...안 될까?”

“에잇! 당연히 안 되죠! 대포 하나가 얼만 줄 알아요? 게다가 포탄은? 화약은? 활잡이야 사냥이라도 써먹지! 대포 따위를 어디다 써요!”

어린 집사가 길길이 날뛰자 눈치 빠른 원로 울프 용병단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주종관계가 뒤바뀐 호통과 애원이 한동안 이어졌다.

원로 중의 원로, 펄프 대장이 귓구멍을 후비며 중얼거렸다.

“결국은 사겠지?”

“뭐, 그렇겠지.”

로벨이 고집부리면 결국은 들어주게 되어 있었다. 그게 기사 나리와 어린 집사의 관계였다.

펄프 대장 이하 원로 울프 용병단은 신병티가 물씬 나는 신입 울프들을 돌아보았다.

“200명의 용병단이라...”

“우리 정말 많이 컸소. 그렇지 않소?”

펄프 대장은 기억을 더듬어 울프 용병단이 창설된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스무 명도 안 되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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