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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85화 (185/605)

185화. 강철

185화. 강철

로벨 로드릭 후작군은 육로와 해로를 병행해서 대대적인 회군을 실시했다.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기분 탓이 아니었다. 푸른고래 호와 청새치 호로 물자를 수송해서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행군했다. 그 결과 닷새 만에 늑대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승리하고 돌아온 군대가 대부분 그렇지만, 로벨의 군대 또한 표정이 밝고 발걸음이 기운찼다. 얼굴의 절반을 붕대로 감은 소년도, 어쩌면 평생 다리를 절게 될 청년도 마중 나온 가족과 친구와 애인 앞에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조세감면 등의 보상도 일부 있으나, 그것보다 무사히 가족 품에 돌아온 것이 가장 큰 포상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았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전사자의 가족은 기쁨의 홍수의 외진 바위가 되어 소리 없이 통곡했다.

“후작이요?”

사지 멀쩡히 돌아왔으나 즐겁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로벨은 눈꼬리가 삐쭉 올라간 어린 집사의 눈치를 보았다.

“응...”

“그럼 진짜 왕의 기사인데, 농장 하나 안 줘요?”

“으응...”

“그게 뭐야! 당장 가서 땅 달라고 해요! 아니면 산이든 호수든 아무거나 받아와요!”

“어떻게 그래... 그래도 고문직이라 급료가 나와.”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요. 얼마나 준데요?”

“매년 2,000페닝?”

어린 집사는 팔짱을 끼고 끙-! 소리를 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큰돈도 아니라 애매했다.

“그건 좀 낫네요.”

“그치? 그치?”

로벨은 어린 집사의 기분이 풀리자 활짝 웃었다. 코딱지만한 농장 받아 봐야 가물거나 병충해가 휩쓸고 지나가면 2,000페닝은 고사하고 2페닝도 못 건질 수 있다. 그럴 바에는 안정적이 봉급이 나았다.

“아! 맞다. 갑옷 장인이 다녀갔어요.”

“어어? 언제? 어디 있어?”

“고오오급 갑옷이 어디 뚝딱 나오나요. 영주님 치수를 불러주고, 대략적인 디자인을 이야기해줬어요. 가만있자... 여기 도안이 있었는데...”

어린 집사는 볼탄 반도 각지에서 올라온 각종 서류 더미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찾았다. 수백 명의 군사와 수십 피트의 성벽 앞에서도 당당한 로벨이 숫자로 가득한 서류 뭉치에 의기소침해졌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난 카스튼 부르스트 양식이 좋은데, 가슴에 홈을 여러 개 파고, 허리를 잘록하게 하고, 스커트가 넉넉하게 해서 안장에서 편하게...”

“...그리고 그리브에 세로 홈을 내고 발끝에 뾰족한 쇠못을 달자고요? 전부 이야기했어요. 영주님이 매일 노래를 불러서 귀에 딱지가 앉았다고요.”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며 갑옷 도안을 찾아 보여주었다. 로벨은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그림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플레이트 앤 메일의 컴포지트 아머에 비하면 상당히 날렵한 인상이었다. 관절까지 전부 판금이라 견고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보였다.

“언제 찾으러 가면 돼?”

“완성되면 가져올 거예요. 그리고 세부적인 조율은 이곳에서 해주겠다고 해요.”

로벨은 뛸 듯이 기뻐했다. 아니, 체면불구하고 정말 뛰었다. 아야와 이야카가 컹! 컹! 거리며 좋다고 따라 뛰었다. 사람이나 늑대나 비슷해서 손만 있으면 손에 손잡고 빙글빙글 춤을 췄을지도 모르겠다. 어린 집사는 어이가 없어서 실없이 웃었다.

“그렇게 좋아요?”

“응!”

“그럼 기분 좋게 밀린 일을 시작할까요? 우선 하반기 로드릭 상회 예산안부터 살펴보죠.”

로벨은 사람의 기분이 얼마나 빨리 다운될 수 있는지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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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과 로드릭 마을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부상자는 로벨과 마녀 키르케의 도움으로 점차 회복되었고, 일손부족으로 밀린 농사도 급한 대로 해결되었다. 이제 마음 놓고 한 해를 마무리하면 될 듯했다.

“누가 그래요?”

“응? 아니야?”

“소금광산이랑 식품공장 결산도 해야 하고, 도로공사 마무리도 해야 하고, 추수제도 준비해야 하고...”

로벨은 진저리치고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깁스 자작의 일이 먼저야.”

“깁스 자작이요? 왜요? 영주님이 돌아오자마자 도망쳤다는데요?”

“아니야. 그렇게 끝내면 안 돼.”

로벨이 우려하는 것은 깁스 자작 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철성, 혹은 검은 성이 개입하지 않았을까 의심했다.

“그쪽에 사람을 보내야겠어.”

“괜한 일 같은데...”

“조심해서 나쁠 거 없어.”

로벨은 허풍쟁이를 보낼까 하다가 ‘왜 또 접니까요!’라며 길길이 날뛸 것과 지난번에 같이 가서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어 비교적 뉴 페이스인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발을 보내기로 했다. 두 사람도 그리 내켜 하지 않았지만, 어린 집사가 충분한 포상금을 제시하자 흔쾌히 응했다.

“요약하면, 후작 나리나 백작 나리가 개입했는지 알아보란 말입지요?”

“후작 나리 백작 나리 하니까 꼭 우리 나리 같은데?”

“어허! 어허! 어디 우리 기사 나리와 비교해?”

“아첨은 그쯤 하면 됐어요.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해요.”

로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어린 집사와 두 용병을 보았다. 과연 그러했다.

어린 집사는 활동비 명목으로 선수금을 쥐여 주고 통 크게 전투마를 가져가도록 허락했다.

“농땡이 피우지 말고 빨랑 갔다 오라고 허락하는 거예요. 말 먹이 신경 쓰고, 유사시에는 온몸을 던져서 보호하세요.”

“역시 우리 집사 나리!”

“서운한 말을 안 하면 서운하지!”

발가락과 흉내쟁이는 시시덕거리며 깁스 자작령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한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 이어졌다. 로벨은 아침에 검술훈련, 점심에 행정업무, 저녁에 울프 용병단 사열에 참석했고, 그 중간중간 마녀 키르케와 놀아주고 아야랑 이야카를 산책시켰다.

북부의 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 찾아와 아차 하는 순간 숲과 들판에 깃들었다. 계절에 둔감한 꼬마들은 개울물을 뒤집어쓰고 희희낙락 떠들고, 무릎으로 날씨를 점칠 수 있는 노인들은 벌써부터 모포를 꺼내 두르고 한숨을 쉬었다.

어미 양은 뿔이 안 난 송아지에게 박치기를 가르치고, 늙은 닭은 꼬물거리는 강아지에게 지렁이 잡는 법을 가르치고, 게으른 말은 여물을 우물거리며 그윽한 눈으로 노을을 바라보았다.

로벨은 붉게 타들어가는 북쪽 숲과 노랗게 물들어가는 추경지를 번갈아 보고 짧게 숨을 토했다.

“올해도 끝났네.”

“끼잉?”

아야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로벨은 늑대 남매의 목덜미를 긁어주고 시장으로 향했다. 로드릭 마을은 고층 건물이 늘어나서 옛날의 고즈넉한 풍경을 찾을 수 없었다. 남쪽과 북쪽의 큰길을 따라 하루에도 수십 대씩 마차가 오고 갔다. 최근에는 로드릭 항으로 들어오는 교역선이 생겨서 외국상인도 찾아왔다.

“영주님?”

“오오! 영주님!”

로벨을 알아본 주민과 시장상인이 모자를 벗으며 인사했다.

키가 훤칠한 미남 영주와 기품 넘치는 늑대 남매는 로드릭 마을의 상징과 같았다. 초행인 사람조차 한눈에 로벨 로드릭 후작임을 알아보고 갖은 아부와 아첨을 했다.

“무명이 자자하신 로드릭 후작님을 뵙게 되어 크나큰 광영입니다. 저희는 네일 공국에서 온 뒤떼 상단입니다.”

“저희는 노쓰우드 시티에서 온 빌터 형제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로벨은 환한 미소와 함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로벨의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하루에도 십 수 군데에서 오는 상인을 모두 기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모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영주님, 오늘 가져온 절인 청어입니다. 맛 좀 보시겠습니까요?”

“아니야. 괜찮아.”

로벨은 괜찮지만 아야와 이야카가 괜찮지 않았다. 덥석! 물어서 후다닥! 튀더니 저만치 떨어져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로벨과 행상인은 뻣뻣하게 굳어서 도둑 남매를 바라만 보았다. 두 마리 도둑은 눈 깜짝할 사이 청어를 해치우고 기분 좋게 하울링했다. 아우우우-! 아우우-!

“음, 그러니까, 맛은 있나 보네?”

로벨은 은화를 하나 꺼냈다. 행상인은 두 손을 휘저었다.

“아이고! 아닙니다요! 어찌 영주님께 값을 받습니까요! 괜찮습니다요!”

“아니야. 받아. 그리고 장사하고 남으면 성에도 몇 마리 보내. 내일 아침 스튜를 끓여 먹으며 좋을 거 같아.”

“아이고!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로벨은 계산이 끝나자 슬그머니 다가오는 아야와 이야카의 머리를 꽁! 소리 나게 때리고 로드릭 상회로 향했다.

헨리 피터 상회장은 뉴 로드릭 마을 양조장으로 시찰을 떠나 자리에 없었다. 그 대신 장남 페리 피터가 로벨을 맞이했다.

“아들이라고?”

“예. 영주님.”

로벨은 페리 피터를 가만히 살펴보았다. 이제 18살쯤 됐을까, 아버지의 나이를 생각하면 꽤 일찍 본 아들이었다. 키가 매우 커서 로벨과 비슷한데, 운동은 안 하는지 호리호리했다.

“아들이 있는 줄 몰랐는데...”

페리 피터는 빙긋 웃었다.

“가정사를 떠벌이는 분이 아니시지요.”

로벨은 페리 피터의 화법에서 호기심을 느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다 왔어?”

“에르비아 시티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왔습니다.”

“아, 그래?”

로벨의 눈이 반짝였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가 얼마나 유용한지는 리암 수사를 통해 충분히 깨달았다. 로벨은 헨리 상회장이 이 시기에 장남을 불러들인 이유를 짐작하면서 순순히 속아주었다.

“그럼 우리 영지에서 일해 볼 생각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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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린 집사와 상의해서 페리 피터를 뉴 로드릭 마을의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헨리 상회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늑대성에 찾아와 온몸으로 감사함을 표시했다. 그동안 행정관 역할을 겸해온 그람 형제도 뛸 듯이 좋아했다. 로벨은 페리 피터 행정관에게 임명장을 써주며 중얼거렸다.

“이참에 사람을 모아보자.”

“참 바람직하면서 불안한 소리네요.”

로벨은 페리 행정관과 리암 수사를 통해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를 불러 모았다. 그동안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해온 소금광산과 식품공장의 회계를 맡기고, 포클랜드 시티, 프란시스 시티, 페르젠 시티 등에 상회지부를 설치했다. 시세를 조사하는 동시에 정치, 외교, 군사동향을 살피는 일을 맡겼다. 옛날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전쟁에 뛰어드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가을 추수가 끝날 무렵,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물이 도착했다.

“보통은 공방에 직접 오셔야 맞춰드리는데, 으헤헤, 위명이 높으신 로벨 로드릭 후작님이라 특별히! 정말 특! 별! 히! 서비스하는 겁니다요.”

“흥! 우리 영주님이 입어주는 것이 그쪽의 영광이죠! 그랜드 챔피언의 갑옷을 만든 공방이라고 동네방네 선전할 거 뻔히 아는데 생색내지 마시죠?”

어린 집사와 갑옷 장인이 잔금 문제를 두고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집사와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장인의 기 싸움이 팽팽했다. 그러나 강철에 마음을 빼앗긴 로벨에게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워...”

신체의 굴곡을 고스란히 살린 유연한 구조. 화살을 빗겨내기 위해 촘촘하게 파놓은 홈조차 멋을 위한 세공처럼 보였다. 어깨, 무릎, 팔꿈치의 관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예술적이었다.

“정말 아름다워...”

“앗! 영주님! 침! 침 떨어져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질책에 깜짝 놀라 입가를 훔쳤다. 그 광경을 본 갑옷 장인이 음흉하게 웃었다.

“마음에 쏙 드시는 모양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어린 집사는 저 사악한 장인에게 상당한 액수의 팁을 줘야함을 깨닫고 좌절했다.

“으으으... 다음에는 영주님이 안 보는 곳에는 거래해야지!”

그 말인즉, 다음에도 갑옷을 사줄 요량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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