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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86화 (186/605)

186화. 유랑악단

186화. 유랑악단

올해 추수제는 어느 해보다 성대했다. 검은 숲 출신 영지민과 로드릭 시장 상인과 세 자릿수 울프 용병단이 모두 참가하기 때문이다.

축제규모가 커지자 필연적으로 한 몫 챙기려는 행상인, 유랑악단, 광대, 떠돌이 용병 등등 온갖 외지인이 찾아왔다.

“이러면 추수랑 상관이 없잖아!”

어린 집사는 골목 구석구석까지 가득 찬 인파에 빼액! 소리 질렀다. 저 인원이 양 갈비 하나씩만 먹어치워도 농장 하나가 사라진다. 옛날의 로드릭 마을이면 파산이다.

“에헤이, 이런 날까지 쪼잔하게 굴지 맙시다.”

“축제야 북적일수록 좋잖소.”

“당신네들 돈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지!”

어린 집사의 가냘픈 절규는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과 모닥불을 담은 맥주와 맥주에 절인 고기를 막지 못했다.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온 유랑악단의 단장이 맥주통 위에 의자를 올리고, 의자 위에 요령 좋게 올라가 꾸벅 인사했다.

“이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거룩한 옛 신과 자애로운 영주님께 감사드리며, 지금부터 신나는 소음과 불편한 연주로 여러분의 귀를 괴롭혀 드리겠습니다.”

악단장이 지팡이를 휘저으며 셋, 둘, 하나 신호하자 악사들이 자그마한 류트와 휴대용 오르간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4분의 3박자 경쾌한 남부춤곡이었다.

7살 이후 키가 자라지 않은 광대가 자신의 키만한 심벌즈를 휘두르고,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서로의 팔짱을 끼고 빙글빙글 춤을 췄다. 잠시 뒤 분위기를 탈 줄 아는 처녀총각도 짝을 지어 동참했다. 원심력을 이기지 못해 떨어질 때도 있지만, 개의치 않고 파트너를 바꿔서 다시 돌았다. 노래와 웃음으로 움직이는 커다란 바람개비들 같았다.

마녀 키르케가 깔깔거리며 로벨의 팔을 잡아당겼다.

“기사님, 기사님, 우리도 춤을 춰요.”

“아, 안 돼. 나 이거 입었어.”

로벨은 망토자락을 살짝 올려서 카스튼 부르스트 양식의 필드 아머를 보여주었다. 어린 집사의 도움 없이 혼자 입으려고 고생을 많이 했다.

“추수제에 왜 갑옷을 입어요?”

“제, 제일 비싼 옷이니까...?”

“그냥 자랑하고 싶은 거잖아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동시에 소리를 빽! 질렀다. 모처럼 한마음 한뜻이 되었다. 본인들도 신기한지 서로를 멀뚱멀뚱 보았다.

“기사님이 안 되면, 아쉬운 대로 꼬마 집사님이랑 놀아야지. 갈까요?”

“꼬마라니요? 이제 제가 더 크거든요?”

“베에에-! 아직 아니거든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팔짱을 끼고 모닥불 쪽으로 나아갔다. 어린 집사가 최근 부쩍 커서 키가 엇비슷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로벨은 부모의 심정으로, 혹은 소녀가장의 마음으로 미소 지었다.

가을밤은 시원하고, 모닥불을 따뜻하며, 사람들은 아름답다.

펄프 대장은 리암 수사의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트림을 섞어서 중얼거렸다.

“이거 참. 격세지감이 느껴지는군.”

“격, 격, 뭐요?”

외팔이 더치는 맥주잔이 성이 차지 않는지 노르만 투구에다 술을 채워서 기분 좋게 위장에 부었다. 애꾸눈은 펄프 대장의 말과 외팔이의 행동을 짧은 시로 표현했다.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변해도 그대로인 것은 그리운 옛 친구밖에 없구나.”

외팔이는 기분이 나빠졌다.

“오늘 따라 왜 이리 어려운 말들을 쓰는 거요? 나 바보라고 놀리는 거요?”

“그래! 이 멍청아! 넌 뭐 느끼는 거 없냐?”

“그니까 뭘 말이오?”

“5년 전, 아니, 6년 전에 이런 추수제를 어디 상상이나 했더냐. 재작년만 해도 골골거리는 노인들과 코흘리개 꼬마들만 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슈.”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펄프 대장만이 아니었다. 중장년층의 마을주민도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이웃 영주와 상인이 축제 내내 선물을 보내왔다. 비단옷, 도자기, 고급진 무기를 보내온 것은 양반이고, 대놓고 금궤와 은궤를 꺼내놓기도 했다.

로벨은 술 취한 어린 집사가 ‘좋아요! 좋아! 보석은 없어요?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 이히히힛!’ 어쩌고 떠드는 것을 말리고 술과 고기 이외에는 모두 돌려보냈다. 그 덕분에 3일 내내 술과 고기가 모자랄 일은 없었다.

“마음껏 먹어. 아직도 많아.”

“우리 기사 나리가 최고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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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마을 추수제는 무려 3일 동안 진행했다. 젊은 친구들은 열흘이고 보름이고 놀아도 상관없지만, 나이 든 사람과 장사하는 사람은 더 이상 놀 수 없었다. 젊긴 하지만 할 일이 많은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포목점의 매부리코가 돼지바위 아래 밭의 장녀 얜이랑 결혼한대요.”

“그래?”

로벨은 시장에 갈 때마다 싹싹하게 인사하는 포목점의 젊은 주인과 홀아버지의 지극정성을 허리둘레로 증명하는 17살 소녀를 떠올렸다.

“언제 그렇게 됐데?”

“추수제 중에 눈 맞은 모양이에요. 걔네 말고도 서너 쌍 더 있어요.”

“정말 잘 됐네.”

조상대대로 자리 잡고 살아온 로드릭 마을주민과 최근 2~3년 사이 흘러들어온 이주민의 자연스러운 화합이었다.

“젠장! 그래서 내가 곧장 오자고 했잖아!”

“난들 이럴 줄 알았냐? 시끄러! 좀 닥쳐!”

성 밖에서 시끌시끌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말(馬)소리도 함께였다.

“익숙한 목소리네?”

“반갑지 않지만요.”

어린 집사가 뚱하게 대꾸했다. 잠시 뒤, 울프 용병단 기마 소대 소속 발가락과 흉내쟁이가 들어왔다.

“기사 나리! 저희 왔습니다요!”

“응. 어서와.”

로벨은 남자가 봐도 반할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그러나 발가락과 흉내쟁이는 서운했다.

“기사 나리, 정말 너무합니다요! 저희가 없는 틈에 추수제를 끝내다니요?”

“흐흑! 무려 1년을 기다려 왔는데!”

로벨이 난감한 표정을 짓자 어린 집사가 대신 버럭! 화를 냈다.

“지금껏 핑핑 놀다 와서 뭐라는 거예요? 깁스 자작령이 무슨 이역만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비싼 전투마까지 타고 가서 왜 이제야 와요? 그래놓고 뭣이라? 서운해? 너무해? 못해 먹겠네?”

“아, 아니, 못해 먹겠다는 말을 안 했는데...”

“아! 몰라! 몰라요! 두 사람 다 감봉이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창과 칼이지만, 창칼을 지배하는 것은 예산이다.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할 사나운 용병들이 부피로 보나 질량으로 보나 자신의 반밖에 안 되는 집사에게 쩔쩔매었다. 로벨은 먼 길, 사실은 멀지 않은 곳에서 온 부하들을 위해 적당할 때 끼어들었다.

“어떻게 됐어? 뭔가 찾았어?”

“에휴! 말도 마십시오. 거기 영지민들이 아주 못돼 처먹어가지고 마구간 한 칸 빌려주면서도 돈을 요구합니다요. 게다가 말먹이 값을 사람 먹는 값보다 더 처받습니다. 진짜 이 친구가 안 말렸으면 그 셋 중 셋은 그날 요절이 났을 겁니다요!”

“그러니까, 뭐 좀 찾았어?”

“사실 코가 시뻘건 뚱보 놈은 손을 봐... 와하하! 칼자루는 왜 잡으십니까요? 기사 나리의 버릇이란 것은 알지만 가끔 깜짝 놀랄-스르릉!- 찾았습니다! 찾았습니다요!”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무릎 위에 올리고 아마포로 칼날을 닦았다. 두 용병은 물론이고, 로벨 본인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누구야?”

로벨의 질문은 가끔 머리와 꼬리가 없다. 그래서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답을 하지 못한다.

“검은 성입니다요.”

“...볼프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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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그림 리퍼가 한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프란시스 시티 밖에서 습격한 암살자를 기억했다.

‘그대의 진심은 무엇이오. 악마의 추종자요, 아니면 악마와 싸우는 자요.’

수백 마일 떨어진 검은 성을 향해 질문했다.

‘어쩌면 둘 다 일지도.’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은 굴복해서, 속아서, 혹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이용당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로벨은 볼프 후작을 만나 솔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피를 부를지라도 말이다.

“...오기 전에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웨던 남작을 만났으면 해요.”

“응?”

로벨은 북해의 찬바람이 몰아치는 검은 성에서 어린 집사가 호통 치는 늑대성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어린 집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불만을 토로했다.

“아이참! 아까부터 말씀드렸잖아요! 로드릭 마을과 로드릭 항을 연결하는 시장 도로요!”

“으응. 듣고 있어.”

“그 길을 쭈욱- 이어서 노스폴드 시티까지 확장하면 좋겠다고요.”

“그렇게 멀리까지?”

“이이익! 안 듣고 있었잖아!”

당장은 볼프 후작을 만나러 갈 수 없을 듯했다. 7개 성과 4,000명의 영지민을 통치하는 자리는 한가하지 않았다. 더욱이 겨울이 코앞이었다.

“겨울철에 탱자탱자 놀면서 식량이나 까먹는 인부들로 시작하는 거죠. 물론! 공사비의 절반은 노스폴드 시티 상인이 내야죠!”

“아만다 항에서 노스폴드 시티까지... 좋을 것 같은데?”

“아만다 항이 아니라 로드릭 항이요. 당연히 좋죠. 물류량이 3배 이상 많아지고, 걷어 들이는 통행세도 수천 페닝이 될 거에요.”

바람이 옮기는 물량은 발과 바퀴가 옮기는 물량의 기본 10배가 넘는다.

“노스폴드 시티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가 로드릭 항이에요. 웨던 남작도 바보가 아니니까 거절하진 않을 거예요.”

“그런데?”

“돈이죠. 돈. 그쪽에서는 우리가 공사비를 내기를 바랄 거예요.”

“그럼 안 되잖아.”

“그러니 협상해야죠! 돈 이외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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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를 불러 앉혀놓고 로드릭 영지의 미래가 걸린 중대한 협상을 예행 연습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노스폴드 상인 대상으로 세금 감면, 통행안전보장, 유사시 군사지원, 네? 왕의 도시를 누가 공격하냐고요? 지금의 국왕 폐하를 왕위에 올린 사람이 누굴까요? 아하하! 그렇죠? 그리고 몇 해 전에 오크 소동을 떠올려보세요. 오크 소동 몰라요? 세상에! 외국인이세요?’

아야와 이야카가 하품하고 벽난로로 머리를 돌렸다. 수만 페닝이 오고 가는 협상이지만, 하는 짓은 소꿉놀이 수준이었다.

로벨의 역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치거나 가끔 눈살을 찌푸리고 칼자루를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좋아요! 어차피 저쪽에서 내놓을 수 있는 패는 뻔해요. 잊지 마세요. 우리의 목표는 2만 5천 페닝을 뜯어내는 거예요!”

그리고 실전. 노스폴드 시티 시장 웨던 남작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5만 페닝을 전부 부담하겠소.”

“...어라?”

로벨과 어린 집사는 협상 시작 2분 만에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그것도 200% 초과였다. 웨던 남작은 어린 집사가 건네준 계약서의 한 부분을 지목했다.

“단, ‘유사시 군사지원’이란 부분을 조금 강화했으면 좋겠소.”

로벨은 웨던 남작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 밑이 괭하고 볼살이 움푹 들어갔다. 의복은 하인들이 잘 챙겨줘서 깨끗하지만, 본인이 직접 관리하는 수염과 장신구는 너저분했다.

“무슨 일이 있소?”

웨던 남작은 선뜻 대답하지 않고 차를 내렸다. 로벨은 차보다 술이 좋았지만, 고상한 젠트리 앞이라 꾹 참았다. 웨던 남작은 동방차로 목을 축이고 한숨으로 여운을 토했다.

“검은 성 때문이오.”

로벨은 늑대성 밖에서 다시 듣게 된 이름에 당황했다.

“볼프 후작이 왜?”

“그자가 미친 것인지, 최근 자유도시 내정에 간섭하고 있소.”

“내정간섭이라면...”

“용병을 보내서 도망친 농민을 잡아가는 것은 기본이고, 사트로 시티와 교역하는 상인에게 막대한 관세를 물리고 있소. 우리 도시민 중에도 피해를 본 사람이 적지 않소.”

로벨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볼프 후작은 이유 없이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오.”

“그 속내를 안다고 자신하시오? 아무도 모르게 블랙우드 시티를 점령한 자요.”

로벨은 자신하지 못했다.

“무엇을 의심하는 것이오?”

웨던 남작은 찻잔을 뚫어지라 보며 말했다.

“제후가 재물과 사람을 모으며 할 일이 뻔하지 않소. 전쟁이오. 북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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